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이 온다>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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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말한 것을 화두로 삼아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것습니다.

나는 한강을 신화파괴자로서 한국 고유의 유명론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일차적인 평을 놓았습니다. 여기,‘신화파괴자myth-breaker’라는 것은 탈신화적인, 그러니까 하나의 저항적인resistant 것으로서의 그의 작품이 지닌 진실에 대한 철학적 옹호의 성격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그의 작품이 거짓 신화에 대한 남다른 도발 모드를 지니고 있음을 예고하고, 그것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던 게 바로,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라는 육식(식민제국주의 문화)에 대한 상징적 거부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약간의 지식 차원으로 그가 작품을 대하는 방식, 그러니까작가에게 작품은 무엇인가라는 한강의 예술관을 간취看取해 본다고 했을 때, 예술작품은 거짓에 대한 저항으로 그 진실을 옹호하는 그만큼 거짓을 폭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지닌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작품의 폭로 기능이 의미가 있는 것은 저 고대 예술의 마취기능과 근대 문학의 계몽기능과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잘 알다시피, 하나의 에스니ethinies한 민족서사로 고대예술을 대표하는 대서사시 <일리아스>만 보더라도 거기 영웅 아킬레우스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참으로 무서븐 침략자이자 잔인한 살인마임에도 그는 어디까지나신성한holy’그리스 민족의 영웅이고, 근대자연주의 소설 <마담 보바리>의 실질적 주인공인 약제사 로제는 중세적 로망, 낭만주의에 대한 거부자이자 소크라테스의 열렬한 숭배자로서의 근대 시민의 멘탈리티를, 앎의 모럴로서의 이성을 중시했던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은 고대 귀족의 영웅서사시가 본받아야 할 모방적 반영의 산물이고, 근대 부르주아의 시민서사시가시골뜨기의사를 비하한 것처럼 자의적 굴절의 결과라는 점입니다. 즉 고대 예술이 왜 집단의 모럴을 대변하고, 근대의 문학이 왜 개인의 모럴을 나타내는지, 그리하여 왜 고대의 예술이 극적이고 과장이 심한지, 근대의 문학이 또한 왜 과시적이고 뻥이 심한지 엿볼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은 그대로 고대예술이 노래이고, 근대문학을 대변하는 장편이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지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강의 작품을 읽으먼서 느끼게 되는 최초의 충격은 분명 내용적인 요소입니다. 육식거부도 근친상간도 나무에 미친 정신이상자 영혜도 나아가 5.184.3에 대한 참으로 끔찍하고 참혹한 현대사에 대한 고발자로서의 발화자의 다시-읽기와 다시-글쓰기도 탄탄하고 정교한 형식과 더불어 노벨문학상 이유문의히스토리컬 트라우마historical trauma’란 평처럼 한강의 작품들은 충격적인 내용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문학적 수기는 패문稗文도 아니고 잡문雜文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대로 고대예술을 대변하는 서사시가 시민이 등장하먼서 종말을 고했고, 근대문학을 상징하는 소설 또한 대중의 등장으로 퇴조를 면치 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뭐 지금은 집단과 개인의 모럴보다는 대중의 사회적 가치가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이고, 그러니 자연 집단적 운명에 기초한 영웅들의 비극적인 시적 과장과소설 쓰냐라는 비아냥처럼 한도 끝도 없이 늘어놓는 잘난 부르주아 개인의 성공 서사인 소설적 과시가 무의미해졌기 때문입니다.

! !

