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대안」 사건은 한국 교육 문제의 뿌리이자 시작
「국대안」 사건(1946-1947)을 바라보는 몇 가지 관점에도 불구하고 「국대안」 추진 과정에서 미군정과 오천석은 확고한 정책 파트너였다. 서울대 「국대안」 반대운동이 부산대 「국대안」 등과 맞물리면서 전국적으로 400여 개 학교가 맹휴에 돌입하는 등 「국대안」 반대운동(1946~1947)이 전국 중등학교로까지 확산하고 반대 투쟁 또한 치열해졌다.
그러자 오천석의 회고에서 나오듯이 사회 질서 유지의 책임을 안고 있던 미군정 당국은 한 때 「국대안」을 다소 양보하는 수준에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였다.1) 그러나 미군정 당국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음에도 「국대안」을 밀어붙인 것은 「국대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득 때문이었다. 이사회 설치 조항이나 교수 재임용 조항은 대학 통제를 강화할 수 있는 확실한 방안이었다. 더구나 「국대안」 관철 과정에서 사표를 자신의 호주머니에 지니고 다녔을 정도로 선두에서 교육개혁을 자처한 오천석은 미군정 당국의 정치적 부담을 상당 부분 덜어주었음에 틀림없다.2)
미군정기 교육 정책은 전후 국제 정치질서 속에서 형성된 미국의 대한반도 외교정책의 흐름을 통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후 미국의 대한반도 외교정책은 한반도를 대소 반공 기지로 안착시킴으로써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세계 경제 질서 속에 편입시키는 데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양보할 수 없는 것으로 2차 대전 말기 소련군의 참전과 남하 속도를 의식해 시급히 38도선이 그어진 배경도 그런 연유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은 좌익 세력인 ‘전평’(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의 약칭)의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 항쟁 등 남조선 내 노동운동, 사회운동을 적극적으로 탄압하였다. 또한 김구, 이승만 등 우익세력의 반탁운동과 미국 군사력의 한계에 조응하여 적어도 한반도 남쪽에서 반공 국가를 세우려는 목적으로 분단고정화 정책을 수행하였다.3) 따라서 한반도는 전후 미소의 패권이 충돌하는 최전선이자 거꾸로 미소 강대국의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최전선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1946년 미소 냉전 질서가 확연히 표면화하면서 한반도 내 정치 지형을 일순간 재편시킨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미소 냉전과 이념 구도가 명확해지는 계기인 신탁통치 파동은 해방 직후 형성된 민족 세력(독립운동 세력) 대 반민족 세력(친일 세력)의 대결 구도의 틀을 강제로 탈각시켜 좌우 이념 대결로 빠르게 재편, 고착시킨 것이다. 구 식민지에서 해방된 제3세계 신생 국가의 종속적 특성이 한반도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된 탓이다.
따라서 미군정기 정책 기조는 한반도를 초강대국 미국이 구상하는 동아시아 대소 반공 기지로 안착시키고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체제 속에 수직적으로 편입시키는 (분단)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교육 정책 기조 역시 냉전체제 아래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 경제 질서에 한국 국민을 자연스럽게 편입시키고 분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단) 교육 정책을 유지했다.4) 전후 미군정은 한국인들의 교육 기회 확대와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려는 조치는 거의 없이 미국이 직면한 이념전쟁(ideological battle)에 교육을 이념 도구로 활용5)하고자 하였을 뿐이다.
실제로 미국은 인종적·문화적 우월주의를 기초로 학교 교육이나 언론 등 이념적 도구들을 동원하여 미국의 패권적 침략 정책을 합리화하고 약소민족의 반발을 무마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6) 따라서 해방 직후 통일된 독립 정부 수립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망이나 식민지 잔재 청산의 역사적 과제는 미군정의 관심 사항이 전혀 아니었다.7) 그런 연유로 미군정기 교육 정책은 일제 교육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적인 통일 정부 건설에 필요한 민족 민주교육의 성격과는 대단히 거리가 멀었다. 식민지 교육 청산과 자주적인 민족 민주교육 정립이라는 시대적 대의보다 현상 유지를 우선시했던 미군정은 국가이익8)을 관철하는 이념적 도구로서 교육을 규정한 채 (분단) 교육모순을 심화시켰다.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이라는 외피를 쓰고 진행된 미군정기 교육 정책의 특징은 아동중심교육으로 표방된 듀이(J. Dewey)의 진보주의 교육 정책이다.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교육을 혁신하는 것이다. 전통적 교육의 목적은 지식의 전달에 있었고 교재는 서적이었으며 교육 방법은 주입식이었다.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은 그러한 전통적 교육에 대한 반발이자 혁신을 추구하였다.9)
당시 미군정기 교육 정책집행의 핵심 인물이었던 오천석은 콜롬비아 대학 시절 듀이의 제자이자 동료 킬 패트릭(W. Kilpatrick)의 지도를 받았다. 미군정 당국은 ‘새교육연구회’(1946. 9. 12)를 학무국 산하에 설치하고 미국교육의 영향을 적극 수용하는 분위기를 형성해 나갔다.10) 오천석의 ‘새교육’ 운동은 바로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을 학교 현장에 뿌리내리려는 정책적 시도이자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 교육의 한국화 작업이었다. 그러나 미군정기 교육 관료로서 오천석의 진보주의 교육 정책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였지만, 학교 현장에 착근시키는 데엔 실패했다. 이 점은 오천석도 스스로 인정했다.
