삼양리 출신 정경순 어머니 (1942년~)

인생의 질곡을 겪은 사람들을 타자는 파란만장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스스로를 그렇게 일컫기도 한다. 정경순 어머니도 “나 파란만장한 여자예요” 라도 하셨지만, 입가의 웃음은 그 지난한 굴곡을 넘어선 이가 누릴 수 있는 여유였다. 들려주신 이야기를 다 담을 수 없어 아쉽지만, 인생에서 높은 파도를 만났을 때, 누구나 만나는 것이고 돌파구는 반드시 있으니 두려움에 떨기보다 넘어설 방법을 찾으라고 누차 말씀하셨다.  

■ 다섯 살, 동네 한복판에 쓰러진 언니의 발작

6.25전쟁 나기 전 삼양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보다. 친구들과 마을 입구에 들어오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만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옥천여중에 다니던 큰 언니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다리를 떨고 눈은 흰자위가 다 드러났다. 점방 아줌마가 언니에게 무언가를 먹이고 언니는 계속 온몸을 떨고 있었다. 사람들에 둘러싸인 언니를 보자마자 나는 두려운 마음에 집으로 냅다 달렸고 엄마가 소식을 들었는지 저 멀리서 뛰어오고 계셨다. 그 사이 언니는 진정이 됐고 엄마는 언니를 업고 집으로 달렸다. 언니의 팔다리는 축 처져 있었고 내 손에는 언니의 가방이 들려있었다.

내 파란만장한 인생의 파고는 그때부터였나 보다. 그전에도 언니는 간간이 발작을 일으켰지만 어린 내 눈에는 띄지 않았고 어머니 아버지의 속앓이로 내내 숨겨져 왔다. 지금 뇌전증이라고 하는 병명의 형태와 비슷할지 모르겠다. 현대의학은 약물 등 치료 방법이 있지만 1949년 당시 뇌전증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고 그저 ‘발작’이라는 표현을 썼을 뿐이다.

■ 6·25- 가족의 해체 

전쟁의 소용돌이는 더 큰 두려움으로 엄습했다. 무더운 여름밤 어머니가 우리를 깨우고 보따리 하나씩을 쥐여주셨다. 큰오빠는 군대에 끌려갈지 몰라서 며칠 사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큰 언니 손을 꼭 잡고 부모님과 바로 위 언니와 같이 우리 다섯 식구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따라 어디론가로 향했다.

사실 오빠가 한 명 더 있었지만 어릴 때 홍역을 앓고 먼저 떠났다. 나에게는 기억조차 없는 오빠다. 어린 나는 부모님을 따라 내려가느라 어디가 어디인지 종잡을 수 없었고 내내 걷다가 밤이면 어느 집에 들어가 헛간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밤이면 논두렁에서 들리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 우리 동네에서 늘 듣던 소리가 주는 작은 위로였지만 어린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 언니가 또 발작을 일으키면 큰일이다. 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다행히 언니는 별 탈 없이 우리와 피난길을 무사히 내려가고 있었다. 며칠 밤을 잤다고 생각할 무렵 비행기 폭격 소리와 함께 다들 논두렁으로 굴러떨어지고 숨을 만한 장소는 다 찾아서 몸을 숨겼다. 나는 얼떨결에 큰 언니 손을 잡고 도랑 옆 나무 풀숲 아래 몸을 웅크리고 우리는 한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비행기 소리가 나더니 폭격이 시작됐고 아이 울음소리, 통곡 소리. 아 어린 내가 겪기에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

지옥이라는 말도 모르던 나이에 지옥을 미리 보았다. 그런데 그건 지옥이 아니었다.

폭격 소리가 멈추고 사람들은 다시 논길 위로 올라왔다. 나는 언니 손을 꼭 잡고 있었지만, 우리 눈에 언니와 어머니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들 무명 옷감으로 옷을 해 입고 떼 지어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 누가 누구인지 우리 식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 아버지 언니 이름을 불러댔지만 아무도 우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가족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짜 지옥은 지금부터였다. 언니와 나는 가족을 잃어버렸다. 아, 나는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너무 무서웠다. 언니는 김천에 있는 외갓집에 간다고 들었다면서 사람들에게 김천에 어떻게 가냐고 계속 물었다.