지금은 대중들의목소리가 중요해진 시대입니다. 다양한 목소리라는 대한민국 포털다음多音, 인터넷 이웃사촌이라는네이버NAVER/neighbor’, 너도 TV라는유튜브YouTube’도 모다 이 시대가 사회적 상호주체들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대중서사, 대중평자들의 시대임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형식이 탄생하고 있는 배경으로 이 시대를 구성하는 사회적 상호주체들의 정서적 교감에 의한, 뭐 진실에 대한 욕망이 하나의 보편적인 표현 욕구를 지닌 시대적 형식을 요구한다고 볼 때, 지금은문학적 수기literary essay’라는 장르가 요구된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적 경험 또는 타자의 진실한 목소리를 빌린다고 하더라도 잘 구워진 우수한 작품에 대한 사회적 요구needs가 하나의 필요 욕구로 등장-탈근대문학의 기원인 도스또예프스끼의 저작은 <지하생활자의 수기>입니다.  전래의 시도 소설도 아닌 이것은 그야말로 듣보잡으로 예전에는 듣도 보도 모하던 장르로 작가는 이에 대한 발명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 수기의 저자도 수기자체도 물론 지어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우리 사회를 형성하는 여러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수기의 작가와 같은 인물은 우리 사회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을뿐더러 심지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라고 모두에서 강변을 놓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를 형성하는 여러 상황입니다. 이것은 형식이 하나의 시대적 요구needs의 산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기성의 형식이 이 시대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모하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다 할 수 없기 때문으로, 그것은 곧 진실한 말하기로서의 대중적 목소리가 대두하고 있는 러시아 민중의 대변자 도스또예프스끼의 인식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 그의 소설에서 진실한 목소리의 상호주체성, 대화이론을 읽어낸 것은 탁월한 러시아의 사상가이자 문예비평가 바흐친(<도스도예프스끼 시학>)이고, 이는 역사적인 문예 형식에 대해 비범한 눈깔을 지녔던 루카치(<소설의 이론>)가 이미 그의 소설이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형식이라고 예견했던 것입니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탄탄하고 정교하며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작품이 요구하는 유기적인 형식에 대한 그것이고, 더욱이충격적이라니 이것이야말로 픽션이 아닌 논픽션으로서의 진실한 글이 지닌 문학적 수기의 수상의 충분조건이 될 만한 것입니다.

더욱이 형식에 대한 세계문체사적 인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나에게 노벨문학상 수상이유문이 던진 충격이라니...아닌 게 아니라 이 이유문이 나를 대충격에 빠뜨린 것은 바로 그시적 산문poetic prose’이라는 경천동지할 표현이었습니다. 왜냐하먼 나는 하나의 역사적 형식으로서의 이 시대의 예술형식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가령, 칡뫼김구의 근작 에세이 <고양이처럼 출근하기>(한국스마트협동조합, 2024)해설에서도 내가비평적 에세이의 발흥이라고 한 것처럼-을 표현할 적절한 수단을 찾고 있는 중 때마침 노벨문학상 수상이유문이 던진 충격은 하나의 예언의 적중,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 계속해서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 고유의indigenous‘한국형 서사체라는 형식에 대한 주제를 달고 이 글을 쓰고 있고, 이를 어티케 오랜 내력을 지닌 기철학氣哲學으로서의 유물론적 성격을 지닌 유명론이라는 한국철학의 이론적 밥솥에 쪄낼 수 있을까 라는 문제의식 속에 이 한강론을 또한 쓰고 있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문학적 수기의 성격을 지닌 한강의 작품-또 하나의문학적 수기이자에세이로 평가를 받은 작품으로 우리는 이미 시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문학동네)를 본 바 있습니다.

저널에서는 관행적으로 한강의 소설을 장편소설로 보고 있지만 엄밀히 보건대 그의 소설은 근대의 시민서사시로서 장편소설이 지녀야 할 일반적인 구성요건 규모, 인물, 사건 등-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먼 그것은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의 승리의 서사로서의 일상이라는 리얼리즘적 재현의 모럴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루고 있는 것은 주로등 매우 비일상적인 것들인데다 서술자의 이야기보다는 타자의 목소리가 우선입니다 이 던진 충격은 바로 형식에서의 그것으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전통적인 노래와 이야기만도 아닌, 즉 시도 소설도 아닌 형식의 파괴에서 오는 것으로, 그것은 그의 작품이 매우잡식적omnibus’이며말하기라는 새로운 시대의 언어라는 사실입니다.

