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관 의원의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은 지역주의 타파가 아니라 보호하려는 것
포항 시의원 허대만의 7회 낙선은 영호남 지역갈등이 아니라 정당에 대한 지역 선호도 차이
독일 주(州) 정부는 독립, 중앙의 연방정부는 최소한의 기능만 위임받아
중대선거구, 권역별비례 논하기 전에 지역정당 인정하고 지방분권 갖추어야
지역주의 타파 운운은 일본 식민지배의 전통 잇는 중앙집권의 독선

사진출처(한겨레, 2020.4.7.  https://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936063.html)
사진출처(한겨레, 2020.4.7. https://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936063.html)

김두관 의원(경남 양산을)은 지방분권과 지역 균형발전을 지향한다. 지난 노무현 정부 초대 행자부(행정자치부) 장관에 발탁되었을 당시, 국회에서 지방분권특별법, 국가균형발전특별법, 신행정수도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이것이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초석이 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 그는 1995년 무소속으로 나와 민선 초대 남해군수에 당선되었고, 행자부 장관을 역임했고,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경남도지사를 거쳐 국회의원에 당선된 바 있다.

동서일보는 한편으로, 김두관이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사회를 퇴행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지역주의 망령과 정면으로 맞서 승리를 쟁취한 인물”이라 평가했다.(동서일보, 2023.12.20.) 후자의 평가는 보수당 텃밭으로 불리는 부산, 경남 지역에서 민주당 소속 김두관이 경남도지사,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찬 전 총리도 김두관이 지역주의 타파에 일조했다고 보았다. “김두관 의원의 광역단체장 석권은 최초의 ‘지역 정권 교체’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다”, “승산이 크지 않은 도전을 흔쾌히 감당할 정치인은 많지 않다”, “그는 11번 도전해 6번을 낙선했는데, 그중 9번을 험지인 영남에서 도전했다”, “대승적 명분을 위해 두드리고 또 두드려 지역주의의 벽에 큰 균열을 낼 수 있었다” 등 의견을 개진한 것이 그러하다.(동서일보, 2023.12.20.)

이 같은 ‘지역주의’ 이해 관련하여 두 가지 오해가 있다. 첫째, 지역주의를 ‘망령’으로 정의하거나, 그 같이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고, 둘째, 국회의원 한 명(혹은 소수)이 당선되는 것을 두고 지역주의에 도전 혹은 균열을 낸 것이라 보는 것이다.

위 첫째, 지역주의는 왜 ‘망령’으로 평가되는 것일까? 이유는 두 가지 쯤으로 분명히 설명된다. 첫째, 지역민의 시각이 아니라 중앙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때문이고, 둘째, 민초가 아니라 국회의원의 입장과 필요에 따라 조명하기 때문이다.

여야 막론학고 국회 의석 확보하려는 정당이 여기저기서 표를 얻고 싶은데, 지역색이 너무 달라 그게 잘 안 된다. 그래서 지역색을 좋지 못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결국 정당의 바람에 부응하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이 된다. 여기서 이 나라는 국민 민초가 아니라, 정당과 중앙의 국회가 모든 잣대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서구 나라들은 정당, 국회, 중앙이 좌지우지하지 못 한다. 한 예로, 독일 16개 주는 거의 독립국가 수준이다. 헌법(주법)도 다르고, 각기 주 의회, 대법원, 행정조직, 재정을 따로 갖추고 있다. 또 지역구 의원(주 의회와 연방의회 등)은 정당에서 공천하지 않고, 시민이 직접 선택한다.

독일에서 독립적 체제를 갖춘 주 정부에 대해 중앙 연방정부가 지역주의 타파하자고 나섰다가는 몰매를 맞기 십상이고, 필히 내란으로까지 이어질 것 같다. 연방정부는 최소한의 권력만 위임받을 뿐, 주 정부의 고유성을 간섭, 침해하지 못 한다. 이 같은 연방정부의 한계는 현실의 권력구조에 의해 뒷받침된다.

