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별하지 않는다>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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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예술가는 위대한 사상가다

아버지에서나무...이것이 한강의 세계로 가는 시의 오솔길입니다.

언제나 나무는 내 곁에

하늘과

나를 이어주며 거기

우듬지

잔가지

잎사귀 거기

내가 가장 나약할 때도

내 마음

누더기,

너덜너덜 넝마 되었을 때도

내가 바라보기 전에

나를 바라보고

실핏줄 검게 다 마르기 전에

그 푸른 입술 열어

-'새벽에 들은 노래 2'

한강의 시집을 여니 거기 시인의 말에둥근 적막이라는 말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고 잠시 머물게 합니다.‘적막이라는 것은 고요하고 쓸쓸하다는 것이니 뭐 사막과도 같은 죽음이 어려 있는 것입니다. 그의 내적으로 강렬하지만 차분한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는, 그러나 분명 부정적일 수도 있는 뉘앙스가 있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둥근이라는 어사가 붙으먼서 불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 무언가 비의秘意가 있는 것으로, 이 둥근이 참으로 만만치 않은 것은 바로 여기에 그의 해석적 의지가, 세계에 대한 시각perspective, 뭐 한강의 사상이 금편잎처럼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은가 말입니다

, 나는 한강론을 마무리하기 위해 이 자리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런 나에게 여기둥근 적막이라는 개념과 더불어나무의 이미지는 참으로 어둠 속에서 빛을 찾은 것만큼이나 놀라운 발견이자 금빛 희망입니다. 앞에서 보아왔듯이 한강의 주요작품들은 지옥의 묵시록으로 연상되고 있는 암흑의 핵심으로서의 근대 세계에 대한 암울한 주제가 주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지적한 게 바로 노벨문학상 수상이유문의히스토리컬 트라우마였습니다.

지금부터 야그하려는 한강의 최근작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만 해도 그렇습니다.“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이것은 마치 피아니스트가 운명의 첫 음을 낼 때와 같은 경우에 해당합니다. <소년이 온다>의 첫 구비가 올 것 같아.”처럼 여기서 모든 게 결정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 <채식주의자><소년이 온다>와 더불어 여기, <작별하지 않는다>을 통해 우리는 한강의 작품에 드러난 그 비극적 요소로서의 상징성을 지닌로서의 신화소mytheme를 보는 것입니다. 뭐 자연의 물리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원소가 요구되는 것처럼, 꼭 그처럼 '신화소'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요구되고 있는 구조주의의 핵심 기호입니다.