다만 오천석은 ‘새교육’을 곧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과 동일시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항변한다. 오천석은 ‘새교육’을 식민지 시절 구교육, 즉 학교 현장에 일본적 잔재와 전통을 일소하고 미국식 민주교육을 뿌리내리는 포괄적 상위 개념으로 역설한다. ‘새교육’을 일본적인 것을 배제하고 그 잔재를 일소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며 새 국가 건설의 원리로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며 민주주의 교육을 역설한다.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은 ‘새교육’, 바로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구현하는 하나의 교육방식일 뿐이다.
요컨대 오천석의 ‘새교육’은 민주주의 교육, 바로 미군정의 문교 시책11)인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가리킨다. 오천석은 오늘날 서양이 동양에 앞서 문명의 선두를 달리는 것은 바로 자유사상 때문이라고 강조하였다. 자유사상과 함께 평등사상을 민주주의의 2대 속성으로 역설한다. 그러면서 오천석은 민주주의 교육에서 ‘무식과 민주주의는 동거할 수 없다’며 적어도 중등 정도의 교육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기회12)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군정기 교육 정책 기조, 즉 문교 시책인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오천석은 ‘새교육’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런 점에서 오천석의 ‘새교육’은 낡은 유교 이념을 거부하는 반(反)봉건주의, 반(反)식민주의 외에 반(反)공산주의, 즉 반봉건(反封建), 반제(反帝), 반공(反共)을 그 주된 명제로 규정할 수 있다.13)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소 패권의 대리전 양상을 띠는 좌우 이념의 대결이라는 냉혹한 한반도 정세 속에서 전통적 낡은 질서의 청산과 식민지 잔재를 일소하고자 한 오천석의 의도는 약화할 수밖에 없었다.
오천석을 제외한 미군정기 교육엘리트의 상당수가 친일 부역의 혐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이 낡은 잔재를 청산하려는 오천석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 실천성의 정도를 상당히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군정기 교육 정책은 ‘새교육’의 이름으로 학교 현장에 적용될 땐 반공 이데올로기만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한 채 학교 생활화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 점은 미군정기 교육 정책을 핵심적으로 주도하고 관철시켰던 미군정 교육 관료 오천석의 한계이자 미군정기 교육 정책의 특징이기도 하다.
