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이원면 강청리 권세환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이원 강청리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발그레한 뺨이 탐스러운 복숭아들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하게 만들었다. 유난히 전지가 예쁜 복숭아밭에서 권세환님을 만났다.

‘2020년 옥천군 제8대 복숭아 왕’ 이었던 권세환님은 그 이름에 걸맞게 복숭아 밭고랑도 가지런하기가 남달랐다. 이불 펴고 누워도 될 만큼 깔끔한 밭고랑, 튼실한 줄기에 주렁주렁 달린 복숭아들이 “역시”라는 감탄사를 불러왔다. 종이 모자 사이로 얼굴 내민 복숭아들은 살결이 고와 두 분의 땀방울이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권세환님은 20대에 사우디 건설인력 파견이 시작된 때 열사의 나라에서 찜통더위에 청춘을 던져보았고 목공 기술자로, 복숭아 농사꾼으로 40여년 넘게 부레 없는 상어처럼 쉼 없이 땀 흘려 지금 무릉도원에서 한 시름 놓고 있다. 땀 흘린 인생의 결실이 ‘천중도(복숭아 품종)’처럼 달고 탐스럽다. 복숭아 하나하나가 내 새끼라며 건네는 눈빛이 다정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 이원 강청리 권근만씨 아들 세환이, 소년목수로 사회에 이른 발을 내딛다

빛바랜 기억속의 할아버지 돌아가신 날, 금산에서부터 문상객들이 줄지어 찾아왔다. 마당을 꽉 채운 손님들로 초상집인지 잔치집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던 그 날은 아버지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초상 치루는 동안 먹어치운 술만 몇 섬 이라 할아버지 먼 길 떠나는 날, 이원 마당재 선산에 모시러 올라가는 길의 상여소리도 처량하지만은 않았다. 외롭지 않게 보내드렸다.

강청리에서 태어나 사우디에 2년 다녀온 외유를 제외하고 나는 강청리 밖에다 주소를 심은 적이 없었다. 이원은 복숭아 농사를 많이 짓던 고장이기도 했지만 아버지도 복숭아 농사를 짓고 부잣집 경리일을 봐주기도 하셨다. 그 시절 펜대 굴리던 일을 하셔서 먹고 살 걱정은 없던 집이었다. 마을의 上樑文(상량문)을 써주시면서 그 집의 내력, 공역일시 등을 기록으로 남겨주셨다. 나는 7남매 중 6번째 아들이었는데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서 부모님께 걱정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동네사람들은 대부분 이원초등학교 동창생들이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100년이 훨씬 넘은 이원국민학교 외에 지탄국민학교 대성국민학교가 있었는데 두 학교는 교적비만 덩그러니 남긴 채 폐교가 되었다. 우리 한창때는 1,800명 정도 되는 학생 수가 지금은 고작 100명을 채 넘기기 어렵다니 우리들은 가끔씩 모여 이러다 학교 문 닫을 일만 남았다고 푸념을 한다. 

소아바미를 앓았던 나는 학교 통학하는 길에 지치고 힘들어서 간간이 혼자 양호실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누워있으면 최 선생님이 옥수수 빵을 들고 들어오셨다. 문이 열리면 선생님보다 빵이 먼저 보이는 작은 사내아이였다. 가끔씩 많이 힘든 날에는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오셔서 아버지 등에 업혔다. 그 넓은 등에 업혀서 옥수수 빵 조각을 떼어먹으면 그 구수한 맛에 아픈 다리도 잠시 잊고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아이였다.

파주에서 미군부대 다니던 매형이 어느 날 구해준 미제 약이 나를 소아마비라는 올가미로부터 구해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그 약을 먹고 서서히 좋아지더니 어느 날 다른 아이들처럼 걷게 되었다. 음용으로 마시던 그 약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약을 먹고 소아마비로부터 해방되었다.

불편한 다리 탓에 10대의 내가 또래의 친구들과 같이 누려야할 상급학교진학, 육체적 성장등은 보폭이 한걸음씩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손재주가 좋았던 나는 빨리 사회에 나가고 싶어서 목공일을 배우게 되었다. 옥천에서 가장 큰 동네였던 이원에는 당시 목공소가 5개나 있고 제재소도 2개나 있었다. 나무장수들이 지게에 나무를 짊어지고 이원장에 내다팔던 정경은 나에게도 익숙하다. 이원장날이면 금산에서, 영동 양산에서 장을 보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원은 옥천에서 가장 큰 동네였다. 

목공소 가서 3년 동안 기술을 배웠다. 이원 동네에 내 손 때 안 묻은 집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문짝이며 장롱도 솜씨 좋게 짰고 유리도 깔끔하게 마감했다. 10대의 말미를 목공기술자로 보내고 동이면 금강유원지 근방 당재터널 지키는 중대본부에서 군 생활을 할 때 목공 기술을 뽐낼 기회들이 종종 있었다.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 1978년도 봄, 옥천에서 열사의 나라 사우디로


제대하고 진로를 고민하다 목공기술자로 사우디를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우디 건설 붐 바로 직전이라 초창기 선발대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원에 살던 故)이정태 어른이 사우디에 다녀온 분이라 사우디에 대한 정보도 얻고 해외공고를 보고 서울 가서 시험을 보게 되었다. 목공 기술자 일당이 한 달 평균 5-6일 근무로 가정하고 1978년도에 12,000원이었는데 사우디에서는 70만원을 받았다. 다들 큰 돈 벌어보겠다고 전국에서 모였다.