반면, 한국 국회가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지방이 중앙에 종속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지방세 20%에 근 80%를 국세로 거두어 지방에 교부금 명목으로 다시 내려보내는 상황에서 지방은 중앙에 종속되어 길들여지고 있다. 이 같은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는 급기야 중앙이 지방의 고유성을 말살하고 획일화하려는 데까지 이르렀고, 이것은 일본 식민지배와 독재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지금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들이 있다. 조선인이 미개했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통해 개화, 근대화되어 오히려 득을 봤다는 주장이 그러하다. 원래 조선인은 뒷간의 똥물이 골목으로 넘쳐나는 비위생적 환경에서 사는 미개 민족이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을 개진하는 이들이 놓친 점이 있다. 어떤 빌미로든 타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긍지를 짓밟으며, 무력, 권력으로 억압해서도, 콩 놔라 팥 놔라 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민주란 미개 여부나 옳고 그름 여부를 막론하고 개인이 다른 개인을 지배함이 없이 서로 평등하다는 것이고, 서로의 관습과 가치관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농경사회 시절에 뒷간의 똥오줌은 비위생적인 것이 아니라, 귀한 거름의 원천이었다. 오줌이 마려워도 아까워서 남의 집에서 누지 않고 꾹 참고 있다가 제집에 와서 눈다. 할아버지는 새벽이면 똥장군에다 똥오줌을 퍼담아 밭으로 날랐고, 그 밭에 채소가 무럭무럭 자랐고, 그 채소를 먹고 우리네가 다 컸다.

지금 지역주의 타파 운운하는 이들은 지네들 필요에 의해 타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남의 고유성을 말살하고 획일화하려 든다는 점에서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들을 닮았다. 이들은 무례하게도, 지역민의 고유성을 말살함으로써, 이를 간직했을 때에 지역민이 향유할 수 있었을 편익성을 기회비용으로 날려버리도록 강요한다. 그 강요의 근거가, 지역민이 아닌 위정자의 일방적 편익, 다시 말하면, 각 지역에서 여야 국회의원이 골고루 나왔으면 하는 위정자 측의 필요성이다.

위 둘째, 국힘당 텃밭에서 민주당 국회의원 한 명(혹은 소수)이 당선되는 것이 지역주의에 도전 혹은 균열을 낸 것으로 볼 수 있는가? 답은 ‘아니올시다’이다. 국회의원이 어느 당에서 나오든, 그것은 국회의 문제일 뿐, 그대로 영남, 호남 간 지역민의 문제, 특히 갈등과는 더더욱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 한국 국회의원은 지역구, 비례대표를 막론하고 전국구이다. 어느 지역에서 뽑히든, 그 국회의 결정은 한 지역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경상도에서 국힘당, 전라도에서 민주당이 우세한 것은 각 정당의 정책 방향에 대한 선호도일 뿐, 지역 간 갈등에 기인한 지역주의가 아니다. 정당의 정책은 일정 지역에만 한정적으로 관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예로, (故)허대만은 26세에 무소속으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포항시의원에 당선되었다. 그후 민주당 소속으로 53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포항에서 7번 선거에 나서서 모두 낙선했다. 허대만의 생애를 두고, “지역주의의 거대한 벽” 때문에 나이 50이 넘도록 한 번도 고향을 위해 일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회자한다.

허대만이 “지역주의의 벽”에 부딪혔다고 규정하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 아니다. 그가 낙선한 것이 “지역주의의 벽”에 기인한 것이 아닌 것은, 설사 그가 당선되었다고 해도 그 때문에 “지역주의의 벽”이 허물어진 것이라 해석할 수 없음과도 같다. 그는 포항 출신으로 같은 곳에서 활동했으므로, 출신 지역으로 보아서도 지역주의 때문에 배제된 것이라 할 수가 없다. 경북이 국힘당 우세 지역인데, 허대만이 소속된 민주당의 정책이 그 지역 정서에 딱히 부합하지 않았던 것 뿐이다. 정당의 정책 선호도기 영호남 간 지역갈등으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그 지역의 지배적 정서를 공유하는가 여부는 ‘지역주의’ 개념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허대만은 상당 부분 그 지역민의 지지도 받았다. 7회 낙선(4회 국회의원, 2회 시장, 1회 도의원 선거 출마) 경험 중 1차례(4위)만 제외하고는 줄곧 2위도 지켰다. 투표인의 34%, 36%, 심지어 시장선거에서는 42%까지의 득표도 했다. 아깝게 2위에 그쳤을 뿐이다.

