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없는 것, 알싸한 그리움이 피어오르고
홍대 정문에서 큰길 따라 ‘서교타워’ 쪽으로 가다 보면 ‘서교푸르지오 아파트’가 있다. 거기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고개를 내밀면 ‘서울서교초등학교’가 보인다.
필자가 근무하던 당시(1984.3.~1988.2.)에 운동장은 100m 직선 트랙이 나올 정도로 널찍했다. 학교와 붙어 있는 서울시교육청 마포평생학습관은 야외 수영장과 정구장이 있던 자리다. 여느 학교와 마찬가지로 체육관은 없었지만, 졸업식을 치를 정도로 아주 넓은 강당까지 있었다. 강당이 있는 공립 초등학교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규모나 시설 면에서 어지간한 사립학교에 절대 뒤지지 않은 학교였다.
‘지역이 강한 나라, 균형 잡힌 대한민국’이라는 비전 아래 ‘방방곡곡 생기 도는 공간’이라는 국가적 전략은 아직도 요원하다. 지역이 낙후하고 교통이 열악하여 상대적으로 근무하기 어려운 학교, 근무하기를 꺼리는 학교가 많은 탓이다. 그러다 보니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학교를 대개 갑•을•병•특 구역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각각 가~라 급지로 구분하고 있다. 근무지에 따라 승진하거나 학교를 옮길 때 일종의 가산점으로 보상한다. 그러다 보니, 예나 지금이나 비밀스러운 ‘승진·전보 가산점 평정자료’는 섞갈리기 일쑤요, 끊임없이 동료를 홉뜨는 기제로 작용한다.
당시에는 서울에서도 학교 여건에 따라 급지를 나누고, 그에 따라 근무연한을 달리하여 특수 2년, 준특수 3년, 일반 4년 등 3단계로 구분했다. 하지만, ‘일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손’에 따라 A급지와 B급지로 세분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4급지까지 존재했다. 그러다가 1999년 3월부터 급지를 없애고 전보 주기를 4년에서 5년으로 바꾸었다. 북한산초교만 3년으로 예외 규정을 두었을 뿐, ‘은평뉴타운’이 생기면서 2022년부터 모든 학교가 5년으로 바뀌었다.
서교초교는 당연히 A급지였다. 게다가 서울교대 대용부속학교로서, 교생을 지도하는 교사에게는 부가점이 주어졌다. 따라서 승진을 비롯하여 전보, 보직, 업무, 학년 및 담임 배정 등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교장에게 알랑거리는 현상이 허다하고, 그럴 때마다 교장은 한껏 목에다 힘을 주던 시절이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하고, 천혜(天惠)를 입은 자만이 누릴 수 있던, 덧거리 점수였다. 교장이 되기를 포기한 일부 ‘교포교사’를 제외하면 너도나도 선호하는, 엄연한 특혜였다.
결론적으로 필자가 서교초교에 근무하는 동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나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은 물론 ‘6월 민주 항쟁’을 두루 거쳤다. 하지만 학교는 고양이 간 골에 쥐 죽은 듯 여전히 조용했다. 거의 모든 교직원이 겉으로는 애써 눈 감고 귀 닫고 얼굴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에 같잖은 조리돌림이 만연하고 부연 탁류가 범람했다. 장구를 쳐야 춤을 출 텐데 무턱대고 고개부터 끄덕이는 형국이었다. 전두환을 깊이 경모하던 한 아무개 교장의 전횡을 세 가지만 들어보자.
교생들을 검속하듯 강당에 앉혀 놓고
내일 수업을 협의하고 서서히 퇴근할 채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안◯◯ 교감이 교육실습생 모두 강당에 모이라고 했다. 가방이나 소지품은 교실에 두고 10분 이내에 모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한다. 무슨 포크 댄스 연수냐고 볼멘소리로 투덜대던 교생들에게, 판에 박힌 교장의 훈시가 쩌렁쩌렁하게 이어진다. 지도교사들에게는 그 틈을 이용해서 교생들의 책상과 가방을 이 잡듯이 뒤지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선생들은 일제히 ‘찌라시’나 ‘불온 문서’를 찾는 흉내를 내야 했다. 개중에는 실습록에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토씨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고 꼼꼼히 들여다보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뭐라도 적발하면, 실습주임을 거쳐 득달같이 교감에게 보고하고 교감은 담당 장학사에게 낱낱이 까바친다. 당사자가 교장실에서 시말서를 쓰고, 교육청에 전과(戰果)로 보고될 때까지 영문을 모른 실습생 전원은 퇴근 시각이 지나도록 속절없이 강당에서 대기했다.
