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성 유족 박성태 님 댁 사연 (필명 김자현)
<유족 박성태님 (전남 보성 유족회를 발족하신 초대회장)의 사연>
부친 고 박채주님은 1949년 10월 중순에 억울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고 박채주님은 보성군 웅치면 봉산리 태생으로 전답이 많은 그 지방 유지이셨다고 합니다.
진원 박씨로 돌아가실 당시 42세, 1906년 생이십니다.
<사건의 경위>
1948년 10월 19일을 기점으로 여수와 순천을 중심으로 터무니없는 공권력에 항거했던 주민 항쟁이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던 때, 10말 경의 어느 날 봉산리 이장이 반란군들을 고 박채주님의 집으로 데려왔다는 겁니다. 부농이었던지라 다른 집들보다는 먹을 것이 풍부했으니까요. 반란군들은 다짜고짜 ‘먹을 것을 내놓고 잠자리도 제공하라! 그렇지 않으며 죽이겠다’ 고 협박을 했더랍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먹이고 재워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그해 12월 1일 진압군이 들이닥쳤습니다. 고 박채주님을 비롯한 마을 사람 수십 명은 반란군에게 협조했다는 죄목이 씌워져 일부는 현장에서 총살되고 유족 박성태님의 부친 고 박채주님을 비롯한 몇 명의 마을 사람들은 웅치서로 끌려갔습니다. 진압군은 마을에 잔당들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60여 가구가 있던 마을에 불을 질러 봉산리 삼수 마을은 형체도 없이 전소되었습니다.
진원 박씨의 집성촌이던 삼수마을에서 고 박채주님 외에 유족 박성태 회장의 일가 친인척분들 28분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으며 부친을 제외하고 가까운 일가로는 박성태님의 삼촌과 당숙들 5분이 한날한시에 웅치서에 끌려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음해 1949년부터 보성경찰서, 광주 형무소, 전주 형무소로 이송되었으나 형무소가 비좁다는 이유로 다시 군산 형무소로 이송되셨습니다. 기골이 장대하시던 박성태님의 부친 고 박채주님은 1년여가 지나는 동안 필설로 어려운 고문과 구타, 그리고 형무소에서 굶기는 바람에 군산 형무소를 나오실 때 눈은 거의 실명 상태이셨다고 합니다.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거의 죽음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군산에 살던 박성태님의 고모님에 의해 출소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미 눈도 보이지 않지만 가족도 못 알아볼 정도로 의식이 불분명한 중증이었다는 겁니다. 집에 모셔다 놓고 백방으로 의료진을 들이대도 이미 고 박채주 님의 명을 늘일 방법은 없었습니다. 출소한 1949년 10월 10일 이후 닷새가 지나 박채주 님은 한 많은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런데 공권력에 의해 현장에서 당장 처형, 사살되지 않았다면 여순 항쟁과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더구나 여순 항쟁의 주요세력, 반란군의 협박에 못 이겨 끼니와 잠자리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끌려가 굶기를 밥 먹듯 하고 터무니없이 공권력으로부터 1년 가까운 세월 갖은 고문과 타작에 의해 시체와 다름없이 출소하여 단 닷새를 못 살고 가신 분이 어째서 여순 항쟁의 희생자가 아니라고 우길 수 있는 겁니까? 지금은 정당하게 해결되었다지만 고 박채주님의 막내, 보성 유족회 박성태 전 회장님은 지역적 헤게모니를 바탕으로 한 온당치 못한 사람들로부터 유족이 아니라는 모함까지 받는 해괴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억울하지만 정말 당장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오히려 고통이 덜하다 할 것입니다. 결국은 죽일 것이면서 갖은 방법의 고문을 당하다 결국은 살아오지 못할 길로 가고 말았는데, 이를 뻔히 알면서 이를 두고 여순 항쟁과 무관하다느니 거짓 유족행세를 한다느니 했다는 것은 듣는 이로 하여금 누구든 공분을 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고 아니면 명예 훼손과 같은 무거운 죄를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감히 분노가 오락가락 한다 하겠습니다.
이 무자비한 공권력에 마을이 다 전소되는 바람에 어려서는 집도 절도 없었으며 대부분 빼앗기고 남은 전답을 팔아가며 5남매를 키우느라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합니다. 더구나 연좌제에 걸려 형제들의 운신은 늘 어려웠습니다. 또한 박성태 님의 형님은 5.18 희생자로 망월동 묘역에 묻히는 바람에, 한학에 능통하셨다는 고 박채주님의 가계는 또 한 번의 큰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무엇이 이 유복했던 가계를 태풍이란 작살로 휘몰아치는 것일까요. 이유도 없이 빼앗긴 목숨,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인생, 연좌제로 평생 음지에서 전전해야 했던 유족들, 대체 이유가 무엇입니까. 75년이 지나도록 돌아가신 부친의 죄명을 알 수도 없고, 씻을 길 없던 부친의 죄명은 무엇입니까.
