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면 김종철 선생님(1953~)

옥천을 누가 시골동네라고 할까. 멋진 노신사를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김 선생님에게는 노신사라는 낱말도 나이라는 숫자로 매겨지는 한정된 단어다. 패션 감각으로도 한 몫 하시는 김종철 선생님은 70년의 세월 속에서 때론 주연으로, 혹은 조연으로 자리매김하셨다.

70년의 성상을 쌓으신 선생님의 인생 이야기 속에 시골 동네에서 가장 먼저 도시 중학교로 진학하셨던 추억, 산업역군이었던 청년시절 이야기, 그림과 서예, 인문학적 소양의 시간을 쌓으면서 노년을 보내는 모습이 잘 살아 오신 지난날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누구나 예외 없이 삶의 이면에는 길을 잃고 헤매는 시간을 반드시 담보로 한다. 선생님도 어느 한 시절은 사통팔달의 길에서도 서성거려 보셨다. 그 속에서 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거나 또 다른 갈래 길로 발걸음을 내딛는 해답을 찾는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주연으로 조연으로 단역으로 역할을 배정받는다. 아직 인생 무대에서 내려오기엔 매력적인 미남 배우 김종철 선생님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이라면 그 중 몇 페이지를 들춰보자.

 

 ■ 지금은 안내면 동대리 사람, 황혼의 나에게 옥천의 고즈넉함은 선물이다

작정하고 동대리 사람이 되지 않았다. 옥천에서 조용히 살아볼 생각으로 눈여겨 봐둔 곳들을 찾아나서는 길, 차창 밖으로 스치듯이 동대리를 만났다. 25가구 가량의 작은 시골동네가 가슴에 확 안겼다. 망설임 없이 마을 언덕배기집에 둥지를 틀고 옥천에 주소를 심었다.

청년시절은 한국타이어에서 산업역군으로 활약하고 동종업계 사업을 하면서 성취감도 맛보고 돈도 벌어보았다. 10년간 한국타이어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대전으로 발령을 받아 새로운 곳에서 더 축적된 경험을 쌓았다.

사업에 대한 자천 타천의 기회를 모아 연구소의 도움과 조언으로 레이싱 타이어 고무 가공회사를 설립했다. 처음부터 승승장구 하지는 않았다. 전략과 계획처럼 사업이 진행된다면 사업은 성공이라는 공식을 낳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국타이어에 납품을 하면서 12년간 사업의 역량을 축적해나갔다.

1953년생이다. 어느새 일흔이 되었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내 나이를 말하면 남들도 놀라지만 정작 나도 뜨끔하다. 내가 벌써 70이라고? 되묻는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곡강(曲江)이라는 시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인생 기껏 살아본들 70세’ 라고 했는데 지금 내 나이가 기껏 살아봐야 닿는 그 나이가 되었는데 나는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다.

내 나이를 저울에 올려놓는다면 무게중심이 노년으로 기울 나이지만 요즘의 70은 시소마냥 정점에서 이리저리 중장년과 노년사이를 저울질하고 있다. 은퇴 후에 어학 수업, 그림 수업, 서예 수업 등 배우는 시간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헬스로 다져진 체력이 뒷받침이 되어 노익장을 과시한다고 하는 말도 어색한 그런 나이다.


■ 추억 보따리 많은 유복한 학창시절

원 고향은 충주로 5남매 중 외아들이었다. 초등학교는 충주와 단양 사이에 나룻배 뜨는 단양팔경 수몰지구 구단양이 고향이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충주로 중학교 유학을 나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님이 “종철아 큰물에 나가서 공부할 때가 되었다” 충주로 나가서 공부하라고 기회를 주셨다.

부모님은 농사도 지으시고 한약재 장사를 하셨다. 시골마을에서는 방귀께나 뀌는 집이라 아버님은 학교 기성 회장을 하시고 나는 그 덕에 동네에서 충주로 처음 유학을 간 중학생이 되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초등학교 5학년 후배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해보기도 했었다. 돈이 필요해서라기보다 기회가 주어졌고 아버님의 검소한 생활이 내 몸에도 습관이 돼서 한 달에 쌀 일곱 말을 받고 아이를 가르쳤다. 소 장사 하는 집의 아들이었는데 그 시절 소 한 마리면 자녀 대학까지 보내는 효자 노릇하던 보물단지라 그 집도 부자 소리 듣던 집이었다. 

손재주가 좋아서 바리캉(이발기구)을 사서 친구들 머리도 깎아주고 10원, 20원 받는 재미도 있었다. 돈보다는 호기심으로 이발을 해줬는데 그들이 주는 돈이라 마다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볼썽사납게 보시고 혼내셨다.

한번 웃고 넘어가는 짧은 추억이었지만 지금 나이 들어 수묵화를 배우고 있는데 생각보다 손놀림이 좋아 그림이 제법 태가 난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길들여진 손재주 덕분인지도 모른다. 손재주도 좋고 호기심도 많았던 때다. 추억 보따리가 두툼한 걸 보니 나의 10대가 메마르지 않았다는 자조에 위로가 된다.

수묵화의 재미에 빠지다
수묵화의 재미에 빠지다


 
■ 산업역군, 자동차 산업의 중심에 청춘을 심다


대학에서 화공과를 졸업하고 한국타이어에 입사를 했다. 우리 때는 산업화의 물결이 태동하던 때라 실력이 있으면 여러 회사에서 러브콜을 받아 회사를 골라서 가던 호황기의 시작이었다. 한국타이어 오리엔테이션에서 나는 타이어 시장의 비전을 바로 습득했다.

