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북면 추소리 1944년 정명순

하얀 모래사장에서 손가락 사이로 사르르 빠져나가던 모래알, 물에 잠겨 사라져간, 가슴으로 기억하는 고향, 하얀 가운을 입은 월남전의 간호보조원. 80세의 어머니가 지나온 날들에 이정표처럼 길을 안내하던 기억 조각들이다. 이제 어머니는 기억의 파편들을 모을 수 없다. 별이라도 달아드려야 하는 훈장 같은 날들이 계속 되던 우리의 작은 영웅이었던 어머니. 
치매가 일상을 잠식해 가는 어머니. 기억은 사라지고 있지만 파병 의료지원단 시절의 애환이 박제되어 기억을 뛰어넘었다. 하얀 모래사장에 추억이 묻힌 추소리의 절경이 이제 눈에서 멀어지고 바람소리만 아득히 들린다. 다행스러운 건 마음속에 화인처럼 굳어진 70년 전 그 순진한 여자아이는 아직도 추소리 모래사장을 떠나지 않고 있다.

간호사가 되고 싶은 꿈을 간직했던 앳된 얼굴의 스물 두살, 살아오는 내내 아픈 환자들에게 나의 작은 손길과 따뜻한 미소를 건네는 시간만으로도 행복했다. 이제 나이들어 치매와 만났지만 고통보다는 그리운 추억과 남은 여정이 나에게 선물처럼 다가왔다.


■ 파도처럼 떠밀린 인생, 운명처럼 다가오다

1960년대 말 월남전에 의료지원단으로 나뜨랑에 도착했다. 군의관, 간호장교, 간호원들이 모인 의료지원단의 일원으로 베트남 땅을 밟았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에 피비린내가 섞여 막사에 도착하자마자 똥물까지 다 토해내며 신고식을 해버렸다. 눈앞이 깜깜했다. 어머니가 식음 전폐 하면서 말린 월남 행이었다. 무모하다는 말로도 딱히 모면할 수 없는 행보였다. 나는 1년 7개월간 파월 의료지원단으로서 아비규환의 베트남 전장에서 부상 장병들 치료를 도왔다. 전문 인력이 아니어서 보조업무를 했지만 우리는 그 곳에 있었고 모든 순간에 함께했다.

3일째 되는 날. 앞마을은 폭격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와 24세의 나는 정신 줄을 놓지 않으려고 내내 내 뺨을 후려쳤다. 계속되는 구토와 어지럼증으로 하루하루 버텨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겨우 정신을 차릴 즈음 다시 나를 마음의 사지(死地)로 몰아넣었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부상병들은 연일 속출했지만 그 청년은 내 인생에 가장 충격적인 날로 기억될 그 날의 장본인이었다. 비명소리가 몰고 온 죽창에 허리를 찔려 온 몸이 피범벅이 된 스무 살 청년! 동공이 풀린 채 병원으로 이송된 병사는 게릴라 작전을 펼치던 베트공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당하고 목숨만 겨우 붙은 채로 실려 온 것이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그 병사가 온몸이 썩어가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5일 내내 고스란히 지켜본 후 열흘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남동생 또래의 그 청년이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보고 오열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죽음을 지켜본 후 나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6개월간 정혈도 하지 않았다. 나약한 내 자신에게 환멸의 오명을 덮어씌울 즈음 내 앞에 나타난 박 대위님.

얼굴이 하얀 그 남자는 작은 키에 다부진 남자였다. ROTC였던 박 대위는 병사들에게도 형님 같은 분이라 월남에 온 갓 스무살의 청년들에게 그보다 큰 위로가 없었다. 우리 의료지원단들에게 그 분의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청춘 남녀들이 모여 있는 전쟁터,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사랑이 싹트리라고는 짐작도 할 수 없었는데 내가 그 짐작할 수 없는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매일 쏟아지는 부상병들, 그리고 부상으로 고통받다 결국 죽음과 만나던 군인들이 내가 만나는 세상의 전부였다. 돌이킬 수 없다면 나는 그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 덜 고통 받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어느새 내 의식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마음의 중심이 사명감으로 옮겨가는 잣대는 박 대위님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 남자는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고, 우리는 그 포탄이 작열하는 그곳에서 서로 위로가 되고 그 위로가 발아되어 사랑으로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가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내 인생의 주역이었던 남편.

■ 전쟁터, 죽음을 연습하는 비극과 만나다

베트남은 연중 습한 날씨로 무더위와 싸워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후덥지근한 날씨가 연일 계속되던 때 어느 날 시원한 빗줄기가 막사 위로 떨어지면서 다들 한줄기 소나기 인양 대수롭지 않게 맞던 우박. 두두둑 빗소리가 유난히 거칠다고 생각했다. 우박인가 하고 손으로 받아보니 손바닥에 얕게 고인 빗물이 섬뜩했다. 우박이 아니었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다. 나는 곧 막사로 돌아왔다. 밀림에 들어가 작전 중이던 군인들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우박을 고스란히 맞고 다시 막사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날의 우박을 맞았던 군인들이 조금씩 다른 예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 같은 증상을 보이지 않았고 그 우박에서 비롯된 증상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일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간간이 피부에 반점이 생기고 호흡도 거칠어지면서 부대 안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날의 미지수였던 우박은 밀림의 나무 이파리들 씨를 말리던 고엽제! 

