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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 속았수다‘ 최근에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가족 드라마다. 남편은 순애보를 쓰며 첫사랑 아내를 지키고 가족을 돌봤다. 그의 다른 이름은 ‘무쇠’ 어지간한 공격에 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온도를 측정할 수 없는 화력으로 달궈대도 더 뜨겁고 더 강해진다. 무쇠같은 남자지만 열 살부터 가슴팍에 들어앉은 첫 사랑 아내한테는 한없이 부드럽고 약하다. 어르신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나이의 자존심이 아내를 지키고 가족을 돌보는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한 후에는 내내 그리 살아왔다. 한평생 불사른 몸은 이제 지쳐 혼자 옆으로 누울 수도 없게 됐지만 96년의 시간이 세상의 역사에 작은 점하나 찍고, 가족의 역사는 큰 강으로 흘러 바다에 도착한다. 그래서 돌아온 승전병이 되었다. 노쇠한 몸은 패잔병이 아니라, 전장에서 살아돌아온 승전병이 되었다. |
■ 청산장, 용산장의 애기 나무꾼
이원면 강청리에서 9남매의 여덟 번째로 태어났지만, 형님과 누나들은 이미 홍역과 알 수 없는 경끼로 세 분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6남매가 손바닥만한 방에서 다리 한번 제대로 뻗지 못하고 자랐지만, 싸움한 번 하지 않고 그렇게 하나둘 성장했다. 자다가 몸 한번 뒤집으려면 형님 가슴팍을 밀어내야 하고 동생 다리에 내 다리를 덥석 올려야해서 어느새인가 몸이 알았던지 잠꼬대 한번 없이, 몸부림 한번 없이 우리는 그렇게 또 얌전히 잠들었다.
하코방에 여섯 명이 자야하는 야박한 현실을 우리 몸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생각하면 가련하지. 알아서 주눅이 든다는 건 처량했지만 그렇게 다들 착했다. 없이 살 때는 가족들이 착하기라도 해야 그 시절을 견뎌낼 수 있다. 때 거리도 없는 집에서 치고 박고 고성이 오가면 부모는 무슨 낙으로 살아낼것인가.
지금은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이씨 어머니는 천성이 순해서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던 분이다. 그 90년 전의 이야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니 인간의 뇌는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그래서 사람이 할 일을 로봇이 하는 시대를 만들었나보다. 세상은 무섭게 발전하지만 오히려 전보다 더 어수선한 것 같아 인생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건 우리 몫이 아닌 듯 하다. 그저 순리대로 흘러가는 거, 그게 우리에게 남겨진 작은 몫이다.
형제 간에 다툼도, 뺏어먹고 나눠 먹을 것이 있어야 니너 내거 따지겠지만 양푼에 보리밥 비벼서 열무김치 하나 얹어 먹고 물에 풀어서 끓여 먹던 칼국수로 배 채우던 형편은 서로 다툴 일이 없다. 뺏어올 게 있어야 다투기라도 하지. 그저 숨소리나 내면서 살던 때였다. 아무것도 나눌 것이 없고 욕심 낼 수도 없던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은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하면 그것으로 족하던 때다. 남들은 복숭아 농사도 짓고 먹거리 갖고 형제들이 다툼하던 때 우리 집은 다툴거리도 없어서 식구들이 반토막이 되어서 살아야했다.
나는 형님따라 남동생과 함께 영동으로 가서 나무짐을 해서 장에 내다 팔았다. 용산면 산저리 다 쓰러져가는 집에 3형제가 살면서 용산장에 내가 팔면 그래도 장날이면 손에 몇푼씩 쥐어지고 형님께 다 갖다 드렸다. 청산장, 용산장 뿐 아니라 다른 장날도 나무 짐을 묶어서 내다 팔았다. 형님한테 배운대로 있는 힘껏 조이고 야무지게 꽉 묶어서 우리 형제들이 내다파는 나무가 실하고 알토란 같다고 다들 우리를 찾았다.
■ 착한 사람들이 닦는 선량한 길
세상은 변해서 우리 곁에서 나무를 팔던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를 뜨고 우리도 결국 다른 일자리를 찾게 되었다. 애기 나무꾼이었지만, 나의 고사리 같은 손, 형님의 순박한 눈빛 덕분에 우리는 나무해서 돈을 조금 만질 수 있었다. 그 몇 푼 밖에 안되는 돈이 사람의 기를 살리고 한번 살아보자 주먹도 불끈 쥐게 했다.
부모 잘 만난 친구들이 학교에 다닐 때 나는 부모 슬하는 커녕 형님 밑에서 겨우 밥술이나 뜨면서 일을 배우고 하루살이 같은 날들이었지만 아버지 같은 형님이 나의 든든한 그늘이었다.부모 노릇도 제대로 못한다고 늘 조바심내던 어머니, 형님이 계셔서 입성 초라하고 먹거리 제대로 챙기지 못했지만 우리는 또 그렇게 살아냈다. 쭈글쭈글한 광목바지에 얼굴에는 때국물이 주루륵 흘렀지만 우리 형제들 순박한 눈빛만큼은 거짓이 없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을 맞고 숨 좀 돌릴까 했더니 다시 동네가 벌집 쑤셔놓은 듯이 정신이 없었다. 전쟁이 났다. 집안에 가산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소리에 다들 짐보따리 하나씩 들고 구미로 내려갔다. 형님과 셋이 살고 있었고 이원 집에는 식구들이 살고 있어서 우리는 따로 피란행렬에 몸을 실었다. 내려가면서 빈집이 보이면 들어가서 땅속에 뭐라도 있나 두더지처럼 뒤져서 그날그날 연명했다.