시험장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현장이었다. 실전에 투입되는 시험이었다. 등에 수험표를 달고 나무문 앞에 선다.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문을 달기 시작한다. 시간제한은 없지만 10분 안에 다들 마감을 했다. 고향에서 손 기술 제법 좋다는 소리를 듣던 기술자들이 모여서 문짝 다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현대 측은 문짝 다는 시험을 보면서 인건비까지 절약하는 역시 대단한 기업이었다. 연대보증을 서야 해외에 나갈 수 있어서 재산세 2만 원 이상 내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이원에는 적임자가 없어서 아버지 인맥으로 옥천에서 버스회사 하는 양반이 보증을 서주었다.

11시간 비행기를 타고 사우디에 도착했다. 134명중 25살이었던 내가 최연소 막내였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아침 5시30분에 알코바 현장에 내렸다. 창밖으로 뿌연 모래만 보이던 사우디, 듣도 보도 못한 그 나라에 도착을 했다. 지난밤의 열기가 식은, 아침시간인데도 문이 열리자마자 찜통의 훈기가 턱 까지 차올라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37도가 넘는 폭염에 압도당해서 앞이 안 보이는 모래바람은 뒷전이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고향 생각에 눈물을 주르르 흘린 날도 많았다. 25살, 몸은 뜨거웠지만 아직 마음이 단단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뜨거운 태양아래서 우리는 하루 종일 숙소만 지었다. 한국에서 급히 오는 현대 측 간부 숙소를 짓느라 비상이 걸렸는데 유리기술자가 없어서 유리를 다뤄본 내가 긴급 투입되었다. 나는 깔끔하게 마감하고 기술을 인정받았다. ‘권세환’ 이라는 이름이 공사 현장 여기저기서 불리어지기 시작했다. 힘들고 지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한 달이 지나 우리나라에서 1년 치 봉급만큼 돈을 받았다.

지치고 힘든 시간을 보상받듯이 그래서 한 달 만 더 버티자 하면서 4계절을 다보내고 왔다. 물론 그곳에는 사계절이 없다. 1년 내내 눈앞에 펼쳐지는 건 그저 사막 그리고 모래바람이었다. 파란 작업복은 공교롭게도 우리를 옥죄는 죄수복 같았다. 소금기를 잔뜩 먹은 작업복은 흥건한 땀으로 군데군데 얼룩무늬를 그렸고 겨드랑이 밑은 다 헐어서 움직일 때마다 쓰라린 통증을 참아야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견디면서 사는 맷집이 생겼다. 큰 사고 없이 1년 동안 800만 원 가량을 모았다. 지금 돈으로 7-8억, 과천아파트 한 채가 1,000만원도 안되던 시절이다. 땅도 사고 가족들을 위해 돈을 썼다.

결혼 사진
결혼 사진

 


■ 약혼사진 들고 다시 두 번째 사우디행 

1년 만에 귀국하고 다시 사우디 행 비행기에 올랐다. 힘들어도 큰돈을 벌수 있는 현장이라 젊은 나는 또 도전했다. 두 달여 쉬는 동안에 나는 아내와 약혼을 했다. 아내를 처음 만나던 날 작업복차림에 비까지 젖은 채로 선 자리에 나간 나를 아내는 못 마땅해했다. 아내가 거절하자 장인어른이 나를 보시고 “백사장에 던져놔도 살 놈이다” 라고 하시면서 약혼을 추진하게 되었다는 후일담을 나중에 들었다.

이원기차역에서 약혼녀의 배웅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사우디에 다시 도착하니 그 당시 현장반장이 “너, 가지 말라고 했는데 다시 올 걸 왜 갔다 또 오냐” 며 일 잘하는 내가 사우디 현장에 잔류하기를 바라던 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1년 계약인데 열 달 쯤 지나 아버지한테 편지가 왔다. 장가가라고 귀국을 종용하는 편지였다. 돈 버는 재미에 힘든 줄도 모르던 때라 망설였지만 결국 귀국 행 비행기에 올랐다.

1982년, 나는 29살 아내는 26살에 결혼을 했다. 서울은행에서 사우디 급여를 모은 1년 치 적금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고속버스에서 심장이 멎을만한 일이 벌어졌다. 

“손님 대전이에요. 일어나세요 손님” 집으로 오는 길, 한참 달게 자고 있던 나를 버스 기사님이 깨웠다. 부스스 눈을 뜨고 보니 아뿔사 무릎 위에 돈 봉투가 안 보였다. 선반 위에 내가 사우디에서 벌어온 돈 봉투가 턱 하니 웅크리고 있었다. 그 현금이 아파트 한 채 값이었는데 그 돈을 머리에 이고 그냥 잠들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돈이 그대로 있는 것도 당시 인심 덕분이었다.

