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의 의미로 ‘ㅣ’ 모음 역행 동화를 겪은 ‘애기’를 쓰는 경우가 있으나, ‘아기’만 표준어로 삼는다.”
‘애기’의 사전 풀이다.
‘애기’를 한낱 「방언」으로 몰아세우면서, 표준말 ‘아기’를 사용하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방언」은 ‘지방말’, ‘시골말’, ‘사투리’를 말한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를 한자말로 와어(訛語)라고 풀이해 놓았다는 것이다. ‘와(訛)’자는 ‘그릇되다’, ‘잘못되다’, ‘거짓되다’, ‘속이다’는 뜻을 지닌 말이다. 그러니, ‘애기’는 ‘그릇되고 잘못되고 남을 속이려는 거짓된 말’이므로 사용하지 말라는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 사람들이 어디 그런가?
우리 사전에는 ‘애기가래’, ‘애기가뢰’, ‘애기가지별꽃’, ‘애기고추잠자리’, ‘애기나리’, ‘큰애기나리’, ‘금강애기나리’, ‘애기고추나물’, ‘애기똥풀’, ‘뉘애기(뉘집애기)’ 등 적어도 ‘애기로 시작하는 말’이 231개, ‘애기로 끝나는 말’이 73개가 나온다. 따라서 ‘한글맞춤법’이나 ‘표준어 규정’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애기’는 우리네 입말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가운데 딸애기(제주), 애기구덕(제주), 애기과자(북한어), 애기단풍(경남), 껄뚱애기(충북. ▶아이들이 어린 아기와 같은 행동을 할 때에, 안아 주거나 엉덩이를 토닥거리면서 귀엽게 이르는 말) 등은 특정 지방말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며늘애기•메늘애기(▶며느리를 귀엽게 이르는 말), 얼뚱애기(▶둥둥 얼러 주고 싶은 재롱스러운 아기), 큰애기(▶처녀), 갓난애기(깟난애기), 시애기(▶시부모가 새 며느리를 친근하게 이르는 말. 새아기), 상순애기(上筍애기. ▶식물의 기본 줄기 제일 꼭대기에 새로 돋아난 어린줄기) 등 대부분은 ‘방언’으로 분류해 놓았다.
얼토당토않은 짓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고 했다. 사랑스럽고 탐스러운 ‘애기’를 왜 사투리로 둔갑시켰는가? ‘아기’가 문제가 아니다. ‘아이’는 ‘아이’요, ‘아기’는 ‘아기’다. 마찬가지로 ‘애기’는 ‘애기’다. ‘애기’는 ‘애기’대로 냅두라. ‘애기’는 사투리가 아니다. 우리 고유의 정취가 흠뻑 밴 토속어이다.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
‘표준어 규정’ 제1부 표준어 사정 원칙, 제1장 총칙, 제1항이다.
‘지방말’의 상대어는 ‘중앙말’이고, ‘시골말’의 상대어는 ‘도시어’다. 그렇다면 본 규정에 따라 우리는 ‘서울’이 곧 ‘중앙’이고, 서울만 ‘도시’라는 말이 된다. 또 ‘사투리’는 ‘교양 없는 사람들이 쓰는 시골말’이다.
한편, ‘교양’이란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말한다. 그래서 그 잘난 ‘서울양반’들은 걸핏하면 ‘시골촌놈’ 윽박지르고, ‘지방방송’ 끄라고 다그치는가?
하물며 누구처럼 아무데서나 영어를 섞어서 씨부렁거려야 교양이 철철 넘치는 지식인인가? 그런 자들이 대중 앞에서 표를 달라고 호소하니 참으로 딱하다. 도찐개찐이다. 그에 앞서 우리말의 말맛은커녕 말뜻조차 모르면서 덩달아 박수하고 손을 내미는 자들 또한 딱하긴 마찬가지다.
그게 아니라면, 지방 대학을 ‘지잡대’로 비하하고, 고향말을 터부로 여긴 나머지 대놓고 증오의 언어까지 남용할 수는 없다. 즉, 스스럼없이 특정 지역의 말투를 섞어서 비어, 속어, 은어를 남발하고, 어떤 질병•형편•생김새까지 특정하여 ‘새끼따령’을 일삼고 있지 않은가.
한걸음 더 나아가 시골은 천민 집단이 모여 사는 '부라쿠(部落, 부락)'로 조롱하고, 시골 사람을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취급하여 손톱 밑 세균덩어리쯤으로 여기는 게 아닐까?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숫백성을 ‘개돼지’로 매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너나없이 있는 것 없는 것 탈탈 털어 고향 떠나 서울로 몰려드는 바람에 지방에는 ‘애기들’이 사라지고, 도서 벽지 학교는 이미 오래 전에 폐교로 방치돼 있다. 자연스레 지방 공동화(地方空洞化)가 가속되어 국가 공무원 공채 시험에 그 지방 사람을 채용한다나 어쩐다나.
그러다보니 있는 놈 없는 놈 수소문해서 고향 사람 찾아 줄을 서고, 본적을 고쳐서 고향을 세탁하고, 입말을 숨기고 어쭙잖은 서울말을 쓰려는 거지. 그래서 대한민국은 서울민국이 되고, 나 같은 촌무지렁이는 서울에서 30여 년 살고도 바우지 못한 채 일산으로 이사했다.
오메, 같잖은 것들!
그 밥에 그 나물인걸 누굴 탓하랴?
갓 쓰고 넥타이를 매도 할 말이야 있겠지, 뭐.
편집: 박춘근 편집위원,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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