배고플 때 어느 집 부엌에 들어갔더니 된장국이며 밥이 그릇에 절반 정도씩 남아 있었다. 분명 먹고 남은 밥상인데 종개기에 밥이며 반찬들이 절반씩 깨끗하게 담겨 있었다. 짐작컨데 인심좋은 피란민이 혹시 몸이라도 불편한 사람이 오면 바로 밥 먹으라고 차려놓은 것이 분명했다.
인생은 굳이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기운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세상의 이치가 있다. 바로 선량한 사람들의 발자국이다. 나도 밥상에 뭐라도 올려놓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집에서 가져간 작은 이불하나를 냇가에 가서 발로 질근질근 밟아서 빨고 집 담벼락에 넣어두었다.
전쟁중이었지만 선선한 바람이 이불 위를 오가고 쨍쨍한 햇살은 여느 날처럼 눈부셔서 이불을 한 나절에 잘 말랐다. 밤 기온이 내려갈 때 누군가 와서 덥고 잠시 눈이라도 붙이면 다행이지 않을까 싶은 마음 하나였다. 내가 받은 온정을 되갚는 마음이라 가난하지만 착한 사람들은 그렇게 선량한 길을 만들어갔다.
■ 죽을 고비 한두 번은 인생의 감초
여름 난리 때 피란길 또랑에서 물을 퍼서 먹고 새벽에 창자가 끊어질 듯이 배가 아파서 악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밤새 토하고 기진맥진 숨도 제대로 못쉴 만큼 복통이 멈추지 않아서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라고 속으로 되내이던 때가 있었다. 피란길에 병원이 있기를 하나 약이라도 지어먹을수가 있나. 그저 숨만 깔딱거리며 쉬고 며칠을 배를 끌어안고 뒹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아마 식중독이었던 같다. 위아래로 속에 남은 것을 다 토해내고 나서야 겨우 살아났다. 모질게 살다보면 어지간한건 알아서 우리를 피해간다.
며칠 복통에 시달려서 얼굴이 반쪽이 되고 겨우 가라앉았다. 그렇게 사람은 또 살아졌다. 아마 피란길 논두렁 밭두렁에 쓰러져있던 시체들도 나처럼 며칠 내내 앓다가 저승사자가 목숨을 거둬간 경우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나는 90살 넘어서까지 오래 살라고 그 난리통에 액땜을 크게 한 모양이다. 겨울 난리까지 구미에 있다가 다시 영동에 올라와보니 집안꼴이 말이 아니었다. 인민군이 뒤졌는지 피란민이 뒤졌는지 집안에 가재도구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다.
세상이 차츰 변하면서 우리는 장날 나무꾼노릇을 못하게 됐다. 형님이 미장일을 하면서 장가들고 우리는 형수님과 같이 살게 되었다. 어려서 형님과 따로 나와서 살다보니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웠는데 형수님은 천사같은 분이었다. 묘금리에서 시집오셨는데 다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형수님은 말씨가 너무 젊잖으셔서 형수님 말 한마디에 우리는 상전이 되곤 했다.
“도련님, 도련님 이것좀 드셔보세요” 그 말이 뭐라고 으쓱해졌다. 무 장아찌하나라도 혀에 착착 감기게 만들어주시는 형수님의 손맛이 일품이라 우리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기를 펴고 살 수 있었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지성 드려주고 맛있는 음식을 정성스럽게 밥상 위에 올려준다는 건 천군만마와 다를 게 없다. 새벽 뒷곁에서 물 떠놓고 우리 형제들 위해서 치성드리던 형수님의 뒷모습을 보고 힘이 생겼다. 선량한 사람들이 닦아놓은 길위에서 착하게 살아올 수 있었다.
■ 남 사는 것처럼 나도 살아보자
형님 그늘에서 내내 있을 수 없어서 나도 독립된 나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왜관 미군 부대에 운전수로 일하면서 주방 음식도 배달하고 성실한 최군으로 자리를 잡았다. 어느날 월급 계산을 확인하러 사무실에 들렀다가 경리 아가씨를 처음으로 보게되었다.
봉투로 받았던 월급이라 경리 아가씨 볼 기회가 없었는데 그날은 사무실에 갔다가 쿵쾅거리는 심장소리에 내가 뜨끔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내 심장소리가 연신 울려대고 있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실감하고 말았다. 심장이 울려대서 일만 급히 보고 나왔는데 잠자리에서도 천장에 아가씨 얼굴만 보이고 아침에 일어나서 빨리 출근하고 싶어서 동도 트기전에 치 시동을 켜고 회사에 갔다.