, 사실이 그러한지 하나의 문학 장르에 대한 새로운 주장으로서의 토포스를 지닌 이 글에서 나는 하나의 형식파괴로 한강 작품의 문학적 수기로서의 잡식적 장르가 어티케 해서 진실을 요구하는 시대의 욕구에 적절하게 부응한 시대적 형식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증명해야만 합니다. 신화파괴자이자 형식파괴자로서 한강의 문학적 수기라는 말하기 장르가 문제가 되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보것습니다.

1, 아빠, 이 고기가 너무 맛있어요.

2, 아버님, 육식은 좋은 식습관입니다.

3,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이것은 단순한 사례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한강 작품이 지닌문제적problematic’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첫째의 경우는 객체의 상황을 모사하는 수준의 모방단계의 언어로 시적인 노래의 차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아버지는그래, 마니 먹어라! 아가야!”할 것입니다. 둘째의 경우는 주관적이고 성숙한 평가를 드러낸 것으로 소설은 성숙한 어른의 형식이라는 주장과 잘 부합하는 설명적인 이야기의 차원입니다. 이에 대해 아버지는 분명 ! 우리 애가 이런 이야기를 다 할 줄 알고...마니 컷구나!”하고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셋째의 경우는 어떨까? 육식을 거부한다는 자녀의 선언은 분명 충격적일 것입니다. 반영도 굴절도 아닌 형성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집단적인 노래도 개인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사회적인 말하기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채식주의자> 장면에서처럼 아버지는 당장뭐야!”하고 고함을 칠 것입니다.

그래 왜 노래가 반영이고 이야기가 굴절이며, 말하기가 형성인지...이런 형성적 성격을 지닌 말하기가 왜 문제적인지...그것은 기존의 관행을 깨고 흔드는 형성으로서의 말하기는 곧 기성의 법칙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강의 일련의 작품들은 전통적인 의미에 있어서 저 근대의 궁정 소설가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맹키로 부르주아의 맴을 사려고 쓴 계몽소설도,‘한가한부르주아의 맴을 달래기 위해 쓴 수음手淫문학도 아닙니다.

실제로 <마담 보바리>는 나폴레옹 3세의 친위쿠테타의 시작과 함께 쓰기 시작했던 것으로, 민중을 극도로 염오하고 배반했던 당시 부르주아지의 성향을 반영했던 것으로, 그가 소크라테스를 상징으로 하는 근대의 지적 계보에 선 약제사로제 씨에게 뢰지옹 도뇌르 최고 훈장을 안기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반면에 실컷 간통을 일삼게 하다가 죽게 만드는 것에는 낭만주의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이데올로기적 왜곡이라 부정하지 모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강의 작품이 어찌하여 탄탄하고 정교하먼서도 충격적이고 히스토리컬한 트라우마를 넘어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이 시대 최고의 찬사를 받은 고전이 되었는지...그것은 과연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새로운 학파ecole의 지침서가 될지도 모른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르네 지라르(<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한길사)의 말처럼, 왜냐하먼 그의 작품이 실제로 실존주의와 탈근대 카프카 등 새로운 문학사조의 지침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은나는 병든 인간이다.”,“2X2=4, 이것은 인간에 대한 멸시다.”라는 진실한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철학적 수기와 뒤를 이은 일련의 작품(<죄와 벌>,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으

