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대안」 사건은 한국 교육 문제의 뿌리이자 시작
2. 「국대안」 사건에 대한 세 가지 시각
오천석의 「국대안」 발상은 그동안 「국대안」 사건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시각을 대변해 왔다. 1946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대학교인 국립 서울대학교의 창설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 고등교육계가 직면한 시급한 문제를 「국대안」을 통해 해결하면서 부족한 인적 자원과 시설을 최대한 그리고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향후 대한민국 국가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긍정적 시각이다.
실제로 「국대안」 반대운동을 반대하는 데 앞장섰던 초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이자 3대 서울대학교 총장에 취임한 장리욱 교수의 회고를 살펴보자. 장리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초대 서울대학교 총장에 임명된 미 육군대위이자 종군 목사 해리 앤스테드(H. B. Ansted)를 긍정적으로 술회하였다. 「국대안」 파동으로 맹휴 등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총장으로 재직한 9개월 동안 서울대를 명실 공히 종합대학교로서 면모를 갖추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1946년 9월 「국대안」 1차 파동 당시 좌익 학생들이 등록 장소에서 온갖 위협과 방해를 하였다. 그러자 당시 미군정청 문교부장 피텐져 대령이 군복을 입고 큰 권총을 허리춤에 찬 채 등록 현장에 나타나 저돌적인 무력시위로 좌익의 방해공작을 차단했다1)고 일견 긍정적으로 술회하였다. 장리욱 스스로 우익교수와 학생들의 허약한 대응에 대해 저항의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회고한다. 그러면서 우익학생들의 척수 속에는 피텐져 대령의 비아냥처럼 진흙이 들어 있을까 팥죽이 들어 있을까2)를 읇조리며 탄식과 함께 질책을 한다.
특히 1946년 7월 「국대안」 1차 파동 때와 다르게 좌우 이념 대결이 첨예하게 펼쳐지던 「국대안」 2차 파동을 전후한 1947년 2월에서 9월에 불순한(?) 좌익 세력에 맞서 싸우며 「국대안」을 관철시킨 노력을 업적 내지 공로로 평가하는 시각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시각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것으로 그동안 「국대안」 사건과 「국대안 반대운동」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거나 역사 사실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를 방해해 왔음은 물론이다.
나아가 해방 직후 ‘한국교육위원회’ 조직과 ‘조선교육심의회’ 활동 등 「국대안」의 중심인물인 오천석의 교육활동 일체를 한국현대교육사에서 ‘빛나는 업적’ 내지 ‘청사에 빛날 민주교육행정의 구현자’3)로 극찬하였던 견해와 상통한다. 또한 ‘87년 온 생애를 민주주의 성숙을 위해 새로운 씨앗을 뿌린’ 4)인물로 평가하는 등 매우 일면적이고 고정된 시각에 머물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국대안」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시각은 1980년대 한국사회에 풍미한 제3세계 종속이론의 영향과 1984년 정치적 유화국면을 전후해 수정주의 시각5)의 대두로 통렬한 비판을 받는다. 80년대 「국대안」 사건에 대한 연구 경향인 수정주의 시각은 반공주의 관점이 안고 있는 편협함을 지양하고 전통적인 시각이 내포하고 있는 이론적 가벼움을 극복해 내면서 지배적인 담론이 되어 왔다.
「국대안」에 대한 수정주의 시각은 갈등론 내지 종속이론, 또는 신식민지 문화제국주의 이론에 입각해서 미군정의 성격 내지 미군정기 교육정책의 특성, 그리고 교육주도세력의 성격에 주목하였다. 특히 대소 반공기지로서 한반도의 역할 내지 「국대안」을 주도했던 오천석 등 교육주도세력의 교육엘리트적 특성을 분석함으로써 좀 더 학문적 객관성을 견지하고자 하였다. 대체로 1970년대까지 발표된 학위논문들은 미군정의 교육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반면, 1980년대 논문들은 미군정기 교육을 좀 더 객관적이고 근원적으로 조망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분석하였다.6)
수정주의 시각은 「국대안 반대운동」의 논거에 비중을 두고 수행된 연구 성과물들이다. 다시 말하면 전통적인 시각에서 「국대안」 반대운동 = 좌익의 저항 = ‘빨갱이’ 논리라는 반공주의 시각을 벗어나서 「국대안」 반대운동의 논거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진행된 것이다. 특히 미군정의 대한반도 정책의 정치사회적 의미와 미군정기 교육정책의 특징, 그리고 교육주도세력의 사회역사적 출신 성향을 분석하면서 「국대안 반대운동」의 주요 논거를 비중 있게 분석하였다.7)
80년대 수정주의 시각에 기초하여 「국대안」 사건을 이론적으로 잘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분석한 학자는 이길상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이다. 1996년 2월 9-11일 도쿄에서 열린 제9차 한일 합동학술회의에서 발표된 이길상 교수의 「미군정하에서의 진보적 민주주의 교육운동」이 대표적인 논문이다.
