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를 죽인 사람들》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차이 나는 평화 생각 -
언제부턴가 광화문 광장은 민심의 흐름을 가늠케 하는 풍향계 노릇을 하고 있다. ‘촛불혁명’ 이후에는 우리만의 문화를 벗어나 지구촌 사람들의 의식의 향방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다양한 광화문 풍경 중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이스라엘기를 함께 흔들며 시위하는 모습을 보면 오늘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또 국민으로서 엄청난 혼란에 빠지는 느낌이 든다.
한국-미국-이스라엘 세 나라 국기가 함께 휘날리는 이 낯선 조합은 종교적으로 결국 한국의 기독교가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해 열렬한 지지를 표명한다는 의미이다. 대체로 여기에 모인 군중들은 복음주의적 입장을 자부하는 기독교인들이고 일부에서 ‘극우’라는 상대적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종교적으로 기독교인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와 미국교회가 기독교라는 팻말을 달고 있다면 이스라엘 국가를 지배하는 주체세력은 유대교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유대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유대교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은 이스라엘 사회의 중심 세력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 상식이다.
최근 이스라엘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2023.10.7.)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된 지도 벌써 8개월이 넘었는데 가자지구 보건당국이 밝힌 바에 의하면 3만 7,084명이 사망하고 8만 4,494명이 다쳤(한겨레신문 2024.6.9.)으며 팔레스타인 어린이와 여성이 다수 포함된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끔찍한 결과와 가자지구의 참담한 모습만 시시각각 전해질 뿐, 전쟁 끝맺음에 대한 희망 섞인 이야기는 깜깜무소식이다.
비록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선제공격을 감행하였고 기다렸다는 듯 이스라엘이 막강한 화력을 과시하며 맞붙은 전쟁이지만 이스라엘의 탄탄한 재력을 밑바탕으로 하는 강력한 군사력과 미국을 위시한 동맹들의 막강한 힘이 뒷받침해 주는 국제관계의 우월성은 가히 하늘을 찌르고 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레위기 24:20) 는 최소한의 등가성 원칙조차 무너진 상태에서 과잉 복수의 금지 원칙은 구두선에 불과할 뿐이다.
지구촌의 들끓는 여론에 밀려 유엔이 손을 써 보려 하지만 유엔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고 그저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애를 태우며 훈수를 들어도 전혀 씨가 먹히지 않는다. 미국 또한 선거 여론을 의식하여 조 바이든 대통령이 전쟁 정리를 주장하는 척하지만 표리부동한 그의 태도만 가끔 노출될 뿐 별로 효과가 없다. 마지막으로 독선과 아집의 화신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처분만 기다릴 뿐 속수무책인 양상이다.
이 지점에서 이스라엘의 핵심적 본질로 상징되는 ‘유대교’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앞세우는 ‘기독교’는 서로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이라는 단어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면, 오늘날 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의 삶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기독교인이라 이름하고 이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체성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기독교와 유대교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공통점과 차이점은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우선 믿고 따르는 경전의 측면에서 기독교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사용하는 반면 유대교는 구약성서(타나크)만 경전으로 인정한다. 구약성서는 두 종교가 모두 함께 사용하지만 신약성서는 기독교만 수용하고 유대교는 신약성서를 거부한다는 이야기이다.
형식논리상 현재의 두 종교가 같은 하느님을 섬기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맹렬히 공격하면서 그 자체를 전복시킨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결국 역사적으로 유대의 종교 권력은 로마의 정치권력과 야합하여 예수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빌라도의 사법적 절차를 가장하여 예수를 골고다의 처형장으로 내몰았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예수를 인정할 수 없는 정적(政敵) 정도가 아니라 죽여 없애야 할 철천지원수처럼 생각하였을 것이다.
미국 연합장로교회가 채택한 1967년 신앙고백서에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참 인간성(true humanity)은 결정적인 한 번으로 실현되었다. 팔레스타인의 한 유대인인 예수는 그의 동족 가운데 사셨고 그들의 가난과 시험과 기쁨과 슬픔을 같이 당하셨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과 행위로 나타내셨고...”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막무가내 폭력을 행사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에 대해 “하느님의 사랑을 말과 행위로 나타낸” 예수의 저항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교훈으로 이 시대에 부활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죄의 대가로 국권을 상실하였고 말이 좋아 디아스포라지 나라 없이 수 천 년 동안 세계를 방황하며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고 빈정거리기도 한다. 이스라엘이 평화 나라의 비전(이사야 11:6-9, 2:4)을 내팽개치고 극단적 평화 파괴의 선봉장이 된 지금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에도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레위기 19:18)”는 하느님의 정언명령이 구체화 되어있다는 사실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앞서 “팔레스타인의 한 유대인인 예수”라는 신앙고백이 있었지만 예수가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사람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가 유대교로부터 탈출할 때의 대의명분은 율법주의의 탈을 벗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의 깃발을 앞세웠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는 절체절명의 구호는 신약성서의 복음서 세 책에 모두 쓰여 있다.
우연치고 기이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알게 모르게 미국의 절대적 지지와 풍성한 지원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팔레스타인 사람을 대량으로 죽이는 모습은 2천여년 전 유대인들이 로마의 비호 아래 예수를 죽였던 상황을 연상케한다.
그렇다면 유대교와 미국 기독교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는 ‘내 편인 이웃’과 ‘다른 편인 이웃’을 구별하는 논리를 개발하여 내 편인 이웃만 사랑하는 도그마를 창출한 셈이다. 예수는 결코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를 죽인 사람들》의 깃발을 나부끼며 환호하는 모습은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만일 현재의 전쟁 상황에서 이스라엘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기독교인을 예수께서 보신다면 자살골을 연신 넣은 한국교회를 보고 망연자실하실 일이다.
예수는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사랑으로 평화를 이루라고 하셨다. 광화문으로 뛰쳐나온 이 ‘수상한’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어떤 기독교인들인가? 탐욕적 종교 선동가들의 정치 놀음 춤사위에 덩실덩실 춤추며 장단을 맞추는 어리석은 행태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모두 지금도 여전히 한결같이 “평화를 꾀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다.” (잠언 12:20),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로마서 12:18) 라고 외치고 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알맹이가 홀라당 빠져버린 ‘빛바랜 기독교’를 벗어나서 생명과 평화로 속이 꽉 찬 ‘빛나는 기독교’로 복원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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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기독교인들이라면 그들이 전쟁터의 맨 앞에 서서 순교하듯이 총알을 맞고 쓰러져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 기독교는 예수를 두 번 죽이는 사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