2위를 지킨 허대만을 두고, 딱히 “지역주의의 벽” 때문에 낙선한 것이라 호도할 수가 없다. 이는, 예를 들어 58:42의 득표 차가 있었다고 할 때, 58%를 얻은 이도 반드시 ‘지역주의’에 편승하여 승리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음과 같다. 이 경우 허대만은 아깝게 진 것이므로, 그것이 국회의원 선거라면, 그가 얻은 표를 사표(死票)로 돌리지 않기 위해서, 한 지역에서 두 사람 이상을 뽑는 중대선거구제 혹은 석패율제(소선거구제 선거의 지역구에서 아깝게 당선되지 못한 후보를 비례대표로 당선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실시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다.

한편, 중대선거구제 혹은 권역별 비례제를 도입의 필요성을 피력하는 이들이, 그 근거 관련하여, 국회의원이 지역 민원 해결사로서의 부담을 벗고 의정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전국구 국회의원은 지역의 이해와 무관하게 전국구 의정을 다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주장은, 국회의원의 역할이 원천적으로 지역주의 혹은 지역간 갈등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핵심은 “지역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지역과 중앙 간 권력구조적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국정당의 국회의원들이 지역 민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지역의 민원은 지역 자체에서 해결하도록 권력과 재정을 중앙에서 지역으로 위임하고 난 다음에야 그런 주장이 비로소 타당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지금같이 중앙 국회에서 근 80%의 예산을 주무르는 상황에서, 국회의원이 지역 민원을 백안시해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방을 홀대하는 중앙집권적 발상으로, 후안무치하다. 지역은 국회의원 선출하는 거수기에 불과하고, 그 의원은 국회에서 지역 민원에 귀 막고 중앙의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 아니다. 지역의 민원은 지역 자체에서 해결하도록 제도를 우선적으로 정비한 다음에야 그 같은 주장이 비로소 타당성을 갖는 것이다. 지역 의정과 중앙에서 다룰 의정을 기능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지역은 중앙의 시녀가 아니고,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하급기관이 아니라 서로 대등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여기서 독일의 경우를 다시 새길 필요가 있다. 독일의 연방정부는 최소한의 기능만 위임받아 전국적 현안을 다룬다. 반면, 각 지역의 16개 주는 각기 독립국같이 고유의 헌법, 의회, 행정, 재정 체제를 갖추고 있고, 중앙에 종속되지 않는다.

최근 기본소득당(용혜인)과 사회민주당, 열린민주당 등이 연대한 ‘개혁연합신당’ 측이 4월 총선에 대비하여 민주당을 포함한 민주진보진영이 비례연합정당을 만들자고 공식 제안했다.(뉴시스, 2024.1.22.) 동시에 용혜인 의원은 비례 15위까지 소수정당에 배분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회자한다.

용혜인의 이 같은 제안과 요구에 대해 일각에서 비난이 일고 있다. 용혜인은 왜 지역구로 출마하지 않고 비례로 안주하려 하나 하는 것, 또 비례 15위까지를 소수 정당의 몫으로 돌리라니, 민주당에 당연히 받아야 할 빚이라도 있느냐라는 비난이다.

그 주장의 타당성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여기서는 용혜인의 이 같은 주장이 여의도 국회의 풍경을 그대로 노정하고 있고, 국회의원 선거가 애시당초 지역주의 타파와는 무관하다는 점만 지적하도록 한다.

지역구든 비례든 이를 정당에서 공천하는 것은 정당의 독재이고, 국민 민초의 선택권과는 무관한 것이다. 민초는 정당이 공천한 인물 가운데서 불가피하게 이쪽이나 저쪽을 선택해야 할 뿐인데, 왜 그런 상황을 엉뚱하게 지역 간 갈등인 것으로 성격 규정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문제는 애시당초 영남, 호남 간 지역갈등과 아무 관련이 없다. 오히려 정당에서 인물을 공천하는 것은 민초가 직접 인물을 선택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일 뿐이므로, 정당 위정자와 시민 간 권력 다툼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민초는 거대 양당 혹은 소수정당이 공천하여 내미는 인물 중에서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주어진 선택지 가운데서 부득이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강요된 선호도는 지역 민초가 자발적으로 생성하는 영남, 호남 간 지역갈등이 아니다. 거대 양당은 민초를 향해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정당 독재의 권력구조적 기제를 감추고, 어쩔 수 없이 강요된 민초의 행위를 마치 자생적 지역갈등에 기인한 것인양 왜곡, 호도하고 있다.