그러니까 피이든 비든 눈이든 이것은 모다죽음이라는 특정한 함의가 박힌 상징적 이미지들입니다. 그러니까 적막처럼 물 또한 죽음을 상징한다 할 것입니다. 이것은 꼰대 같은 아버지로, 근대의 억압 문화로, 식민제국주의의 잔인한 침략성을 고발, 폭로하는데 효과적으로 기여하고 또한 강렬하고 완곡한 표현을 얻음으로 대중적 공감을 얻게 된 보편적인 이미지들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한강 작품의 두드러진 표현적 특징으로서의 그시적 산문이라는 평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시적 산문이라는 평언評言에서 방점은 역시시적poetic’이라는 수사에 있습니다. 그러니까그녀는 아름다운 여성이다라 할 것을 그녀는 살구꽃을 닮았다표현한 것처럼 시적 이미지의 사용은 살뜰한 감각적 정서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뭐 감동感動이라니, 이런 감각적 정서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강은근대는 잔인한 죽임의 문화다할 것을 일상화된 육식 문화를 통해 보여줬기에 더욱 뜨거운 감각적 진실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제주 4.3의 진실을 전하는 얘기도 마찬가집니다. 한강, 그도 다음처럼 어디에선가 읽었을 사회과학적 접근을, 개괄적인 지식으로서의, 그러나 건조한 이성의 언어로서의, 믿기 어렵고, 그래서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분명 냉혹한 진실hard truth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간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그러나 작품에 대해 심미적 거리를 두고 있는 독자들이 그의 마음을 여는 것은, 좆도 아닌 내가 가물가물하던 뜬 소식처럼 띄엄띄엄하던 4.3의 진실을 알고 드디어 4.3의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게 된 계기는 제주 출신의 인선의 가출 이야기이지 사회과학지식이 아닙니다. 이야기는 진실한real 경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집을 나서기 직전에, 엄마가 쓰는 안방을 돌아봤던 기억이 나. 미닫이문이 열려 있었고 이불은 반듯이 개켜져 있었어. 하지만 전기장판이 깔린 요는 그대로 펼쳐져 있었어. 그 요 아래 실톱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 날카로운 쇠붙이를 깔고 자야 악몽을 안 꾼다는 미신을 엄마는 믿었거든. 하지만 실톱을 깔고도 엄마는 자주 꿈을 꿨어. 숨을 죽여 몸서리를 치고, 이따금 들고양이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흐느껴 울었어. 그 모습, 그 소리가 나한텐 지옥이었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다신 안 돌아올 거라고 그때 스스로 맹세했어. 저 사람이 내 인생을 더이상 어둡게 채색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구부정한 등과 끔찍하게 여린 목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것은 과연 대상에 대한 개념적 지식이 아니고 감각적 이미지의, 경험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감정이 소거된 가지런한 언어가 아닙니다. 육화된 인간의 민낯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여기, 이상한 소리를 내며 신음을 토하고 있는 엄마는 즉자적 존재입니다. 이 이상한 소리를 의식하고 있는 존재, 그가 바로 발화자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이렇게 대자적인 의식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상에 대한 정서적이고 심미적 거리를 지닌 가 지닌 의미입니다.‘는 기본적으로 의미를 물고 늘어지는 대자적 사유로서의 유명론의 표지입니다. 이것은 다만 지시어가 아닙니다. 여기, 한강의 작품에서 숱하게 드러나는그 꿈’,‘그 눈송이에 대한 이야기는 시적 환기 이상의 개인의 비극을 넘어 역사적 사건을 불러내는 이야기의 유도장치입니다. 또한는 악몽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잊을 수 없는, 아니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그것으로서의, 쇠붙이조차 뚫고 나오는 지독한 트라우마, 그것입니다. 저 아우슈비치의 그것처럼 여기 제주 4.3의 비극을 고발하는 이야기의 뇌관은라는 인계철선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요 아래,‘그 모습’,‘그 소리, , 씨발! 중요한 것은 과연그 소리입니다. 엄마의이상한 소리’,‘끔찍하게 여린 목소리말입니다. 억눌리고 짓눌려져 여린 그 소리는, 밝은 대낮에는 울 수도 없는 그 소리는, 닫힌 목소리로서의 은폐된 그 목소리, 니체의 정오의 시간도 헤겔의 황혼의 무렵도 아닌 모두가 잠든 그 깊은 밤이 되어야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꿈은 마법의 언어입니다. 신성한 사제의 현실원칙의 언어에 짓눌려 있던 잠재된 욕망으로서의, 그러나 기어코는 문화적 속박으로부터 야기된 결핍을 보상하려는 욕망의 언어로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언어, 그것은 곧 쾌락의, 감정의, 파토스로서의말하기입니다. 저 오페라의 유령이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나도 어린 시절 사랑을 받았다면 이렇게 유령이 되지 않았을 거야' , 이것은 무의식에서 터져 나온 진실한 말parole입니다.도둑도적도 아닌도적놈’(임화의 '네거리의 순이')처럼,‘설렁탕 집 돼지 같은 주인년’(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처럼 말하기는 일상의 언어, 빠롤입니다. 이야기는 말하기로 실현됩니다. 그리고는 대자적 자의식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말하기는잊혀지지 않는에서잊을 수 없는그것으로, 다시 말하기는,‘잊혀져서는 안 되는사건으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기, 나무도 마찬가집니다 . 시인의 마음에 깃든 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닙니다. 나무는 저 신화시대의 우주수처럼 자연(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신성한 매개물이고, 이 나무의 잎사귀는 신목神木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나에게 위로와 희망의 언어를 전해주는 '자연'은 하나의 사원입니다.‘그 푸른 입술을 지닌...이것은 사물을 다만 죽은 대상으로 대하는 데카르트적인 기계적 자연관으로서의 근대 서구인들의 태도와는 매우 다른 동북아의 도교적 사유의 일종이자, 이것은 또한 인간과 자연이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二사상이자 인간과 자연은 대등하다는 조선 고유의 인물성동人物性同사상 이상의 함의를 지닌 시적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한강의 세계에서 나무는 죽은 사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물질matter입니다. 그러니까재료 일반을 뜻하는‘matter’가 라틴어 마테리아Materia, 본래 엄마Mater, 어머니Mutter에서 비롯된 것과 유사한 함의를 지녔습니다. 어떤 것이 이루어지게 되는 본바탕인 재료는 여성적인 부분과 같기 때문입니다다시말해 우리는 한강의 작품을 통해 거대한 생명의 모태matrix로서의 어머니-나무를 보는 것이고, 이것을 잘 표현한 것이 바로 대규모의 리얼리즘(임화)으로서의우리 나무들입니다. 이것은 동양적 타자의식을 잘 대변했다 할 것으로 나무는 신성한 외경의 대상으로서의 일종의 종교적 상징입니다. 더욱이 의인화되어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뭐 나무에도 생명이 있고 인격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말입니다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벌판의 한쪽 끝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처럼 조금씩 다른 키에, 철길 침목 정도의 굵기를 가진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침목처럼 곧지 않고 조금씩 기울거나 휘어 있어서, 마치 수천 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이 어깨를 웅크린 채 눈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