45년 전 그때만 해도 대단한 집에서나 차를 소유했던 시대, 향후 자가용이 집집마다 생필품이 되는 시대가 온다고 타이어는 그중 가장 번성한 사업이 될 것 이라는 전망, 그때는 먼 미래의 비전 같은 구호였지만 지금은 현실이 되었다. 이제 한 집에 식구 숫자만큼 차량이 늘어난 시대를 만나 타이어 사업은 가속도가 붙었고 자동차는 생필품이 되어 내내 호황을 누린 사업이다. 

은퇴 후에도 고무 관련 사업을 12년간 경영 하면서 보은 공장을 오갈 때마다 옥천이 마음으로 눈으로 들어와서 결국 옥천에 터를 잡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한 달에 하루 쉬면 다행이었다. 일요일 아침 6일간의 피로를 덜어낼 요량으로 소파에 누워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을 온 몸으로 맞았다. 때마침 울리는 띠리링 전화 벨소리. 

“ 김과장 뭐해? 출근 안해?”

이런! 부장님은 벌써 회사에 나오셨다. 휴일도 없이 일하던 그 시절이 고단했지만 돌이켜보면 심장이 뛰던 절정기였다. 요즘 청년들을 생각하면 일자리가 없어 삶에 지치고 두 평짜리 고시촌에서 시험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역사가 거꾸로 흐르는지 더 어렵던 시절의 우리가 성장가도를 달린듯하다. 부레 없는 상어처럼 일하던 그 시절로부터 멀리도 왔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장 뜨겁던 시절이다.

일본 타이어 업체 엔지니어 부부와 함께 (우측, 김종철 선생님)
일본 타이어 업체 엔지니어 부부와 함께 (우측, 김종철 선생님)


일본의 타이어 회사와 기술 제휴를 할 때였다. 일본은 우리보다 20년 정도 기술이 앞섰다. 타이어 기술은 무궁무진하다. 고무를 부위별로 디자인하고 지면에 닿는 부분은 빨리 닳으면 소비자가 거부하고 너무 늦게 닳으면 회사의 경제성이 떨어진다. 

고무는 다 등급이 다르다. 일례로 기름과 고온을 견디는 내구성이 다르고, 열대지방과 시베리아에 수출하는 타이어가 다 다르다. 하중에 잘 견디면서도 디자인이 좋아야 하고 가공 기술도 뛰어나야 한다. 

일본 타이어 회사에 기술을 배우러 일본 출장을 수십 번 넘게 다녔다. 기술 제휴를 한들 아주 디테일한 기술은 노출을 안 시켜서 그 기술을 빼내느라 여간 애를 먹었다. 그 현장에서는 애국심까지 분연히 타오른다. 

늘 승승장구일수 없듯이 책임자로 있을 때 금산 공장에 화재가 발생해서 1년 만에 설비와 생산을 차질 없이 복구시키느라 진을 다 빼기도 했다. 물론 징계를 받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 이후로 퇴사하고 관련업으로 보은에서 고무가공 회사를 12년간 운영하다가 현역에서 최종 은퇴를 했다. 이제 자유인이 되어 요일별로 다양한 배울거리를 맛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 행복의 역산(逆算), 이제 나의 행복으로부터 더불어 타인의 행복까지

옥천은 노인들에게 천국 같은 곳이다. 운동부터 학습할 수 있는 여건까지 골고루 잘 갖추어져 있다. 복지관에서 하루는 전화가 와서 “선생님 친구 분 소개시켜드릴게요”하더니 남자 두 분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또래의 외지인들 중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어주는 서비스가 너무 훌륭했다. 

한 친구는 미국에서 40년간 이민생활을 하다가 한국이 그리워서 옥천까지 왔고 한 친구는 서울에서 가구사업 하다가 옥천으로 귀촌을 했다. 각기 다른 삶의 방식으로 청춘을 보내고 옥천에서 새로이 친구가 되었다.

본인 작품 (월류봉 풍경)  
본인 작품 (월류봉 풍경)  

수묵화를 배워서 ‘월류봉’의 풍경을 내 손으로 그려서 거실에 걸어두었다. 기쁨은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 다른 수업도 재밌지만 수요일 수묵화 수업 날이 가장 행복하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수업을 하는 내내 웃고 즐긴다.

햇수로는 3년째인데 너무 재밌다. 유화는 덧칠을 계속하고 말라야 다음 작업으로 들어가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에 수묵화는 금방 마르지만 수정이 어려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붓을 놀려야 한다. ‘그림’을 ‘인생’이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는 것을 보니 그림속에서도 인생을 배운다.

그림은 소재가 중요해서 노는 날에는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나서고 간 길에 맛집에도 들러 여행의 맛까지 더불어 얻어온다. 요즘은 2년째 접어든 명리학 강의에 큰 재미를 붙였다. 배움은 끝이 없고 내내 기쁨을 준다.

김형석 교수님이 저서 <100년을 살아보니>에서 60세~75세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맞습니다”라고 응수할 수 있으니 지금이 두 번째 인생의 황금기이다. ‘착한 이기주의자’가 되어본다.

나를 제쳐두고 주변부터 행복하게 해주는 역할보다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그 기운으로 주변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더불어 복된 삶이다. 행복의 역산(逆算), 이 공식에 대입하는 하루를 시작하며 차 시동을 켠다.

본인 작품 (대청호 풍경)
본인 작품 (대청호 풍경)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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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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