내 보따리를 그제야 열어보니 광목천과 비단 같은 보드라운 옷감 그리고 환으로 된 알약이 깡통 속에 들어있었다. 약은 어디에 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약간 역겨운 노린내가 나는 환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배탈이 났을 때 먹는 약이었다. 언니 보따리에는 밥그릇 숟가락과 젓가락이 들어있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피난길을 같이 가던 사람들에게 밥을 얻어먹고 옷감을 주기도 했다. 정말 사람은 또 그렇게 살게 되나 보다.

며칠 내내 울었지만, 우리 가족을 찾을 수는 없었다. 가는 길이 너무 힘들어서 언니와 나는 다시 오던 길로 돌아오게 되었다. 물어물어 다시 옥천으로…. 다행인 건 언니가 발작을 일으키지 않아 옥천까지 며칠이 걸려 우리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언니도 집에서 부모님을 기다리자고 했다. 그때는 언니가 너무 든든했다.


■ 옥천에서 대전으로 터전을 옮기다-포목점의 시작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등줄기에 땀이 식을 무렵, 잠결에 귀뚜라미가 소리가 들릴 때쯤 부모님과 언니가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죽었다 살아온 양 다들 부둥켜안고 울었다. 나는 그사이 언니와 하루하루 무사히 견뎌내고 있었다. 피난길에서도 멀쩡하던 언니는 부모님이 돌아오자 다시 발작을 시작했다. 먼저 피난을 떠난 오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옥천에 먹고 살 거리가 없다고 고생하더라도 큰물에 나가서 고생하자고 대전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는 대전으로 터전을 옮겼고 대전역 뒤편 소제동에 집을 얻고 아버지는 가마꾼 일부터 시작했다. 농사도 별로 없었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엄마도 재봉 일이며 남의 집 일을 해주시면서 근근이 먹고 살았다. 언니의 발작은 몇 달 한 번씩 우리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면서 식구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중학교는 겨우 다녔고 재봉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엄마는 인동 포목점 상가에 작은 점포를 냈다. ‘고운 주단’ 엄마는 솜씨가 고와서 손님들도 제법 있었다. 나도 눈썰미가 좋아 엄마 일을 도우면서 한복 짓는 일을 시작했다.

 

■ 결혼, 또 한 번의 굴레-결국 헤쳐 나오다

손님으로 왔던 아주머니의 중매로 스무 살에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금산 사람이었지만 대전에 나와서 목재소를 하고 있었다. 영 내키지 않은 결혼이었지만 부모님이 이미 결정 내린 결혼이라 물릴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다. 남편은 나보다 여섯 살이 위라고 했지만 뒤늦게 알고 보니 열 살 위였고 한번 결혼한 적이 있어 아이도 따로 있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지만 이제부터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할 때가 왔다. 남편의 전처는 아이를 두고 서울로 시집을 가버렸다. 아이들을 데려오라고 했다. 뱃속에는 우리 아이가 있던 때였다. 기가 막혔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은 해결책을 찾는 방법이 우선이지 푸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 아이처럼 키우려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잘해주었지만 ‘새엄마’라는 오명은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서 갓난쟁이를 돌보느라 아이들한테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똑같은 자식이면서도 못마땅해했다. 나는 전처의 아이들을 생각해서 우리 둘째를 낳지 않기로 결심하고 세 아이를 잘 키우고 싶었다.

큰아들이 중학교 다닐 무렵 집에 있는 금붙이를 다 들고 집을 나갔다. 아, 내 새끼보다 더 온 마음을 다했는데…. 억장이 무너졌지만, 도리가 없었다. 둘째 딸과 막내 우리 딸을 성심껏 키웠다. 둘째 딸은 나를 친엄마처럼 따라서 마음의 큰 위로가 되었다.

부모님이 연로하시고 언니를 내가 떠안게 되었다. 남편은 발작 일으키는 처형과 같이 사는 게 못마땅해서 불만이었지만 내가 자기 자식을 친자식처럼 키우고 있으니 마지못해 언니를 집으로 들였다. 불화는 계속됐고 나는 언니를 외면할 수 없었다. 가여운 여인...

남편은 목재소를 한답시고 일은 크게 벌이고 제대로 수습을 못 해서 내가 포목점을 하면서 목재소 일까지 거들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언니가 목재소에서 일하던 난봉꾼에게 악몽 같은 일을 당하게 되었다. 언니는 발작으로 시작해서 정신적인 문제까지 생기게 되었다.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남편은 남의 일인 양 아랑곳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이 무슨 잔인한 소리인지…. 나는 난봉꾼을 감옥에 집어넣었고 가치관이 쓰레기 같은 남편과 인연의 고리를 끊었다. 전처의 딸도 남편에게 보내지 않았다. 그런 아빠 밑에서 성장하느니 내가 언니와 그 딸까지 데리고 살겠다는 생각이었다.