대한민국의 안위 책임자는 민방위!
교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노기 띤 얼굴로 거칠게 쏘아붙였다.
“옛말 그른 데 없어. 일제 순사 욕할 게 아니라, 조선놈들은 인정사정없이 조져야 한다니까. 각하(전두환)의 우국충정을 몰라봐도 유분수지, 숨어 있던 빨갱이새끼들 다 기어 나와 허구장천(許久長川) 데모질이라니…. 역사적인 팔팔 올림픽을 앞두고 이게 무슨 개지랄이야.
하해 같은 우리 김◯◯ 교육장님은 말할 것 없고, 내 친구들 다 밤잠을 설친대. 진짜 이 나라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어. 자식뻘도 안 되는 것들 믿고 뭘 하겠어? 대학생 놈들이나 향토예비군이나 다 글렀어. 대한민국의 안위를 책임질 사람들은 민방위대원뿐이라니까.”
웃픈 졸업식
졸업식은 2월 18일, 11시 운동장에서 실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일 아침 하늘이 희끄무레하더니 9시쯤부터 눈발이 비치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예행연습’을 했지만, 이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식장을 어디로 잡아야 할 것인가? 교감이 둘이나 있었지만 안절부절못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다. 교감은 하릴없이 인근 학교에 문의해 보지만, 학교마다 사정이 다르다. 뾰족한 수는 없다. 교감은 교문 쪽과 전화기를 바라보고, 교무주임은 정문, 연구주임은 후문 밖에 나가 두리번거렸다.
눈발은 그칠 기미가 안 보인다. 어느새 물기를 품어서 척척 들러붙는 떡눈으로 바뀌었다. 10시쯤이 되자 안 되겠다고 판단한 두 교감은 부랴부랴 강당을 식장으로 꾸미도록 했다. 솜씨 좋은 선생 몇몇이 금세 강당 전면에 봉황을 오려 붙이고, 입구와 측면을 오색 풍선으로 장식했다. 드디어 10시 반쯤 교장은 교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다그친다.
“아니 여태까지 식장도 안 꾸미고 뭐했어? 이깟 눈 좀 갖고 왜들 이래? 선생님들, 서설(瑞雪)도 몰라요? 하늘이 내린 축복이잖아.”
늘 얼굴을 쳐들고 있는 천상바라기(天上~) 학교장이 지각하던 날!
교장바라기에 여념이 없던 선생들은 강당을 꾸미다 말고 부리나케 운동장 조회대 위로 상장과 상품을 진열하고, 남자들은 기사들과 함께 서둘러서 천막 두 개를 친다. 4층 교실에서 대기하던 5학년 학생들은 6학년 졸업생이 앉을 의자를 들고 운동장으로 나르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선생도 학생도 모두 구시렁거리는 이 한 명 없다. 졸업식장은 그렇게 ‘일사불란’하게 차려졌다.
400여 명의 졸업생이 눈을 맞으며 앉아 있다. 사진을 찍으려는 학부모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며 줄을 흩트리기 십상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5학년 재학생이 ㄷ자로 졸업생을 둘러싸고 서 있지만 소용없다.
어수선한 가운데 진눈깨비가 제법 굵게 흩뿌린다.
11시 정각, 교무주임의 ‘개회 선언’에 이어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마치고 등단한 교감은, 단상에 나란히 앉은 교장 육성회장 동장 파출소장 은행지점장 등을 향해 허리를 직각으로 접어서 인사한다.
가슴에 큼지막한 꽃사지를 단 그는, 상장함 속에 있던 허연 예식 장갑을 꺼내서 정성스레 비닐을 벗기고 양손에 낀다. 묵직한 안경을 들어올리며 단 아래에 앉아 있는 졸업생과 빙 둘러선 학부모들을 지그시 굽어본다. 이윽고 인조가죽으로 만든 상장 케이스를 공손히 받들고, 자못 근엄한 표정으로 ‘국민교육헌장’을 낭송하기 시작한다. 특유의 안동 지방 억양이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지는 동안, 졸업생 머리 위로 소나기눈이 쏟아진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1968년 12월 5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국민교육헌장 선포식이 있었다. 총 393자로 구성된 본 헌장은, 선포한 날을 1973년에 국가기념일로 제정, 시행한다. 1994년부터 기념행사가 폐지되면서 26년 동안 각종 교과서의 첫 장을 장식했던 헌장은 사라지지만, 정부 공식 법정 기념일에서 제외된 때는 2003년이다. 아무튼 그 당시에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 ‘대통령 박정희’를 고유명사로 여기기에 충분했다.
