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를 향한 K-민주주의의 역사적 대장정,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
인간이 추구하는 지고지순한 수많은 가치 중에서 자유는 빼놓을 수 없는 메뉴라 할 수 있다. 인종과 국가, 신분의 고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자유를 향한 다양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자유를 한마디로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기는 복합성과 모호성 때문에 지극히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일생 중에서 언제부터 자유를 인식하는지도 흥미롭다. 글쓴이에게는 어느 때 기억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자유하면 떠 오르는 말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상당히 극단적인 느낌을 주는 표현이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직전(1775.4.23.)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 의원이었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의 의회 연설의 마지막 구절이라고 전해지는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라는 언표는 다분히 보통 사람의 감각을 자극할 만하다. 그래서 대영제국에 저항하며 독립운동에 애썼던 패트릭 헨리에게는 ‘애국자’(patriot)라는 이름표가 늘 함께 따라다닌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사회 곳곳에 자유의 이상을 드높이는 분위기가 널리 펼쳐져 있다. 글쓴이가 봉직했던 대구대학교의 건학이념은 《사랑•빛•자유》이며 이화여자고등학교의 교훈은 《자유•사랑•평화》이다. 또 연세대학교의 건학정신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32)라는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진리와 자유》을 내세운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나라 헌법의 상징적 보루라 할 수 있는 대법원의 건물에도 《자유•평등•정의》를 돌판에 새겨서 온 국민이 자유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주의를 독려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온통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자유를 피부로 느끼고 가슴으로 간직하도록 교육을 받고 또 일상에서 자유의지를 지탱하는 분위기에 살고 있는 셈이어서 다행이기도 하고 또 바람직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 소중한 《자유》는 일반적으로 민주주의라고 하는 정치제도에 의해 확보되고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어야 자유가 보장된다는 지극히 단순한 명제는 생각하기에 따라 논의의 여지조차 필요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너무 복잡하여 어쩌면 끝없는 논쟁의 연속일 수밖에 없어 불가지론에 휩싸일 수도 있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획득하여 정립하는 과정의 연속이었고 그 자유는 끊임없이 지켜내야 할 무거운 과제와 동행하여 왔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유를 남용하려는 세력과 자유를 지키고 증진하려는 세력 사이에 다툼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흔히 민주주의 제도의 근원이 서구사회만의 산물로 얼핏 인식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서도 민주주의의 성립과 발전의 발자취를 다수 발견할 수 있어 만만치 않은 자긍심을 느끼게 된다. 《자유•평등•우애》(Liberté•Égalité•Fraternité)의 가치 실현을 겨냥했던 프랑스 대혁명에 못지않게 3•1 혁명(1919)은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면서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을 천명하였다. 구호에만 그치지 않고 곧바로 이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국 상하이에 수립하고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여 왕조적 질서를 넘어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시작하였다. 민족의 한이 서린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에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독립운동을 바탕으로 ‘국가의 자유’를 향한 처절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개인과 국가의 자유를 동시에 추구하는 이중의 무거움을 인내하면서 1945년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과 함께 온 분단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민주주의의 제도화 작업에 신속하게 매진해야 할 시간에 온 나라가 영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해야 한다는 맥아더 포고령과 함께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이 설치되고 미군정이 실시되어 아깝게 시간을 허비한 것은 또 한 가지 역사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일제 강점-미군정의 연결고리는 미국과 일본이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국가적 손실을 남겼다. 그리고 3년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정부가 비로소 가동되었다. 미군정 하에서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며 통일된 조국에 대한 비전을 내팽개쳤던 이승만은 아마도 최고령 제헌 국회의원의 대접을 톡톡히 받아 초대 대통령의 영화를 누린 것이다.
그러나 당시로서 전형적 민주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했던 이승만이 해방 초창기 한국 민주주의 초석을 놓는 과정에서 보여준 정치적 행태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해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의 정치 행위의 모든 초점은 자신의 권력 획득과 유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1952년 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로는 당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임시수도 부산에서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을 통과시키는 소위 부산정치파동을 거처 2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 폐지를 골자로 하는 1954년 2차 헌법을 개정하였는데 모자란 표수를 채우기 위해 사사오입(四捨五入) 반올림의 해괴망측한 수학 논리를 적용하였다. 그리고 3대 대통령이 되었다.