묘지가 여기 있었나, 나는 생각했다.

-<작별하지 않는다>‘1 결정도입부

 

, 이것은 외형적으로 소설의 겉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알짜는 전부 시적인 이미지로 가득합니다. 시는 메타포, 만남입니다. 메타포metaphor는 비유의 강물이자 상징의 숲길입니다. 뭐 네루다가 탐스런 젖가슴을 '밀크잔'이라 하고, 매혹적인 엉덩이를 '장미 언덕'이라 한 것과 유사한 시적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론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꿈을 통해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꿈-상징을 분석하기, 이것은 한강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방법론적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 (제주 한라산의)‘은 일반적인 추위와 고통의 의미를 넘어, 아니 그 낭만적인 저 북구의, 백석의, 설원의, 자작나무와 라라의 전설을 넘어 4.3의 죽음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말입니다. 그래 꿈 속의 발화자의 눈에 들어온 대상은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라는 환유 이미지입니다.

무론 그것은 4.3항쟁과 비극으로 희생을 당한 이들을 암시하는 것으로수천 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에 닿아 있습니다. 이것은 한강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라이트모티프로, 중요한 것은 또한검은에 부여된 죽음의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은 그러나 서구인의 시선으로 보건대, 자연물에 불과한 나무에 그 동양적 타자의식으로서의 동질감을 지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표현입니다.‘이 바로 근거입니다. , 이것은 증말이지 한강 사유의 비밀을 여는 열쇠가 아닌가 말입니다. 그러먼서 이것을 (선로 밑에 까는 목재)침목에 갖다 대어 설명하는데, 그러나 침목처럼 곧지 않다 했습니다.

, 씨발! 난 증말이지 피어오르는 미적 파토스로서의 감동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러니까 줄곧 근대의 식민제국주의에 따른 한국적 비극을 고발해온 작가에게 침목은 근대를, 침략을, 죽음을 연상시키는 것이고, 더욱 작가의 명징한 시선은 침목의 곧음에, 리니어한 직선에 가 있던 것으로 이것은난자하는/죽음의 직선들-거울 저편의 겨울6-중력의 선에 그대로 닿아 있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둥근 적막에 깊이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릇 속에 담긴 내용물인 것처럼, 형식 속에 깃든 사상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둥근 적막에 특히둥근에 한강의 사상적 종지가 박혔다 할 것으로-아버지, 날카로운 이빨, 쇠톱이 아닌 나무, 둥근 젖가슴, 푸른 입술 등을 통해 볼 수 있듯이-작가 한강을 사상가 한강이게 하는 것은 과연 형식을 넘어선 그 사상의 문제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형식과 내용을 아우른 그의 문학적 사유는 미적 금도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할 것으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한강의 사상은 직선이 아닌 둥근 곡선의 사상이라는 점입니다. 이것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 것으로, 오늘 병든 지구의 몸을 회생시킬 수 있는 생명론으로서의 동양의 순환론적 사유를 대변합니다.