미국 제국주의 야망을 신봉하기 위해 그 손발이 된 역사의 역적, 이승만 앞잡이의 탄탄한 정권을 만들어 주기 위해 그 수많은, 그 시퍼런 청춘을 말살한 역사가 아직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나 유족 박성태 님은 80이 가깝습니다. 어쩔건가요. 돌아가신 분의 피맺힌 한, 어원을 알지도 못하는 빨갱이라는 죄목! 그간 버텨온 남은 자들의 고통과 기억을 어쩔 겁니까?? 당국은 말하라! 공권력은 답변하라! 하루속히 사죄하고 무엇으로 상쇄할 수 있으리요마는 그러나 배 보상으로라도 남은 분들 한의 만분의 일이라도 씻는 데 당국은 주력하라!
1949년 10월 10일도 날이 밝았다
군산 형무소
큰 소리 내며 철문이 아가리를 벌렸다
억울한 자 대한민국 생목숨 또 하나 집어삼키려고
지옥문이 열렸더냐 아니면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았더냐
한번 삼키면 절대 돌아오지 못한다는 감옥에서
닷새 앞두고 나온 자
내 아버지 박채주이었던 것을 누가 알았더냐
파도를 가르며
갈매기 우는 군산 앞바다를
죽기 전 두 눈에 그려 넣으라고
크나큰 철문이 아가리를 맘껏 열고 박채주를 내보냈더냐
그러나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잡힐 듯 말 듯 사무쳐오던 고향의 소리도
오 남매 살 냄새도 보이지 않았다
형무소에서 출소하는 박채주
1년 만이었다
군산 앞바다에서 달려온 햇살
꾹 감긴 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애고 애고 애고
마흔두 살의 우리 올케가 자지러지네
언놈이여-
그 잘난 몸이 피골이 상접허여 가죽만 남었네
짓무른 눈에서는 눈물도 말라붙었구나
아모 것도 안 보이는 갑다
아모 소리도 안 들리는 갑다
당신 각시가 왔소
이승에 하나뿐인 당신 각시가 왔소
매일 밤 뜬눈으로 새우던 당신 각시도 안 보이는 갑다
눈 좀 떠보시오
입을 달싹여 말이라도 쪼께 해보소
박채주 내 서방
기골이 장대한 내 서방
웅치면에서 젤루 잘난 남정네는 어디 가고
뼈 부러지고 살이 터져
말라붙은 박채주를 군산 형무소가 입을 쩍 벌리고 뱉어버리네
누구요 온 천지를
돌아 댕기며 나누고 도와주던 씩씩한 자유를
떡메로 치던 놈들아
그른 것을 그르다 허고 바른 것은 바르다 헌
정의로운 음성에 칼을 박던 놈들아
마을 당산나무에 걸려있던 실천
헌신과 사랑을 마을 두엄더미에 쳐넣고
남해
찬란한 햇살에 캄캄한 암흑 커튼이 너울거리니 속 시원하더냐
이것이 너희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냐 이것이
미군정과 이승만 얘기하는
남한만이라도 잘사는 나라이더냐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이제야
사람답게 사는 세상 오는 줄 알았더니
게다짝을 거꾸로 신은 일본놈과
일제 앞잡이와 미 군정 커튼 뒤에서 고스톱을 짜고 치더니
무자비한 우리 민족 학살이라
하늘이 무심치 않으리라 반드시 응징의 날은 돌아오리니
인과응보요 사필귀정이라
지금 태평양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을
죽기 전에 반드시 보고 말리라
*. 축 늘어진 시체 같은 사람, 목숨만 붙어있는 박채주를 들것에 실어
군산서 전라선을 타고 보성으로 돌아왔지.
그는 다리를 펴지 못하고 돌아온 지 닷새가 되는 날
아픈 것을 모르는 영원한 나라로 떠나갔다.
관을 짜왔으나 접힌 다리가 펴지지 않아 관뚜껑을 닫을 수 없었다.
관뚜껑 위에 맷돌을 올려 놓아
뚜껑이 닫히고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고 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위원회의 구성원은 뉴라이트 인사들로 채워지는 등 배 보상이라도 받아 억울함을 덜 수 있을까 기대하던 유족들의 진상 규명에 안개가 더욱 짙어지고 있을 때 미치광이 정권에서 계엄을 선포하여 오늘을 맞고 있다.
그러나 천시가 다가오고 있다. 지금은 인과응보와 사필귀정의 시간! 지금은 미국도 한반도에서 떠나갈 시간! 일제 36년이 끝났을 때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잠깐 수정한 미국이 한반도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까지 이어지는 모든 한반도의 구도는 1947년에 거의 완성된 미 수뇌부 핵심의 전략과 전술이었던 것을 우리가 당시 어찌 알았으리요. 지금은 미국도 한반도에서 떠나갈 시간이다. 거듭 말하건대 좋은 말할 때 떠나가야 한다.
그들과 궤를 같이해 온 무리들, 100년을 거듭한 토착 왜구와 그 앞잡이들과 미제와 사대 종미자들과 그들을 몰아낸다고 설치던 거머리들이 모두 사라질 때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지금 사면초가이다. 차마 끝까지 몰아붙이지 못했던 100년의 오류가 우리의 머리로 떨어지고 있다. 지금은 한치도 물러 설 때가 아니다. 두 번 다시 여순 항쟁이 두 번 다시 4.3항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끝까지 몰아붙여야 한다. 그랬다면 5.18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5.18에 몰아붙였다면 세월호도 이태원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사진은 유족 박성태 선생으로부터 제공 받았습니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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