기쁨조를 자부하는 홍대거리 느티나무
도로 양쪽으로 느티나무가 사열을 받듯이 줄지어 서 있다. 나무도 늙으면 수피가 너덜너덜해진다. 언뜻 봐도 노거수는 아니다. 아직은 젊은 청춘이다. 큰가지 잔가지 할 것 없이 제법 푸르르다. 그런데도 피부병이 덧난 듯이 밑줄기 전체가 희멀겋다. 가까이 다가서기가 뜨악하다. 수피 곳곳이 지의류로 뒤덮여 있다.
지네발처럼 무수히 달려 있는 꼬마전등이 온몸을 친친 동여맸다. 가로수 사이사이 늘어뜨린 전깃줄에는 둥그런 알전등을 조랑조랑 매달고 있다.
지난해 핼로윈은 이태원 대신 훨씬 더 북적댔으리라. 연말에는 앙상한 가지마다 무수한 크리스마스 전구가 석 달 남짓 내걸리고, 머잖아 다가오는 부처님 오신 날을 즈음하여 눈부신 오색연등이 매달릴 것이다. 이래저래 홍대거리 가로수는 일 년 내내 하루도 빤한 날 없이 밤낮으로 형광빛을 내뿜을 것이다.
어떤가?
이를 본 당신은 황홀한가? 아름다운가? 그래서 휘황찬란한 그 빛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자아도취에 빠지는가? 아니면, 가로등과 화단에 은하수 전구로 요란하게 치장하고, 불빛 터널까지 조성한 서울의 도심지를 떠올리면서 성에 차질 않는다고 푸념하는가?
그래도 올가을 울긋불긋 단풍이 들고, 내년 봄엔 다시 움이 틀 것이다. 연둣빛 이파리 너울거리며 이내 짙푸르게 우거진 녹음이 시원한 풍광을 안겨 줄 것이다. 사람들의 눈길 손길 발길 따뜻하지 않아도, 대자연의 물길 햇길 바람길 통하리니, 아까울 게 뭔가? 오가는 이들 위해 내남없이 기꺼이 기쁨조가 되리라. 간밤에 여전히 밤잠 설치고 뒤척였을 텐데 나붓나붓 손짓하는 느티 잎이 더없이 곰살갑다.
풋내기의 객기마저 어르던 호프집 사장
경의선숲길 구간으로 들어서니 다소 왁자지껄하다. 예전의 추억이 몽실몽실 되살아난다. 전에 들렀던 ‘홍익호프’는 간데없고 크고 작은 건물과 매장이 즐비하다.
나는 그날 굳이 사장을 찾았다. 중년의 여성으로 기억한다. 보자마자 다짜고짜 내쏘았다.
‘이 집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들른다. 오늘 보니 아니다 싶어 한 말씀 드린다. 소변기가 막혀서 넘치고 있다. 사장님 이미지와 영 딴판이다. 화장실 한 번 가보시라.’
술김에 많이 부풀렸으리라. 잠시 뒤에 보타이 차림의 남자 종업원이 과일 한 접시를 들고 왔다. ‘사장님이 보낸 거’라고 했다. 어린 맘에 한없이 으쓱거렸으리라. 아랑곳없이 친구들과 노닥거리며 잇따라 들이켰다.
난생처음으로 생수를 본 우리아이들
홍대입구역 9번 출구가 보인다.
‘홍익뷔페’도 이 언저리에 있었다.
며칠 전, 서교호텔 뷔페에서 교직원 회식이 있었다. 말 그대로 산해진미였다. 난생처음으로 먹어본 음식들이 자꾸 걸렸다. 월급날이었다. 큰맘 먹고 아내랑 아이들을 불러냈다.
큰애가 3학년, 작은애가 1학년쯤이었을 게다.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유리컵에 냉수를 따라주었다. 이를 본 아들과 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마디씩 했다.
“엄마, 물이 이상해요.”
“아빠, 이거 마시는 물 맞아요?”
아내는 집에서 사시사철 보리차를 끓여 냈다. 물색은 늘 진한 갈색이었다. 그런데 아이들 앞에 놓인 물은 투명색이다. 더구나 구수한 물맛이 아니다. 니 맛도 내 맛도 없이 밍밍했으려니 이상할밖에.