「국대안」 사건을 바라보는 세 번째 시각은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을 ‘김일성 종합대학교 설립안’(「종대안」)과 연계시켜 분석함으로써 민족 사회 지식인 내부의 분열, 대학의 분단, 바로 분단고등교육체제의 형성이라는 관점이다. 해방 직후 가장 먼저 조직된 조선학술원8)이 내건 ‘학술계의 대동단결’ 정신이 「국대안」 사건을 거치면서 민족 최고 지성의 분열로 훼손되었다는 관점이다.
「국대안」 반대 투쟁에 앞장섰던 서울대 교수들 가운데 학문적 역량과 탁월한 업적을 남긴 학자들이 대거 김일성 종합대학 교수로 초빙된 사실을 그 논거로 제시한다.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국대안」과 「종대안」을 통해 남과 북에 각각 ‘최고학부’(서울대) 와 ‘최고의 전당’(김일성대)으로 분열된 지식인 사회를 초래했다는 뼈아픈 성찰적 비판9)이다. 특히 남쪽 사회의 경우 이승기(화공학), 도상록(양자물리학), 한인석(물리학) 교수 등 과학기술계 고급인재들 가운데 절반이 북으로 감으로써 민족 지성이 남과 북으로 양분된 현상은 「국대안」 사건이 초래한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분단고등교육체제의 형성과 민족 지성의 분열이라는 시각에서 「국대안」과 「종대안」을 분석한 「국대안」 사건 연구의 권위자 김기석 교수에 따르면 북으로 초빙되거나 월북한 교수들 가운데 공통점이 발견된다고 분석했다. 첫째 북을 선택한 그들은 각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고 둘째 국내외 제국대학 출신들로서 독특한 학연으로 맺어졌으며 진보적인 정당 가입과 함께 「국대안 반대운동」의 중심 역할10)을 수행한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다음 편에 계속)
1) 장리욱(1975),「국립 서울대학안 분규」,『나의 회고록』샘터, 232-236쪽
2) 장리욱(1969),「소위‘국대안 사건’의 전말」『월간 중앙』17호. 1969년 8월호, 중앙일보사, 136쪽.
3) 이근엽(1992),「존 듀이의 교육철학과 오천석의 교육사상」,『민주교육』제2호, 천원기념회, 40쪽 ; 김종철(1998),「우리나라 교육에 미친 천원의 영향」『민주교육』제8호,천원기념회, 49쪽.
4) 김선양(1996),「천원 오천석의 교육사상」,『한국교육사학』제18집, 한국교육학회 교육사연구회 275쪽
5)「국대안」사건을 북쪽의 같은 시기‘김일성 종합대학안’, 즉「종대안」과 함께 분단교육의 시각에서 연구했던 김기석 교수는 80년대 「국대안」석사 논문들을 소위‘수정주의’시각으로 통칭하였다.
6) 홍웅선(1991),「미군정기 교육에 관한 연구 2」,『교육개발』제13권, 제3호(통권 72호), 10쪽.
7) 수정주의 시각의 학위논문으로는 이숙경(1983),「미군정기 민주화의 성격과 민주주의 교육이념의 한계」,이대 석사 ; 한성진(1986),「미군정기 한국 교육엘리트에 관한 연구」연세대 석사 ; 최혜월(1986),「국대안 반대운동의 이념적 성격에 관한 교육사회학적 접근」연세대 석사 ; 이희수(1986),「미군정기 국립서울대학교 설립과정에 관한 교육사회학적 분석」,중앙대 석사 ; 김태미(1987),「미군정기 한국 고등교육개혁에 관한 고찰」이대 석사 ; 김경숙(1989),「미군정기 교육운동 : 1945-1948」, 서울대 석사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8) 해방 직후 조선의 교육자들은 일제 식민잔재 청산을 당면과제로 삼고 독립 후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희망과 함께 조선교육의 앞날을 구상하며 교육자단체 조직에 돌입한다. 가장 먼저 조직된 교육자 단체는 고등교육을 담당했던 지식인 집단으로 1945년 8월 16일 출범한 '조선학술원'이다. 조선학술원은 '학술계의 대동단결'의 정신 아래 좌우 지식인 사회를 망라한 조직이었다. 초대 조선학술원 원장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백남운이다.
9) 김기석(2008),『한국 고등교육연구』교육과학사, 132-133쪽
민족 지성의 분열과 분단고등교육체제의 형성이라는 시각을 최초로 주장한 학자는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김기석 교수이다. 관련 논문은 김기석(1996),「해방후 분단국가 교육체제형성 1945-1948 : 국립서울대학교와 김일성 종합대학의 등장을 중심으로」『師大論叢』53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10) 김기석(2008), 위의 책,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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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도 훌륭한 학자가 많은데, 특히 유교학자들은 중국 못지않은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