두 번의 헌법 개정의 목적이 모두 자신의 권력 유지와 영구집권을 위한 것이기에 그의 정치적 인품은 바닥이 드러나 삼척동자도 다 알아볼 수 있게 되었고 국민의 신망을 상실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1960년 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상대 후보인 조병옥의 예상치 못한 사망으로 인해 당선이 미리 결정되었으나 부통령 선거의 부정으로 인해 4.19 학생혁명을 맞이하였고 12년에 걸친 대통령 노릇의 끝을 맺으며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탄핵으로 마감한 것에 이어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호명되는 두 번의 불미스러운 끝마무리로 치욕을 겪었으니 개인의 불명예를 떠나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오점을 남겼고 결국 온 국민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준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마산 3•15와 4•11 의거, 4•18 고대 의거 및 피습, 4•19 학생혁명, 4•25 교수단 시위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그렇게 4월 혁명은 완성되었다. 학생을 포함하여 시민의 평화적 저항에 대한 국가폭력의 작동 양상은 주권자로 하여금 민주주의 발전의 험난한 경로를 경험케 하였다. 그래서 불의한 독재 권력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일깨우고 지켜낸 4월 혁명은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기폭제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민주주의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설정한 희망이 되었으며 독재에 저항하여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면역력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뒤이어서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쿠데타)으로 정권을 탈취하고 역시 영구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체제를 선포(1972)하므로 민주주의 헌정질서가 파괴되었고 결국 부마항쟁 등의 저항을 거쳐 1979년 10•26 사태로 또 한 번의 독재 권력에 대한 민주주의 저항을 통해 민주주의의 험난한 길을 맛보았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전두환의 12•12 쿠데타에 의해 민주주의 행진이 또 한 번 뒤집기를 당했고 신군부의 책동을 저지하기 위한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최고 수준의 저항권을 행사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1987년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에 대한 민중의 줄기찬 열망으로 6•29 민주화 선언을 받아 내어 새로운 민주화 시대를 열었다. 마침내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을 탄생시킴으로 한국의 시민은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의 새로운 전통을 세웠다.
3•1 혁명, 4•19 학생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 역사의 고비마다 민주주의 파괴 세력의 시도에 저항하여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지켜낸 자랑스러운 전통이 쌓였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제도는 위기와 극복으로 점철된 피맺힌 역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지구상에서 나름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된 나라로 세계인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근자에 이상한 현상의 한 가지는 소위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의 남용과 오용이다. 물론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은 자유의 실현이다. 그러나 어원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는 충분히 자유 지향적이다. 민주주의만으로 안심되지 않아 자유민주주의 용어 내지 개념을 사용한 것은 아마도 냉전 시대의 산물일 것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사람들이 별로 민주적이지도 않고 또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는 기막힌 사실이다. 오히려 기득권층이나 일부 카르텔의 자유만을 염두에 두는 비민주적 개념으로 활용하고 있다. 어쨌든 민주주의의 주체는 시민이어야 한다. 홍익인간의 건국 이념의 전통을 가진 우리는 민주주의보다 더 깊은 의미의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추구하였다. 민주주의는 이념에만 머무를 수 없고 시민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어야 제대로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념적 가치로만 생각하여 자유민주주의에 경도된 편향적 확신범의 뜬금없는 비상계엄 선포는 민주주의를 애써 만들어 가꾸고 사랑하는 지구촌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단어가 멋있어 보여 한번 써보고 싶다는 심리에 빠지면 문법의 오류에 오염되기 십상이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갈고닦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웃사촌들의 우정에 찬 평가는 K-민주주의의 회복력에 경탄하면서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하루아침의 웃음거리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역전하여 “회복의 묘수가 보인다고? 그거 칭찬이지?”하고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종료된 것은 아니다. 어리숙한 굳은 신념의 반격이 만만치 않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또다시 상처 난 K-민주주의를 치유하면서 또 다른 미래를 향해 새살 돋우기 작업이 필요해졌다.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또 무엇인가? 우리는 그거 다 해봤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 4월 혁명, 5.18 민주화 혁명, 6월항쟁의 영령 앞에서 새삼 옷깃을 여민다. 그리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촛불혁명, 광화문 광장, 국회 앞에서 남태령, 헌법재판소까지 새로운 응원봉의 섬광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아니 해야 한다. 주권자의 자유와 주권 국가의 자유가 모두 보장되는 그날까지 한 시도 멈추지 말고 맑은 생각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편집: 양재섭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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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살의 원흉들이 민주 정의를 간판(민정당)으로 내거는 파렴치한 반민주 집단,
이제는 해체 매장의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