밀림을 초토화 시켜서 게릴라 전법으로 우리를 괴롭히던 베트콩들을 몰살하겠다는 작전이 결국 우리들의 희생까지 담보물이 되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파국을 몰고 올지 어쩌면 그들도 짐작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 또 다른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보수적인 염려는 반드시 필요했다. 밀림을 초토화시키는 그 엄청난 파괴력의 고엽제가 연약한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지 못했다면 그 또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지 속살을 드러내는 결과물이다.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이 있거나 의심이 되는데도 정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돌아가시는 분들을 보면 가슴 아픈 기억을 넘어 통탄 할 수밖에 없다. 전쟁의 희생양이라는 말은 그 분들의 죽음과 고통을 전혀 달래주지 못하고 아픔만 배가 시키는 말이다.

헬기에서 사정없이 뿌려대는 고엽제는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고 무방비로 확산됐다. 의료지원단이 아군ㆍ적군을 가리지 않고 치료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고엽제의 비극은 당대를 넘어 후대까지 대물림되는 고통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

55년 전 전쟁터에서 시원한 소나기처럼 쏟아졌던 고엽제, 아직도 끝을 내지 못한 숙명 같은 과제가 되었다. 

군인이 된 큰아들.
군인이 된 큰아들.


■ 내 인생 무대의 주역이었던 남편

파월에서 만난 나의 구세주 박 대위는 훗날 나의 남편이 되었고 우리는 전쟁터에서 꽃피운 사랑이 열매를 맺고 4남매를 낳았다. 남편은 베트남에서 내가 힘들어 할 때마다 바로바로 알아차리고 손 편지를 써서 나한테 슬며시 쥐어주곤 했다. 꼬기작 꼬기작 접혀있던 종이를 펼치면 ‘힘내세요’, ‘끼니 거르면 안 돼요’, ‘힘들면 잠시 쉬어요’ 라는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내 눈에는 내용은 다르지만 모두 ‘사랑합니다’ 라고 씌여 있어서 한 마디 한 마디 내가 견디는 힘이 되었다. 남편의 배려와 관심의 시작은 너무 나약한 내가 전쟁터에서 잘 견뎌주기를 바라는 동포애였다. 내가 힘을 얻을 때마다 오히려 남편의 마음이 사랑으로 자라버렸다. 

나는 1년7개월 간 베트남에서 근무하고 먼저 서울로 돌아와 국군통합 병원에서 또 다시 현장 업무를 계속하게 되었다. 숨 한 번 제대로 쉬기 힘든 전쟁터는 아니었지만 지뢰사고를 당한 군인들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사명감은 또 다시 불타올랐다. 남편도 본국으로 돌아오고 우리는 결혼이라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 막내아들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ROTC로 임관해서 경기도 모 부대에서 근무 중이다. 살얼음판 같던 전쟁터에서 만난 사랑이라 누구보다 각별한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남편은 10년 전에 대장암으로 먼저 세상을 등졌다. 내 인생에 성곽처럼 견고한 남편을 먼저 보내고 공허함을 달랠 수 없어서 나는 75세에 이른 치매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혼자서 지난날을 기억해 낼 수 없다. 딸이 있는 청주로 와서 딸 가족의 보살핌을 받고 있지만 희로애락의 감정선은 이미 희미해졌다. 전쟁터보다 더 아슬아슬한 치매와 만났다.  

 

■ 아픈 사람이 항상 나의 관심사였던 유년시절

학창시절에도 간호사의 꿈이 있어서 마을에서 놀다가 무릎이 까져 피가 나는 친구들을 보면서 먼저 뛰어가 손수건으로 무릎이라도 먼저 묶어주던 아이였다. 

명절 다음날 어김없이 내내 채소만 먹던 뱃속이 고기며 기름진 전을 만나 배탈이 나는 건 연중행사 같은 서민들의 일상이었다. 나는 배탈 났던 가족들에게 간장 종지그릇에 매실을 부어서 꼭 마시게 했다. 바늘을 호롱불에 달궈 소독을 하고 새끼 손가락을 따주면서 체기를 내려주던 겁 없는 아이였다. 할머니부터 부모님 그리고 우리 7남매까지 나는 열 식구의 응급 처방을 제법 했고 다들 속이 편해지면서 나보고 간호사가 되라고 한 마디씩 거들곤 했다. 

가정 형편상 간호사 공부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간호보조원으로 전쟁터에서도, 병원에서도 손품과 발품을 보태면서 어린 시절의 작은 꿈과 무관한 삶은 아니었다. 인생의 총체적인 그림은 점으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뿌린 씨앗들이 발아하는 과정이 우리 인생의 한 축 한 축을 지탱하면서 삶의 궤적이 쌓인다. 우리 삶의 씨앗 한 톨도 함부로 심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 뿌려진 씨앗이 훗날 어떤 열매를 맺게 될지 우리는 섣불리 짐작 할 수도 없다.

여름이면 55년 전 그 습하고 무더웠던 베트남의 기억이 피부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전쟁터로 내내 기억됐던 베트남을 칠순 때 가족들과 여행 장소로 다시 만나면서 아름다운 이면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 또한 오열하면서 환멸을 맛보았던 그 전쟁터가 남편을 만나는 가교가 되었고 내 삶의 변곡점이 되었듯이 우리 인생도 옳다 그르다, 단정 지을 수 없다. 우리는 매일매일 최선의 씨앗을 뿌리고 아름답게 발아하기를 바라면 된다. 더불어 최선의 노력을 구가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대하는 책임감 있는 자세다. 누군가 내게 전했던 과한 칭찬이 유난히 기억되는 날이다. 

“어머니, 별이라도 달아드려야 하는 훈장 같은 날들을 사셨어요. 감사합니다.”

물에 잠긴 고향.
물에 잠긴 고향.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키워드

#은빛자서전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