사실 같은 사무실이 아니라 얼굴을 볼 수도 없지만 그녀가 근무하는 부대 하늘아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며칠 후 우연히 만났을 때 눈웃음에 초코렛까지 주니 이거원 촌놈이 마음이 풍선만해져서 매일 구름 위를 나는 기분이었다. 애기 나무꾼으로 시작해서 형님 슬하에서 먹고사느라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여유를 누려본 적이 꿈에도 없었다.
여성을 만나고 사랑의 감정을 느껴봤을 때 아 이게 사람사는 거구나 라고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스물여덟 살이 되어서야...산다는건 그렇게 처절한 것이다. 앞만 보고 살던 나에게 사람의 심장소리를 듣게 해준 아내였다. 내가 먼저 결혼하자고 용기를 냈고 아내가 인기가 많아서 나는 결혼하고 아내를 집안 살림만 하게 했다. 그리고 그 당시는 결혼한 여자는 집에서 살림하는 게 사회적인 약속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는 야무지게 살림하고 근무하면서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우리는 본가가 있던 이원집을 보수하고 식구들이 모여 살았다. 복숭아 농사를 가족 농사로 크게 하다가 다들 형제들이 자기의 길을 가게 됐다. 막내 동생은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3년간 일하고 돈을 벌어서 서울에 집을 샀다. 나는 운전 일을 계속하면서 중장비 일을 하고 여동생들도 처녀때는 방직공장에도 다니면서 고생했지만 다들 시집가서 잘 살고 있다. 부모의 비빌 언덕이 일천했고 배운 것이 없었지만 우리는 성실했고 다정했다. 그게 우리를 바닥에서 평지까지 오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다.
■ 자연에 순응하는 법
운전 일을 30년 정도 하고 틈틈이 모아두었던 땅들이 세월지나면서 돈을 조금씩 물어와서 환갑 지나고부터 먹고 살려고 일하지는 않았다. 간간이 용역일도 해주었지만 지인들 사업에 도움을 주는 정도였고, 용돈 벌어서 손주들 사탕 사주려고 마냥 놀지는 않았다.
우리 4남매도 우리 못 배운 것 한이 돼서 다 대전으로 청주로 보내서 대학까지 다 가르쳤다.
다들 사회에서 한 자리씩 하고 부모 체면도 세웠다.
나도 아내 먼저 먼 여행 떠나보내고 딸들이 나를 챙기느라 서울 딸네 집에도 가서 살았다.
아이들 마음이 지극정성이라 고마웠지만 내심 불편한 건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가 없었다.
자식 위해 살았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았는데 자식이 나를 돌보는 건 왜 당연하지 않고 고마운지...혼자 내려와 잠시 돌보는 사람을 쓰면서 살았지만 이제 기력이 없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나이들어 순서처럼 밟고 있는 인생의 행보들이 누군가의 눈에 처량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미 백 년을 향해 살아가고 있다. 뭐가 두렵고 아쉬울까. 그저 하루하루가 인생의 덤이라 새 아침이 주어지면 감사하고 어느날 홀연히 아내가 떠난 그 길을 나도 따라간다한들 아쉬울게 없다.
그리운 사람들이 먼저 가서 살고 있는 곳에 가서 그들을 만날 수 있다면 감사할 뿐이지.
아내와 합장하기로 약속을 했고 유난히 뜨거운 걸 무서워해서 밥상 차릴 때 뜨거운 찌개도 내가 얹어놓았던 기억 때문에 아내는 납골당에 안치하지 않고 선산에 매장을 했다. 잘 자고 있을 것이다. 물론 뼈만 남았겠지만 나는 언제일지 모를 그날에 홀연히 아내를 만나러 떠나면 된다.
그러면 뼛조각만 남은 아내와 나는 서로를 금방 알아볼 것이다. 아이들이 조금 고생하더라도 선산에 나를 묻어주면 내 인생 바랄 것이 없다.
평생을 개미처럼 일하고 허리띠를 졸라맸다. 나이들어 고생하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살았다. 지금 90이 넘어 거동을 못하는 때가 도래했지만 여한히 없다. 요양병원에 기거하는 내 삶이 초라하지 않은 건 거짓말 한 번 해보지 않았던 내 인생이 가엽기도 하지만 대견하다. 80이 넘으면 부부가 살던 집도 여자 혼자 남아 집을 지키는 게 다반사인데 우리 부부 90년을 같이 살았고 3년 전에 먼저 떠난 아내도 우리는 70년 가까이 살갑게 인정을 나눴다.
남의 집 살이하면서 애기 나무꾼이던 내가 이제 잘 쌓아온 인생의 성을 지그시 바라보며 다가올 그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먼저간 아내에게도 부끄럽지 않았고 남아 있을 자녀들에게도 부끄럽지 않다. 비록 몸은 쇠락했지만, 인생의 패잔병이 아닌 인생의 망망대해를 거슬러오느라 지쳤지만 살만한 날들이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승전병으로 남게 되었다.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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