■ 네 여자의 집, 엄마가 다른 두 딸, 뇌전증의 언니 그러나 행복한집 

손마디 마디 바늘에 찔려 양 손가락이 성할 날이 없었지만, 그 덕분에 포목점으로 돈도 좀 벌고 생활이 안정된 덕분인지 언니도 발작이 줄어들었다. 우리 둘째 딸은 사대에 입학해서 대전에 있는 학교 선생님 되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말의 의미를 나도 알게 되는 날이 찾아왔다. 

예쁘고 똑똑한 둘째가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아쉬운 건 비혼주의자가 되었다. 남자들이 줄을 서서 결혼하자고 하는데도 눈길 한번을 안 준다. 아빠가 보여준 실망스러운 남자 모습 때문인가 잠시 염려도 되었지만, 능력 있고 예쁘고 착한 딸이라 이제 걱정은 내려놓았다. 우리 딸의 인생은 우리 딸 것이니까!

우리 막내는 엄마 바느질 솜씨를 물려받았는지 의상디자인을 전공하고 자동차 연구원인 사위와 결혼해서 한강뷰가 내려다보이는 집에서 알콩달콩 잘살고 있다. 언니는 힘든 삶을 살았지만 내가 언니를 돌볼 여력이 되어 팔순을 넘기고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별하던 날 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장하다. 고맙다”라고 한마디 남겼다. 나는 내 할 일을 했을 뿐이었지만 우리 네 여자가 다들 험한 세상에서 잘 살아 냈다.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는 삶, 진즉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언니를 추모 공원에 묻고 돌아오는 길 하늘이 유난히 높던 날, 마음의 짐을 훌훌 벗어버린 날이었다. 내 마음속 한 편은 언니가 짐으로 자리 잡고 있던 것은 숨길 수 없다. 그저 그 짐도 내 것으로 인정하고 그다음의 행보를 했을 뿐이다. 나 하나의 결연한 의지와 자립으로 우리 네 여자가 모두 행복해졌다. 행복은 남이 가져다주지 않는다. 내가 만드는 것이며 인생은 어차피 혼자다. 동행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조금 더 행복하고 덜 행복한 것이지 불행이라는 말로 규정지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나는 불행하지 않았고 당연히 행복했다. 

우리 네 여인의 집은 아름다웠고 그 중심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축복받은 여인이다. 우리 두 딸이 선택의 갈림길이 많은 환경에서 성장한 덕분에 싫은 것, 좋은 것을 분명히 구분하면서 살 수 있어서 역시 인생은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게 되는 진리가 맞다. 굳이 나에게 점수를 준다면 좀 후하게 90점쯤 주고 싶다.

왜? 열심히 살았고 가족과 인생을 사랑했다. 그리고 행복한 네 여자의 집을 가꾸었다.

눈을 감으면 예쁜 그림이 그려진다. 파란 하늘 그리고 바람에 살랑거리는 숲.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여한이 없다는 말을 나도 한번 써보자.
 

엄마 미정이에요.
저를 몸으로 낳지 않으셨지만, 가슴으로 낳으신 엄마. 제게 엄마는 어머니 한 분뿐이에요.
여덟 살 처음 엄마를 만나고 아버지 뒤로 숨은 저를 “이리와 미정아” 하시며 다정하게 불러주시던 엄마의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나요.
저를 친딸처럼 아니 막내 미향이랑 똑같은 애정으로 친딸로 키워주신 엄마.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엄마에게 보답하고 싶어서 공부 열심히 했고 집에 있는 금붙이 다 들고 도망간 오빠의 몫까지 사죄하고 싶어서 착한 딸 되고 싶었어요.
솜씨 좋은 엄마가 계절마다 예쁜 옷 만들어 입혀주셔서 저는 공주처럼 자랐고 전과며 문제집 넉넉하게 다 준비해 주셔서 고등학교 선생님이 될 수 있었어요.
엄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할까요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엄마는 제 인생의 스승이세요. 사랑합니다. 엄마 제 걱정은 마시고 엄마 건강만 생각해 주세요. 이제 우리 둘이 남은 집, 엄마를 독차지하게 돼서 사실 너무 좋아요.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정경순 여사님! 
미정 올림

 

*이 글은 옥천신문과 제휴한 기사(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41)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객원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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