그는 헤겔을 정점으로 하는 근대철학의 이성(아버지) 중심의 실재론적 궤도를 부숴버리는 유명론적 레일부레이커railbreaker로서 망치철학자 니체-탈근대철학의 공식적인 대부 니체, 그는 도스또예프스끼를 자신의 스승으로 공언할 정도로 배운 것이 많다고 했습니다-를 비롯 니체의 계승자 푸코 한국의 철학자 이정우(<세계철학사4>), 오늘날의 철학이 유래한 발원처를 찾을 경우 우리는 푸코의 <광기의 역사>(1961)를 들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푸코는 정작 <광기의 역사>를 도스또예프스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도스또예프스끼는 명실공히 탈근대 철학과 문학의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도스또예프스끼적인 병든 인간이야말로 이성에 가려 지하실에 갇혀 사는 탈근대인의 무의식적 기초를 이루는 인간형이 아닌가 말입니다 를 비롯 세기의 철학자들은 무론 예술가들의 전범이 되었거니와, 그것은 곧 탈근대철학과 문학의 진정한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으로, 최초의 문학적 수기를 쓴 그는 탈근대문학과 철학의 비공식 대부인 것입니다.

꼭 그처럼 기본적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히스테리, 과잉의식, 간질 발작 등 신경증 환자인 것처럼 한강의 주인공들 또한편집증이나 망상, 신경쇠약’(<채식주의자>)을 앓고 있는 신경증 환자들이고 그의 작품 또한  하나의 문학적 수기입니다 하나의 철학적 수기로서 한강의 문학적 수기 또한 생명 사상의 수원이자 사유의 연못으로 이 시대 동양적 생명 사상과 환경 운동의 근간인 도교taoism, 그 한국적 불이不二사상으로서의 생명의 사상이 될 만한 지침서로서 근대의 죽음의 서사를 깨부술 박격포탄으로서의 세계사적인 사유의 번철燔鐵이 되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특히이라는 무의식을 통해 억압과 욕구충족이 내밀하게 작동하는 인간사의 비밀을 진실한 문학적 수기의 형식으로 그 대중적 욕망과 의지를 충격적으로 잘 드러냈고, 전래의 형식인 노래와 이야기만으로는 다 할 수 없는 자신의 목소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하기는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이지만도 않다는 점입니다. 노래하기가 집단적이고 맹목적이고 연역적이고, 이야기가 개인적이고 일방적이며 귀납적인 것과는 달리 말하기는 사회적인 공감에 기초하는 불이不二의 변증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언어로서의 말하기가 집단적인 예찬으로서의 고대의 서사시와 개인적 과시로서의 근대의 장편소설과는 다른 사회적 성격을 지닌 탈근대문학으로서의 문학적 수기literary essay의 본질입니다. 바로 여기에 진실하고 용기 있는 목소리로서의말하기라는 형식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며칠 전 뉴욕타임즈(2025. 4. 23)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세상이 등을 돌렸는데도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여 왔다He continued to speak up for the marginated, even as the world turned away(밑줄-글쓴이)

이런 사실은 지금,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말하기가 곧억압의 문제이자저항의 문제임을 암시합니다따라서 말하기의 문제는, 더욱이 유교의 영향으로 남성중심사회male-centered-society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한국에서 여성 작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함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먼 일반적인 관행과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남근 신화가 일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사회에서 하나의 폭탄과도 효과를 지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화의 목적은 세계를 고정시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작가는 그 특유의 예지적인 힘으로-형성이라는 서사 전략을 취하였다 할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억압을 피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자 동시에 그 억압의 진실을 폭로하는 분별 있는 문학적 방법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 말하기는 곧 사회적 담론의, 디스꾸르의 문제입니다. 누가 이 담론을 움켜쥐고 있는가. 이것은 곧 권력의 문제이자 이 권력을 끼고 도는 지식의 문제와 다름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담론이 지닌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깊이있게 다룬 철학자로 예의 프랑스‘68의 상징 푸코가 있습니다.