 

어느 날 눈떠보면

물과 같았다가

그 다음날 눈떠보면 담벼락이었다가 오래된

콘크리트 내벽이었다가

먼지 날리는 봄 버스 정류장에

조그려 않아 토할 때는 누더기

침걸레였다가

들지 않는 주머니칼의

속날이었다가

돌아와 눕는 밤마다는 알알이

거품 뒤집어쓴

진통제 糖衣였다가

어느 날 눈더보면 다시 물이 되어

삶이여 다시 내 혈관 속으로

흘러 돌아오다가

-‘어느 날, 나의 살은전문

 

, 이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시입니다. 왜냐하먼 전래의 문법을 파괴한데다 기이한(?) 생각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왕의 학교 문법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근대적 주체, 코기토로서의 움직일 수 없는 실체성을 지닌 고정된 나일 뿐입니다. 이런 사유는 한국의 대중에게는 낮선 것이 아닙니다.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마음 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는(정태춘의 '북한강에서')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나는 물이 아닌데도 물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 이상의 함의를 지닌 시적 입법이자 새로운 생명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의 문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혁명의 지침이자 사유의 연못이 되고자 하는 한강의 대담한 도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근대적 의미의 정신을 지닌 주체로 보기보다는 '살'이라는 육체성을 지닌 자연의 일부로서의 유기적 존재라는 동양적 기의 세계관에, 유물론적 유명론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나는 물이고 담벼락이고 콘크리트 내벽이고 누더기 침걸레이고 주머니칼의 속날이고 진통제 糖衣이고 다시 물이고...그러니 나는 물처럼 나를 넘어 무수한 것, 타자가 될 수도 있으니, 그러니 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없어야 무의 상태가 되어 썩어야만 새로운 생명을 얻듯이 나는 무화nullification되어야 그들에게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 한강의 사유는 동양적 순환론으로서의 타자의식을 넘어무성無性, nothing-ness에, 진정한 생명론으로서의 들뢰즈적 '되기'에, 그 리좀적 연대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정 서구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의사疑似 타자, 가짜 타자를 넘어 진정 그들이 되기 위해서는 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는 나도 너도 아닌 그 무엇으로서의 새로운 사회적인 타자로서의 한국적 존재론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그래 그는 자신을 '나의 살'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로, 재료로, 어머니로,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무성을 지닌 저 물할머니 같은 강물처럼 말입니다. 무성이 살아있는 시원의 샘터 같은 곳, 그곳은 연못입니다.

온갖 잡것들과 함께 지낸다, 슬픔에서도 물러나 기쁨에서도 물러나, 늪은 노래한다, 이 기막히고도 알 수 없는 일들이 물밑에서 아니 물위에서, 자라다 쓰러지고 쓰러지다 일어서서 노래하는 그 곳, 일렁거리다, 인간도, 벌레도, 미래도, 희망도 저 속에 잠들 것이다, 상처투성이 푸른 땅의 자궁, 개구리들의 모성母性이 보이고, 벌레들의 정액, 풀들의 교미가 보이고, 뼈와 흙과, 돌과 풀과, 사람과 함께 늪은 고뇌한다, 도시가 흘러 들어오고, 기술의 나사 튕겨 나오고 과학의 잔재들, 폐차들 쌓여 썩는다, 이성理性의 고름과 눈물, 퇴직한 인간들의 명패, 물은 온갖 쇠붙이에 달라붙어 살을 뜯어먹는다, 지극히 합리적인 그대들의 시간들, 우둔하고 흐리게 잊혀진다, 온갖 잡것들, 진보한다 그리고 퇴보한다, 아니다 그런 것은 없다, 이것도 저것도, 저것도 이것도 아니다, 아닌 것도 아니다, 또 아니다, 아닐까, 그럴까 하면서, 드디어 늪은 맑은 노래 흘러 보낸다, 우 우 우, 갈 숲의 건반을 두드리며 새들이 몰려올 때 낮아지거나 높아지거나 혹은 숨으면서 노래하는 늪, 풀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 악보를, 자생하는 풀숲과 진흙의 발을 서로 딛고 오르내리는 물의 음계, 늪의 지성知性, 온몸을 부비며, 아름다운 화음和音으로 연대한 공생과 자치의 터