파우치, 쪼만한 백 감싸 안은 머위할머니
이제 막 좌판을 펼치나 보다. 할머니 한 분이 머위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비닐 보따리 행색으로 보아 손수 꺾어 오셨나 보다. 그 옆에는 또 다른 보따리가 보인다. 붉은 색 천으로 덮여 있다. 민들레, 씀바귀, 두릅, 아니면 개두릅일까?
홍대거리에 문 없고 매대 없고 걸상 없는 사업장이다. 허리를 굽히니 정수리가 드러난다. 영락없이 나처럼 휑하다. 그러고 보니 염색한 파마머리다. 한껏 다듬고 나왔으리라.
순간 목에 건 숄더백이 눈에 띈다.
가다 말고 멈춰 섰다. 허름하다. 머위를 펼쳐 놓으면서도 오른손으로 가방을 감싸고 있다. 저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잔돈 몇 푼과 어르신 교통카드, 그리고 소중한 또 다른 무엇이 들어 있을 거다. 어쩌면 할머니에게 가장 소중한 가방일 테지만, 누구처럼 굳이 ‘파우치, 쪼만한 백’이라고 눙칠 필요는 없다. 왜? 넌지시 뒷구멍으로 건네받은 가방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지퍼가 열려 있지만 할머니는 무심하다.
어디에서 오셨을까? 파주, 문산, 양평, 용문? 도대체 누구랑 언제 어디 가서 꺾어 온 걸까? 저 커다란 보따리를 예까지 혼자서 날랐을까? 할머니도 단골이 있으려나? 언제쯤 좌판을 접으려나? 집에 갈 때 몇 닢이나 손에 쥘까?
무엇이 그리도 못 미더울까?
머위 냄새 밸까 봐서 그러나? 잠깐 새에도 그립톡을 파는 가게 쥔장이 수시로 들락거린다. 죽사발이 웃음이요 밥사발이 눈물이라 했다. 어쩌면 드난밥 드시면서 품삯 받는 놉꾼인지도 모르지 않은가? 아서라, 얄궂은 짓 그만 멈추고 자그마한 의자라도 내드려라.
늙음을 확인시켜 준 홍대거리
잘파세대(Z세대 + 알파 세대), K뷰티 트렌드, 콜라보 팝업존, 이종(異種) 산업 콘텐츠, 색조 화장품, 푸드 앤 드링크 코너, 프랜차이즈 카페, 아이웨어 매장, 글로벌 고객을 겨냥한 특화 점포, K뷰티 특구, 미디어 파사드, 그래피티 아트, 각질·트러블 패드, 캐롯, 카로밍, 카밍, 워터패드, 럭스 에디트, 프래그런스바, 트렌딩나우존, 맨즈토탈존, K뷰티나우존, 헤어스타일링바, 스트리트 문화….
홍대거리의 어떤 매장을 다룬 한 경제신문에서 인용한 말이다.
똑같은 매장을, 그것도 지난 4월 25일에 3회, 그리고 4월 30일에 1회, 총 4회나 싣고 있다. 기사로 위장한, ‘기사형 광고’가 분명한데, 그 경제지에서는 주요 ‘경제 뉴스’로 취급하고 있다. 이보다 더 황당하고 답답한 건 내 자신이다. 상품명인지 아닌지도 알지 못하니 쓰임새는 감도 잡을 수가 없다.
비 그친 오후, 고희를 갓 넘은 우리 셋은 ‘젊음의 아이콘’이라는 홍대거리를 활보했다. ‘기왕이면 우리도 밤에 다시 걸어볼까?’ 하다가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불타는 금요일을 넘어 연중 불이 꺼지지 않는 거리라는데 내가 무딘 탓일까? 뭣 하나 일렁이는 게 없다.
작년이 옛날이다.
하물며 삼십 오륙 년 전이니 말해서 뭣하랴. 객쩍은 소리로 들려도 어쩔 수 없다. 간판도 상품명도 대체 말뜻을 모르겠다. 무얼 사고 무얼 먹을지 망설여지는데, 하물며 주문하는 방법조차 익숙하지 않아 낯부끄럽다. 이래저래 젊은이들과 소통하긴 글렀다. 몇 번을 가도 이방인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 홍대거리는 늙음을 확인시켜 준 거리다. 그렇고 그런 거리였다.
편집 :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그 코미디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광풍처럼 불던 국풍에 다 날아갔을까요?
이제는 민풍이 봄바람 처럼 온누리 가득 불어오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