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른 생각들로 순서도 정오(正誤)도 없다. 오호(惡好)와 시비(是非)를 논할 수는 있지만 대상은 아니다. 중복도 있으므로 고려하시면 좋겠다. 여러 차에 걸쳐 싣는다.
391.
나무에서 배운다. 나무는 인고의 상징이다. 씨에서 싹이 트고 뿌리를 내려 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평생을 그곳에서 산다. 사람이 다른 곳으로 옮겨주기 전에는 말이다. 한 곳, 한 점에서 일생을 마친다. 인간이라면 성장은커녕 불평불만만 하다가 일생을 마치겠지만, 나무는 모두를 수용하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면서 꿋꿋하게 잘 성장한다. 잎이 돋고 가지를 뻗으며 열매까지 맺어 만물을 먹여 살린다.
사람은 자신이 살기 위해 만물을 희생제물로 삼지만, 정작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누구도, 무엇도 먹여 살리지 않는다. 불공정하고 불공평하지 않은가. 동격 비교는 할 수 없겠지만, 왜 인간만 예외여야 하는지 묻고 싶다. 생명은 생자필멸(生者必滅)하고 회자정리(會者定離)한다. 죽으면 어차피 썩어 없어질 시신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더구나 오래 보존하기 위해 부패 방지까지 하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만. 화장도 하지만 자연으로 돌리지 않고 침투 불가한 통에 담아 보관한다. 가능하다면 가장 잘 썩는 헝겊이나 거적 등에 쌓아 평장(平葬)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과 지혜가 인간의 전유물인 양 살아가지만, 나무가 사는 걸 보면 경이롭다. 모르고 그러는지, 알면서도 버티는지, 어쩔 수 없기에 그리 사는지, 필자에겐 성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무는 못 하는 것도, 못 보는 것도, 모르는 것도 없는 것 같다. 나무와 소통할 수 있다면 마음을 열고, 이에 관해 얘기하고 싶다. 가지 끝 잎 하나부터 땅속 깊은 실뿌리까지.
392.
살아 있는 생명체를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있게 하는 것은, 형벌 중에서 가장 무자비한 최악의 형벌이다. 학교와 군대에서 얼차려 교육이랍시고, 한 가지 동작만 반복시키는 체벌이 있다. 한 예로 ‘앉았다 일어서기’라는 것은 단순하고 쉽게 보이지만, 엄청나게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는 한 장소에서 평생을 사는 나무에 비하면 약과 중 약과다. 새 발의 피다.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1시간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아니 10분, 1분 만이라도 시험해 보면 안다. 그 고통을. 그래서 구치소와 감옥에서도 중죄인과 반대자를 작은 독방에 홀로 있게 하리라. 하지만 살다 보면 때론 홀로 한 곳에 있을 필요도 있다. 본인이 원하고 잠깐일 경우엔 좋다. 한 동작 반복은 길어질수록 고통스럽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현장작업자도 그렇다. 삶에서 하나, 유일함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나무는 삶의 본으로 삼을만하다.
393.
나무 등 식물은 한 위치에서 평생을 보낸다. 오직 햇빛, 바람, 물, 공기만 통하면 사시사철에 따라 잎과 꽃을 피우고 열매까지 맺어 수많은 생명의 식량이 된다. 만물의 생명력과 에너지원은 식물이리라. 나무는 생•무생물을 차별과 배제 없이 필요한 만큼 고르게 준다. 햇빛, 공기, 비, 바람들도 고맙다. 만물에게 나무는 잎도 먹이요, 꽃도 먹이며, 열매는 당연, 나뭇가지도, 뿌리도, 통째로 먹거리가 된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 모두를 기꺼이 준다. 죽으면 시체라 할 수 있는 통나무와 뿌리까지도 허락한다. 이 얼마나 성스럽고 위대한가?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받들고 믿는 인간들 중에 작은 풀과 나무에 비견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근처에도 못 가리라. 풀과 나무가 진정 인간이 숭배하고 감사드려야 할 참다운 신이 아닐까?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우리 고유문화의 하나인 성황(서낭)당이 생각난다. 동네 어귀를 돌아가는 곳에 성황당과 돌무덤, 정자나무가 있었다. 마을을 드나들 때나 명절 때는 그곳에 예를 표하고 제를 지냈다. 이 중 나무는 살아 있는 생명체로 제(祭)의 대상이다.
394.
인간은 나무에서 배워야 하리라. 나무의 인덕(仁德)은 끝이 없다. 살아선 온갖 만물을 먹여 살리는 것은 물론 산채로 또는 죽어서도 인간을 위해 갖가지 살림 도구 등으로 쓰인다. 그러면서도 아무 보상과 조건도 없다. 반면에 인간은 자신의 털끝만 건드려도 심할 경우엔 상대에게 죽음으로 복수한다. 죽어서도 알량한 시신을 고이고이 간직하기 위해 부패방지제를 써서 영원히 남기를 희망하고, 다른 생명에게 자기 시신을 먹이로 내주는 것은 언감생심이요, 어불성설이다. 내주기는커녕 석관에 넣어 다른 생명이 얼씬도 못 하게 침입을 막는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못됐는가? 그러므로 인간은 만물의 천적이 되지 않겠는가? 가장 바람직한 시신 처리 방식은 잘 썩는 종이나 헝겊에 싸서 땅에 묻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해야 평생을 잘 살다 가게 해 준, 만물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395.
나무의 형상을 보면 천태만상이다. 사람의 얼굴과 지문이 같은 자가 한 사람도 없다 하듯이, 나무도 동일한 나무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아마 닮은 인간을 찾는 것보다, 닮거나 같은 형상의 나무를 찾기가 더 어려우리라. 이런 면에서 보면 나무가 사람보다 더 고등 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들이여 자만하지 말고 자연 앞에 겸손할지어다. 나무는 다른 종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종끼리라도 있는 장소와 위치한 높이에 따라, 환경에 따라 차이가 크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상생적으로 산다. 이런 나무를 어찌 따를 수 있겠는가만, 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어 나무처럼 살면 좋겠다.
고귀(高貴)한 탄생과 죽음이 있고, 비천(卑賤)한 탄생과 죽음이 있는가? 옥좌에서 나고 죽으면 귀하고, 길섶에서 나고 죽으면 천한가? 이나 저나 나고 죽은 것은 같지 않은가? 고귀할수록 비천할 수 있고, 비천할수록 고귀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들의 생각이 천박할 따름이다. 살았을 때 이웃과 나누고 어울려 살면 고귀한 탄생과 죽음이요, 그와 반대이면 비천하지 않겠는가? 나무의 삶이 인간에게 본이 되면 좋겠다.
편집 : 김태평 객원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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