- 최재목의 '늪' 전문

여기, 최재목의 시, ‘늪’에서 인간, 벌레, 미래, 희망, 도시, 기술의 나사, 과학의 잔재들, 폐차들은 탈근대철학의 비조, 망치철학자 니체가 자신의 처녀작 <비극의 탄생>그렇게도 쪼아대는 소크라테스주의를 상징하는 이미지들입니다. 즉 소크라테스주의의 신봉자 플라톤은 비극의 적대자입니다. 그렇다면 비극은 무엇인가. 여기서, 비극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신으로 상징되는 신화의, 시의, 생명의, 통합의 세계를 암시합니다. 시에서 늪과 함께 고뇌하는 상처투성이 푸른 땅의 자궁, 개구리들의 모성母性, 벌레들의 정액, 풀들의 교미, 뼈와 흙과, 돌과 풀과, 사람이 모두 비극적 세계를 암시하는 기표들입니다. 즉 여기서, 비극은 소크라테스적 이성과 대립되는 그리스적 자연관의, 신화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성의 세계가 개별자를 대표한다면, 신화의 세계는 보편자를 상징합니다. 곧 철학이 대상과의 균열을 나타낸다면, 시는 대상과의 합일을 드러내는 코노테이션입니다. 이 작품에서 근본적으로 주목되고 있는 것은 이성의 세계와 신화의 세계의 대결입니다. 여기, 신화의 세계가 시에 닿아 있다면, 이성의 세계는 소설에 닿아 있습니다. 니체가 근대부르주아의 이성의 문법을 보여주는 소설을 까대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플라톤은 후대를 위해 새로운 예술 형식의 전형을 창조했다. 상당히 발전된 형태의 아이소포스 우화라고도 말할 수 있는 소설의 전형을 말이다"( <비극의 탄생>, 제14장)

그러니까 시가 동화同化의 언어, 비유를 통해 대상과의 만남을 말하는 고대적 양식이라면, 소설은 이화異化의 언어, 개념을 통해 대상을 찢으면서 하나의 개념적 영토를 배타적으로 설정하는 죽음의 양식입니다. 즉 소설의 세계는 귀납적 일반화를 통해 현상을 일정한 분류와 차이의 세계로 인식하는 부르주아적 멘탈리테를 보여주는 근대의 양식입니다. 다시 말해 시, 비유가 부족의 백과로 전체를 구성한다면, 소설, 개념은 개인주의를 모토로 삼은 부르주아의 계몽 백과로 개별을 의식합니다.

이렇게 시와 소설의 세계 인식의 차이는 극단적으로 소크라테스-플라톤에 의해(<국가>) 시인추방론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플라톤 대 호메로스, 이것이야말로 완전하고 진정한 적대관계이다-전자는 최선의 의지를 지닌 ‘저편 세계의 인간’이자 삶의 위대한 비방자이고, 후자는 뜻하지 않은 삶의 숭배자이자 금빛 자연이다.”(<도덕의 계보학>, 홍성광 번역)라고. 여기, 우리는 니체를 통해 호메로스-소크라테스, 플라톤-니체로 이어지고 있는 서양의 지적 계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연에서 인간, 다시 자연으로 회귀하는 새로운 문명적 전환의 코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그는 소크라테스로 상징되는 이성주의에 반기를 든 탈근대 철학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쓴 주저들이 , 가장 대표적으로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시도 소설도 아닌 문학적 수기의 형식을 지닌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근대 세계는 알렉산드리아적 문명의 그물망에 걸려 있으며 최고의 지적 능력으로 무장하여 학문에 복무하는 이론적 인간을 이상형으로 간주한다. 그 원형이자 원조는 소크라테스다.“(18장)