, 빌어먹을! 돌고 돌아 또 푸코입니다. 하나의 지식 권력으로서의 사회적 담론에 큰 관심을 보인 그는 <광기의 역사>, <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 <담론의 질서>등 일련의 저서를 통해 오늘 탈근대철학으로 상징되는 현대철학을 주도했거니와, 여기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1969, 그러니까 프랑스‘68 대중혁명이 휩쓸고 지나간 시점에 그의 주도로 철학세미나가 열렸는데, 그는 당시 내민 발제문 <저자란 무엇인가?>에서 제 일성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던 것입니다. 누가 말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이것은 말하기의무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현대 대중적 글쓰기의 기본적인 윤리강령이 된 것입니다. 이런 말하기를 전제로 한 글쓰기 문화가 당대의 화두가 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데리다의 <글쓰기와 차이>를 비롯 라깡의 <에크리>, 푸코의 <담론의 질서>, 바르트의 <글쓰기의 즐거움> 1960년대를 전후로 현대의 아테네를 자처하는 프랑스 빠리에서 탈근대철학 문화의 일종인 하나의 철학적 수기로 글쓰기 문화가 성행했던 것은 글쓰기, 에크리튀르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자유를 구가하는 대중적 주체의 자기 실현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역사적인 문건으로 중요한 화두가 되었던 것은상관이라는 말이 암시하는 것처럼‘68 대중 혁명 이전에는 누구든지 말하기, 목소리내기에서 자유롭지 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어디까지나 제국주의적 자유를 누리고 있는 프랑스의 식민적 자유, 자아 안의 타자의 문제, 즉 차이 속의 동일성으로서의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관용의 반영입니다. 잘 알다시피, 당시 프랑스는 당시 알제리, 모로코 등 아프리카령 식민지와 인도차이나 등 적지 않은 식민지를 거느린 유럽의 열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만해도 유럽 중심의 식민제국주의 문화가 온존했던 시기로 이것은 국제적으로 헛소리가 될 여지가 충분한 것이었고, 이런 이론적 약점이 마르크시즘으로 무장한 포스트식민 이론가이자 페미니스트인 가야트리 스피박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이론가이자 실천가로서 가야트리 스피박의 진실하고 용기 있는 학자의 의문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과연 여성약자들(또는 성소수자들)은 말할 수 있는가를 그가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 왜 말하기인가... 한강의 말하기 방식으로서의 문학적 수기의 형식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하기, 그것은 무엇보다 진실한 목소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1,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다.

2,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어.

여기, 1의 서술자는 대상을 다만 냉혹하게관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얼음같이 차가운 이성의 눈길입니다. 이게 바로 저 잔혹한 근대의 죽음의 서사이고, 죽음의 서사인 근대 소설의 문법입니다. 즉 죽음의 서사인 근대 소설은 그 새끼가 비명을 지르며 울어대든 말든 냉혹하고 노트럴한 이성의 거리 저편에 자신을 위치시킵니다그러나 2의 발화자는 다릅니다. 그는 대상을 죽은 대상체가 아닌 하나의 살아 있는 회상체로서 지금, 여기 현재의 시공간으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따스한 표정을 지닌 인간 본래의 숨결을 지닌목소리가 피어나고 있습니다. 즉 감정의 목소리로서의 말하기는 파토스의 사원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일상에서왜 모두가 우리를 무시하나요(서울대병원 청소하청노조 민들레분회 소속 노동자들의 외침),“우리 용균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가 대체 누구란 말이냐?”(하성환의해맑게 웃던 너의 죽음 앞에서-짧은 생을 마친 청년 노동자에게 바치는 시),“내란 수괴 윤석렬을 파면하라!”라며 격하게 터져나오는 노동자들과 이땅의 어머니의 목소리를 비롯 국민 대중의 인저스티스한 불의한 일상을 겪으며 터져나오는 우리의 말하기는 하나의 발화이자 담론이 되어 하나의 사회적 인정서사라로서 거리의 투쟁서사가 되고, 마을서사가 되는가 하먼, 이제 하나의 개인서사이자 골목서사를 넘어 모두의 집단서사가 되어 시대의 고통을 넘고 죽음을 넘어 이 시대의 거대한 생명의 서사 물결을 이루었다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너와 나의, 우리들의 목소리를 담은 삶의 서사는 다수운 밥이 담긴 밥상이고, 간단치 않은 하루하루의 일상이며, 잠시나마 일상을 조용히 마주잡은 찻잔인가 하먼, 괴물엘리트들의 정치판이고, 시름시름 앓는 경제판이고, 지지고 볶는 미용실이고, 죽고 못 사는 사랑이고, 운명이 오가는 재판정이며, 매일매일 미세먼지 소식이 올라오는 뉴스룸이고, 이것 보세요! 드잡이로 날을 새는 국회의사당이고, 빌어먹을! 여기 좀 봐라 이 미친놈들아! 외쳐대는 열악한 노동의 현장입니다. 또한 그것은 불의에 저항하는 그리스 비극 이래의 세계사적 전통을 지닌 목소리입니다. 거룩한 성수나 멸균 처리된 정수로서는 비극을 쓸 수 없습니다. 비극은 피와 눈물로만 쓸 수 있습니다. 그래 죽음(크레온) 앞에서도 안티고네가친오빠의 장례를 치르는 일보다 더 고귀한 영광을 어디서 얻을 수 있겠어요?”라고 정의를 부르짖은 것처럼, 꼭 그처럼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우기가 빨리 온 건가...“아우렐리아노, 마콘도에는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마콘도라는 가상의 마을에서 벌어진 부엔디아 가문의(미제국주의,‘그링고들에 의한) 100년간에 걸친 비극의 이야기(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는 어떤 상징성에 값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거기, 소설 속 주인공들의 고독은 그대로 콜롬비아의 고독이자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이며, 궁극적으로 하나의 유전자로 과거의 기억과 상처를 지닌 채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 고독임을 암시합니다.