여기에 소수정당도 거대 양당과 똑같은 행보를 따라하기가 앵무새같다. 거대 양당이나 소수 정당을 막론하고, 위정자의 우선적 관심은 누가 의원으로 입성하는가 하는 데 있을 뿐, 국민 민초의 선호나 애환의 목소리를 어떻게 제도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가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여의도에서는 모두가 독선의 늪에 빠져 있고, 너나 가릴 것 없이 출세지향적이다.

용혜인이 비례 15위까지를 소수정당의 몫으로 돌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당 독재의 여의도 풍경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거대 양당이 인물을 정하여 공천권을 행사하는 것이나, 용혜인이 비례 15위까지 소수정당의 몫으로 요구하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정당에서 후보를 좌지우지하고, 민초의 발언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어찌어찌 비례로 초선의원이 된 용혜인이 4년간 국회에서 배운 것은 공천권을 통해 정당이 독재하는 여의도 문화였던 것이다. 그래서 용혜인의 요구는 여의도 국회 풍속의 거울이다.

김두관 의원이 지향하는 지방분권과 지역 균형발전은 지역주의를 보호하려는 것일 뿐, 부득이하게 이루어지는 각 지역의 정당 선호도와는 무관하다. 그런 점에서 동서일보나 이해찬이 지방분권과 지역 균형발전을 지역주의 타파로 규정한 것은 본말을 전도한 것이다.

무소속으로 나와 포항 시의원을 지낸 허대만이 그후 민주당 간판을 달고 나와서 내리 7회 낙선한 것은 전국정당인 민주당의 노선과 인물에 대해 지역이 정서적으로 공감하지 않는 것일 뿐, 호남에 대한 거부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낙선은 지역주의 때문이라고 할 수가 없다. 더구나 민주당 소속 허대만이 포항에서 많게는 42%를 득표한 적도 있었다. 허대만이 51%를 득표했으면 지역주의가 아니었을 텐데, 42%를 득표하여 떨어졌으니, 이를 호남에 대한 반감, 즉 지역주의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다.

허대만의 낙선은 전국정당으로서 민주당과 국힘당 간의 지역 간 지지도의 차이일 뿐, 호남과 영남 간 지역갈등과 무관하다. 더구나 지역이 갖는 대체적인 정서 혹은 판단은 시비를 막론하고 존중되어야 하고, 전국구 정당 등 중앙 권력이 간여하여 교통정리할 일이 아니다.

전국정당에 대한 선호도 차이를 두고 엉뚱하게 영남, 호남 간 갈등을 탓하며, 지역주의를 타파해야 하겠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일본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던 논리와 같은 맥락에 있다. 조선이 미개했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고 개화시킨 것은 부득이하다는 주장이 그러하다.

일본은 조선을 위해 그 미개함을 개선하러 온 것이 아니라, 힘으로 억압하고 각종 물자를 징발해가려 했을 뿐이다. 그 식민지배로 인해 조선인은 자유의사로, 그것이 퇴보든, 정체든, 개선이든, 그 무엇이든지를 막론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깨쳐나갈 기회를 박탈당했다. 일본의 강점으로 인해 조선은 비싼 기회비용을 지불한 것이다.

약방에 감초같이 건수만 있으면 지역주의를 타파해야 하겠다고 나서는 위정자들은 지역을 중앙 권력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힘의 논리를 노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이 전국정당에 대한 지역 간 선호도 차이를 영남, 호남 간 지역갈등으로 몰아가는 행태는 일본식민지배와 독재의 억압적 근성이 여전히 한국 정치계에 뿌리 깊게 남아있음을 증명한다. 중앙집권 일변도의 편익 위주성 관행은 노무현 전 대통령 및 김두관 의원이 추구하는 지방분권, 지역균형발전, 나아가 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는 지역정당의 설립을 통해 지양되어야 한다.

문제는 ‘지역주의’가 아니라 중앙집권적인 국회의 근성에 있다. 국회에서 의장은 국민의 뜻에 따른 다수당의 권리를 부정하고, 불법적으로 의안 상정을 거부하며, 소수당과의 협치를 강요하면서 다수당을 식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 내에서 자행되고 있는 불법의 관행은 어떤 방법으로 의원을 뽑는지와 무관하게 자행되어 왔고, 앞으로도 이변이 없는 한 계속될 전망이다.

 

최자영 객원편집위원

최자영 객원편집위원  paparuna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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