이런 소크라테스에 대해 니체는, 그를 “커다란 외눈을 한 퀴크롭스라는 괴물”에 비유하기도 하고, “독재적 합리주의자”라며 힐난하기도 하며, “비극적 세계관에 맞선 최고의 적대자”라며 그 대적 의식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위 시에서 볼 때, “이성理性의 고름과 눈물”, “퇴직한 인간들의 명패”, “물에 뜯어 먹히고 있는 온갖 쇠붙이들”, “우둔하고 흐리게 잊혀지는 지극히 합리적인 그대들의 시간들”, 그리고 “진보하기도 하나 퇴보하는 온갖 잡것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자연파괴라는 문명의 신음을 앓고 있는 우리들에게 니체와 우리의 한강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니체와 한강을 통해 근대과학, 즉 이성에 의해 짓눌려진 감성과 순수한 욕망, 그리고 심미적 의식이 회복될 수 있는 단초를 봅니다. 그리하여 여기,

“드디어 늪은 맑은 노래 흘러 보낸다, 우 우 우, 갈 숲의 건반을 두드리며 새들이 몰려올 때 낮아지거나 높아지거나 혹은 숨으면서 노래하는 늪, 풀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 악보를, 자생하는 풀숲과 진흙의 발을 서로 딛고 오르내리는 물의 음계, 늪의 지성知性, 온몸을 부비며, 아름다운 화음和音으로 연대한 공생과 자치의 터”

에서 신화적 의인화를 통해, 늪의 정령이 맑은 노래를 흘려보내는 아름다운 생명의 모신이, '무성nothing-ness'의 기운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유기적 자연을 마주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여기, 늪에는 근대의 시체, '이성의 고름과 눈물, 퇴직한 인간들의 명패'가 아니라 생명의 이미지들이 저마다 눈을 뜨고 '맑은 노래를 흘려 보내고 있'습니다. 즉 늪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담고 있는 기호입니다. 다시말해서 늪은 죽은 지시체, '물은 H20' 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체, '물은 여신'입니다. 다시 말해 늪은 다종의 모체들이 생명의 첫눈을 뜨기 시작하는 시원의 공간, 매트릭스입니다. 모든 물상들은 늪의 이미지를 통해 재생합니다. 여기 이 새로운 현상 속에서 새로운 만남, 새로운 의미가 탄생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물의 음계가 오르내리며 노래하고 늪의 지성이 온몸을 부벼대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이미지는 죽음의 법칙을 깨부숩니다. 이미지는 처녀입니다. 근대 이성철학의 원조 소크라테스는 죽은 개에 지나지 않고,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적 인간이 횡행하던 시대는 지나갔(20장)”기 때문입니다. 

물뿐 아니라 바람과 해류도 순환하지 않나. 이 섬뿐 아니라 오래던 먼 곳에서 내렸던 눈송이들도 저 구름 속에서 다시 응결할 수 있지 않나...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

그래 나 없이 죽어간 새를 묻기 전에는 잠들 수 없다는 신념은 발화자에게 전이되어 꿈의 진실을 알게 된 나는, 이 시대의 안티고네는 인선의 부탁으로 제주로, 인선이의 고향으로 향합니다. 너에게로, 새에게로, 자타불이自他不二, 거대한 부활의 의미를 지닌 대생명의 세계로...한강의 세계로...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 만해진 다음부터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삶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자, 이것이야말로 한강이 이루어낸 그 한국적 사유의 정체로서의 불이의 대승적 생명사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 한강이 어찌하여 미적 충격을 넘어 온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는지...

그것은 '예술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가 Can Art save the World?'라는 오랜 질문에 그가 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마치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수천 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이 어깨를 웅크린 채 눈을 맞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한 것처럼, '우리 나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 

나는 그렇게 읽습니다. 끝.

*한강의 작품 읽기에 함께 동참해주신 제제다사님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늘샘 숙배^^

편집 : 김상천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편집위원

김상천 객원편집위원  critick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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