여기,‘그 도시의 열흘을 아프게 기억해야 하는 소설적 수기 속의 공간에서도 지금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년이 온다>(창비)에서 비는 하나의 관습적 상징으로서나 현실적 의미로서나 비극을 풀어나가기 위한 훌륭한 소설적 미장센인 것입니다. 이 비의, 비극의, 고독의 중심에 우리의소년동호가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공식 페이지)

그렇다먼 오늘 하나의 저항서사로서 소년 동호를 통해 우리가 광주를 기억하고 그 의미를 기리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광주가,‘그 도시의 열흘이 지닌 의미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비극으로서의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되돌아보게 하는 정신의 질료를 선물하기 때문입니다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정신의 질료로서의 광주그것은 저 죽음도 불사한 안티고네처럼 부당한 권력에 대한 용기 있는 저항정신이 아니고 무엇이며, 그것은 또한 개인의 희생을 무릅쓴 고귀한 희생정신이 아니고 그 무엇이며, 그것은 오늘도 잊을 수 없는 <매장시편>(임동확)들이 아니고 또한 그 무엇이란 말인가.

오늘은 우리가 졌다고 하고

어느 날쯤 어딘가에 램프라도 켜 두었다고 하자

마침내 우리가 쓰러지고 죽어 가

아픈 기억만 남았을 때

길고 오랜 싸움에 지쳐 외로울 때

흐르는 강물 마른 갈대숲에

다소곳이 누워 보기라도 하자

어차피 돌고 도는 세상의 승패에 대하여

역사에 대하여

꿈꾸는 것과 침묵하는 일만 남았다고 써 두자

풀잎 같은 이 목숨

풀잎처럼 작고 쓰린 환한 미래를 위하여

올바른 증오를 위하여

언젠가 착한 소녀가 울며 기도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고해소가 있는 나라를 생각해 두자