미군정기 교육주도세력, 즉 조선인 교육엘리트의 특징은 유학파(특히 재미유학파) 등 높은 학력, 오천석, 백낙준, 현상윤, 황신덕, 백남훈, 박종홍, 고병간 등 일제하 타지역에 비해 높은 비율의 고등교육을 받은 관서 출신 기독교인14), 반공주의자, 지주 등 중산층 이상의 출신 성분, 보수 정치세력인 한국민주당원(이하 한민당), 흥사단원15), 친일부역 혐의자를 그 주된 내용으로 한다.16)
한 마디로 미국문화를 이해하고 한반도에 이식할 수 있는 친미세력이 미군정의 교육엘리트로 충원되었고 이들이 김성수 등 토착적 보수 세력과 밀착되어 있었다.17)
이러한 점은 미군정청 각부·처장, 차장 가운데 기독교, 반공 이념과 관련이 깊은 이북 출신이 전체의 39%를 차지한다는 점18), 그리고 평안도 출신이 전체 34명 중 10명(30%)에 이를 정도로 미군정기 중앙 행정 관료의 성격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해방 직후 조선인 교수(교사), 학생, 졸업생들은 자치회를 만들어 일본인이 관리하던 학교시설을 스스로 밤새워 지키고 관리하였다. 그런데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교수(교사), 학생, 졸업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만든 기존 자치 기구를 무력화시킨 것은 미군정기 교육엘리트의 사회적 성격, 즉 기독교, 반공, 보수적 색깔과 관련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미군정기 교육주도세력은 ‘한국교육위원회’를 통해 각급 학교 교장, 각도 학무국 관료들을 임명하는 등 대학뿐만 아니라 중등교육에서도 자생적인 학교자치회와 빈번히 충돌19)하였다, 그리하여 해방 후 자생적인 교육개혁세력을 제거하며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들의 교육기득권을 하나씩 장악해 나갔다. 미군정당국은 ‘한국교육위원회’의 친일파 구성 등 친일 논란에 순간 당황하였지만 친일파는 없다고 공언20)함으로써 좌우를 망라한 ‘조선학술원’과 좌파 성향의 ‘조선교육자협회’, 그리고 민족주의 성향의 ‘조선교육연구회’ 등 여타 교육주도세력을 묵살,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
(다음 편에 계속)
<참고문헌>
1. 오천석(1974), 『老兵의 오솔길』, 대한교육연합회, 132-133쪽
2. 최광만(1990), 「국대안 관철에 관한 재고」, 『교육사학연구』 제2·3집, 서울대 교육사학회, 180쪽
3. 역사문제연구소(1989), 『해방 3년사 연구입문』, 서울:까치, 60쪽.
4. 이규환(1986), 「한국의 교육문제」, 『제3세계와 한국의 사회학』 돌베개. 261쪽
5. 이길상(2007), 『20세기 한국교육사 - 민족, 외세, 그리고 교육』, 서울:집문당, 177쪽.
6. 이길상(1992), 『해방 전후사 자료집Ⅰ- 미군정 교육정책』, 원주문화사, 7-8쪽.
7. 이덕호(2001), 『친미 사대주의 교육의 전개과정』 서울: 다움, 28쪽.
8. 김정인(2009), 「미군정기 대학 정책과 사립대학의 설립과정」, 『교육연구』 제27권 제2호, 53쪽.
9. 오천석(1958), 「진보주의적 교육운동」 『思潮 1』 서울:思潮社, 200쪽.
10. 이종각 외(1990), 「한·미관계의 재조명」, 『분단시대의 학교교육 2』 서울 : 푸른나무 235쪽.
11. 오천석(1974), 위의 책, 135-139쪽.
12. 오천석(1981), 「민주주의의 현대적 이해와 교육에의 도전」, 『학술원 논문집』 제20집, 19-23쪽.
13. 우용제(2001), 「천원의 민주교육사상의 외연과 그 성격」 『한국교육사학』 23권 제2호, 219-220쪽.
14. 한성진(1986), 「미군정기 한국 교육엘리트에 관한 연구」 연세대 석사, 66-70쪽 ; 김상태(2002), 『근 현대 평안도 출신 사회지도층 연구』, 서울대 박사, 50-53쪽.
15. 장규식(2011), 「미군정하 흥사단계열 지식인의 냉전인식과 국가건설 구상」, 『한국사상사학』 제38집, 250-253쪽.
16. 오욱환, 최정실(1993), 『미군 점령시대의 한국교육 - 사실과 해석』, 지식산업사, 152쪽.
이숙경(1983), 「미군정기 민주화의 성격과 민주주의 교육이념의 한계」, 이대 석사, 47-55쪽
최혜월(1986), 「국대안 반대운동의 이념적 성격에 관한 교육사회학적 접근」 연세대 석사, 17-18쪽
현은주(1996), 「미군정기의 한국교육에 대하여」 『白山學報』 46. 421-450쪽.
이희수(1986), 「미군정기 국립서울대학교 설립과정에 관한 교육사회학적 분석」, 중앙대 석사 49쪽
한성진(1986), 「미군정기 한국 교육엘리트에 관한 연구」 연세대 석사, 34-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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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김영모(1982), 『한국지배층 연구』, 서울:일조각, 140쪽.
18. 김수자(1994), 『미군정기 통치기구와 관료임용정책』 이대 석사 논문, 51쪽.
19. 이길상(1996), 「미군정하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교육운동」, 『한·일의 근대교육 도입과 개혁』 26쪽.
20. 한준상, 김성학(1990), 『현대 한국교육의 인식』 서울: 청아, 104-105쪽.
이 글은 2016년 <진보평론> 가을호에 발표한 내용임을 밝힙니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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