서울에서 찾은 돈을 이원 농협에 맡겼다. 1,200만원, 당시 과천 아파트값이 800만 원 정도라 내가 맡긴 돈은 지금 시세로 12억 정도였다. 시골 농협에서 깜짝 놀랄 일이었고 나도 열사의 나라에서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결혼과 더불어 내 인생의 황금기가 도래하는 시기였다. 사우디 현대 현장에서 근무했던 이력으로 현대가 시공사였던 금강 휴게소에서 시설담당 업무를 하게 되었다. 지금은 없어진 70-80칸 정도 큰 모텔의 문짝, 세면대를 개보수하고 기술자로 20여년 일하면서 건설현장에 있었다. 현장을 떠나는 시기에 나는 고향에서 ‘도랫말 복숭아 농장’에 승부수를 걸었다.

■ 22년차, 복숭아 농장주의 인생 경작은 ‘천중도’를 수확하듯이 

강청리 우리 집이 이원 복숭아 농가 중 60년 정도의 맥락을 이어오고 있다. 아버님이 복숭아 농장을 하셨고 내가 내 이름을 걸고 시작한지 22년차다. 과일농사는 무엇이든 손이 많이 가지만 복숭아농사 또한 예외가 아니다. 여름에 먹는 복숭아도 2월부터 준비를 시작하고 4월 눈부신 꽃밭을 이루는 복숭아꽃이 피면 일일이 손으로 꽃을 따서 열매 맺을 자리를 잘 다독여야 한다. 5월 봄 햇살을 흠뻑 받으면서 서서히 알이 커지고 3개월간 무럭무럭 자란다. ‘대옥계’ ‘천중도’가 제일 당도가 높고 탐스럽다. 하얀 속살과 발그레한 뺨이 너무 탐나는 ‘천중도’를 보고 있자면 우리 손주들 보듯이 마냥 사랑스럽고 귀엽다. 1,400평 남짓 밭에서 4,000박스 가량 최상품을 수확하고 수출까지 한다. 

전국에 우리 복숭아 맛을 선보이며 뜨거운 여름을 보낸다. 잠시 휴식 후 다시 내년농사를 기약하게 된다. 수확 할 때는 풀을 베지 않는다. 풀을 깎으면 벌레들이 복숭아나무를 타고 올라간다. 그래서 풀 속으로 들어가라고 풀을 베지 않고 혹여 복숭아들이 가지에서 떨어지더라도 풀이 있으면 땅 바닥에 바로 부딪치지 않아 크게 다치지 않는다. 다 우리 새끼들이라 ‘덜 아프게 더 탐스럽게’ 키우고 싶은 마음뿐이다. 10월 달에 거름을 충분히 주고 추위에 잘 견디라고 볏집으로 나무를 켜켜이 감싸준다. 녀석들이 따뜻한 옷을 입고 추위를 잘 견뎌야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다. 6개월간의 보이지 않는 공을 들여야 한 달 간 수확의 기쁨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뿌린 대로 거둔다. 세상의 이치를 말 못하는 땅도 알고 있다.

이제 7월말부터 8월 중순까지 우리 복숭아밭은 당도 높은 복숭아 향으로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할 것이다. 최상품으로 꼽는 ‘천중도’ 보다 더 탐스러운 우리 여덟 명의 아이들, 윤여헌 권주희 윤예린 윤서린 권민규 강윤희 권연지 권도율 그리고 고마운 아내가 내 인생 최고의 당도 높은 수확이다. 어디 ‘천중도’에 비할까!

며느리(뒷줄 왼쪽에서 두번 째)의 편지.


아버님 안녕하세요. 예쁜 며느리에요. 폭염의 한가운데라 바깥에 조금만 서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흘러요. 어느 덧 복숭아 수확 준비시기가 다가와 정말 바쁘시죠?
늘 아버님 댁에 가면 정갈하게 정돈 되어 있는 밭이 너무 예뻐서, 밭이 늘 자랑스럽고, 여기 저기 알리고 싶어요. 그래서 수확 철이 되면 저는 별로 도와드리는 일이 없는데도, 덩달아 신이 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더위에 걱정도 되고 많은 계획과 생각들이 앞서요. 
그런데 특히나 올 해는 아버님 무릎이 많이 편찮으셔서, 걱정이에요. 늘 자식들 걱정에 손자손녀 생각에 몸을 아끼지 않으시는 우리 아버님. 이제는 복숭아도, 자식도, 손자손녀도 물론 중요하시겠지만, 그래도 아버님 몸을 제일 아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아버님 건강이 최고예요. 언제나 부족한 며느리를 최고라고 “예쁘다 예쁘다”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 아버님 사랑은 며느리죠. 예쁜 며느리 강윤희 올림 -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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