내 땅의 이웃들이 서로 미워하고

헐뜯고 꼬집으며 살아온 모든 비애와 슬픔이

모두 우리들 운명이라 해 두자

아무도 이날의 뜨거움과 분노를

그날의 죽음과 함성을 못 잊는다고 해 두자

서로가 서로의 증인이 되어

가고자 하는 길은 하나이고

그 길은 바뀔 수도 없었다고

멈출 수도 없는 것이라고 다짐해 두자

기다림과 그리움이 전부인 내 나라

보리죽만 먹던 서러운 하늘에 서서

오늘은 졌다고 하고

오늘은 아무것도 안 보았다 하자

그대여, 오늘은 무효라고 해 두자

- 10 그날의 일기

나는 이 시를 중간에서 싹둑 잘라 편집하고 싶었지만 쉽게 되지 않습니다. 너무도 가슴에 와 닿는 절창이자 진실한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이와도 같은 맥락에서 열다섯 살풀잎과도 같은 중학교 3학년생이 그 무엇을 알까마는, 그러나 하나의 멘데이터리한 도덕적 당위로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양심에 따라 희생을 무릅쓰고 바친 댓가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 희생은, 그를 통해 전해지는 진실은, 더욱 비극의 강도를 심화시키고, 분노의 게이지를 높이는 임동확의 아이러니를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아무러한 양보를 요구한다 하더라도 광주의 희생과 진실은 결코 잊히어질 수 없고 절대 잊히어져서도 안 되는 부채의식으로 너와 나의 심층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기,‘, 죽을 수 없는 너는, 나의, 발화자의 목소리를 지니고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비가 올 것 같아비점은 바로 이 서두에 있습니다.“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정말 비가 쏟아지겠어그래 샤먼의 공수처럼, 그러니까 살아있는 무당이 죽은 혼의 목소리를 내뱉는 것처럼, 이 시대의 대중적 샤먼인 발화자는 하나의 도풀갱어로서 어린 새(==동호)의 페르소나가 되어 동호의 목소리를 뱉어 놓습니다. 그리하여 발화자는 어린 새, 동호의 눈으로그 도시의 열흘의 진실을 보고 확인하고 증언하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민군은 도청을 사수하다 의연하게 죽었다고...그러나 그 죽음은 너무 억울하다고...

그것은 바로 지배서사에, 언론에, 매스컴에, 가담항설에 다만 폭도들의 소행이라고 광주의 진실이 왜곡distortion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억울하게 맞아 죽고 부서져 죽고 터져 죽고 불타 죽고 한 영혼들은 죽어도 죽을 수 없는검은 숨이 되어 하나의 유혼이자 고혼이자 원혼이 되어, 어린 새가 되어 아프게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주는 아프다고...왜 책임자가 여즉 살아 있느냐고...(뭐 그 새끼는 을마 전에 무주고혼이 되었지만) 민주주의! 이것은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아니었느냐고 그러니,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여기,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바로 이것이 이 소설이 건드리고 있는 진실의 뇌관입니다. 그러나 여즉도그 진실은 오리무중입니다. 바로 여기에그 진실을 밝히기 위한 광주의 서사는 계속되어야 하고,‘그 진실을 드러내려는 하나의 의지와 꿈과 욕망의 서사로서의 너와 나의 목소리 또한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죽은 동호가어린 새, 아니 잠들 수 없는죽은 숨으로 작가에게 빙의되어 나타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의 저항서사로서 국가를 위한 목적과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개인의 목적 사이의불화대립에 대한 저 소크라테스 이래 숙명적인 주제에 대해 광주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도 여전히광주광주인 까닭은 고귀한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값진 교훈으로, 그것은 마치 부엔디아 가문의 고독이 콜롬비아의 고독이자 권력과 어쩔 수 없는 길항stand against 관계에 있는 우리 모두의 고독이었던 것처럼, 꼭 그처럼 광주가 던진 인간의 존엄에 대한 질문은 곧 그대로 우리들 모두의 질문이며, 권력과 마주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류 보편의 세계사적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한강은 말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결코 잊히어져서는 안 된다고...

살인자, 라고 말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입을 열어 나는 말했다

살인자.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살인자.

더, 더 크게 말해야 한다.

......어떻게 할 거야, 네가 죽인 사람들을?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4편에서 게속됩니다

김상천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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