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1년 정대수 군북면
100년 된 부모님의 집은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손만 까딱하면 지붕이 무너지고 처마 밑에 황토 흙도 주르륵 흘러내릴 지경이다. 다 쓰러져가는 집 마루에 100살이 가까운 자개장이 돼지 목에 진주처럼 들앉아 있다. 이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던 그 집과 이별을 고하려 한다. 100년이 넘은 집.
지킬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래보지만, 한동안 착잡한 마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형제들과 한방에서 여덟 명이 한 이불 덮고 자던 그 방도 이제 흔적 없이 사라져야 할 때다. 다락방에서 아버님의 오래된 사진을 보물처럼 찾았고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갖고 오셨던 자개장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었다. 세월 속에서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흔적은 남아 자식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 새 둥지 같았던 유년의 초가집
오랜만에 제비를 보았다. 한창 우리가 살던 집을 뜯고 있는데 처마밑에 제비들이 둥지를 틀었다. 주둥이로 무어라 말을 하면서 먹이를 찾고 있는데 얼마 만에 보는 녀석들인지. 어린 시절 초봄 어느 날이면 늘 그 자리에 둥지를 틀고 새끼들을 돌보던 제비들이 어린 우리들에게 볼거리였는데 이제 제비라는 말을 입에 떠올려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세월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앗아가지만, 오랜 추억들까지 빼앗아가는 야속한 존재다.
대대로 가난한 집이라 학교 다닐 때도 도시락 한번 제대로 싸가지 못했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칼국수, 수제비가 그나마 배불리 먹을 수 있던 음식이었다.
지금처럼 요란한 육수를 내서 만든 음식이 아니다. 과거 아내가 차리는 밥상을 보면 온갖 육수를 다 만들어서 국수를 내어놓으니 맛이 없을 리가 없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식감.
어머니의 국물은 담백하고 구수했는데 아내가 차려준 요란한 음식은 맛있지만 담백하지 않았다. 내 입맛이 변했을까 싶지만 유추해보니 어머니의 손맛과 아내의 손맛은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나이 70을 훌쩍 넘어 할아버지는 됐지만, 아직도 노인 소리는 듣지 않는 나이다. 우리 어릴 때 칠십 대 할아버지는 마을에서도 보기 드문 장수 어르신이었는데 지금 칠십 대는 마음은 청춘이라 손주들이 불러주는 할아버지 호칭 외에는 거절하고 싶다. 아버님은 사촌형님의 땅에서 소작일을 했고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면서 우리를 키우셨는데 어머니는 늘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당신이 못나서 8남매 제대로 입히고 먹이지 못했다고 한탄하셨는데 그 당시 시골 살이가 다들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모님은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었지만 천성이 순한 분들이라 큰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다정하게 사셨다. 두 분의 사이좋은 모습이 나에게는 사실 자랑이었다.
술 주정하는 아버지들, 큰 소리로 푸념하는 어머니들의 한숨소리가 연일 끊이지 않던 때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형제들 간에도 소리한 번 크게 내지른 일이 없었다.
어려울 때 서로 위로하는 게 제 살 깎아 먹지 않는 길이다.
■ 중학교 졸업장들고 일찌감치 사회로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던 중학교 졸업장. 돈 벌고 싶었고 잘살고 싶었다. 방법이 없어 몸부림쳤지만 열일곱 살 촌놈한테 주어지는 기회는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고향 증약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막걸리 양조장을 크게 하는 집도 있었고 천석꾼도 있었지만 그건 그저 남의 집 일이었다. 우리는 그저 배곯아 가면서 하루하루 버틸 뿐이었다. 옥천중학교도 겨우 졸업하고 대전으로 나가서 일자리를 찾았다. 동네 친구들의 절반 정도는 그래도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나는 교복 입고 학교 다닐 처지가 못 돼서 분수에 맞게, 형편대로 살아야 했다.
대전의 인쇄거리에 갔다가 창문에 ‘직원구함’ 이라는 네 글자를 보고 무작정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가슴이 쿵쾅거렸는데 인상 좋은 사장님이 얼굴 솜털 뽀송한 내 얼굴을 보더니 내가 인쇄물 맡기러 온 손님은 아닌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일자리 찾고 있냐고 먼저 운을 물어봐 주셨다.
어리버리한 촌놈이 들어와서 겁먹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사주쟁이 아니어도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먼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주시니 그저 감사했고 내 나이가 아직 어려서 허드렛일부터 해야 한다고 하셨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바닥 청소부터 시작했다. 제법 큰 인쇄소라 일하는 형님, 누나들이 십여 명이 되었다. 나는 심부름을 재빨리 하고 무조건 인사를 잘했다. 웃은 얼굴에 침 못뱉고 인사 잘하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 허드렛일 하는 직원으로 들어가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비빌언덕이 없을 때는 그저 열심히 하는 거 외에는 답이 없다.
그래도 인쇄소가 호황이던 때라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었다.
하지만 먹고 사는데서 그치면 연로한 어머니와 동생들은 어떻게 챙길 것인지.
형님들은 청주에 나가서 결혼한 후라 다들 자기 밥벌이를 하고 있었고 가족을 챙겨야 해서 고향 식구들 건사가 내 몫이 되었다. 셋째 아들이었지만 서열을 따질 일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먼저 어머니를 돌보고 동생을 가르쳐야 했다.
나는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지만, 동생들까지 중학교 졸업장으로 세상에 나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희생이 아니라 동생들한테 형으로, 오빠로 책임져야 할 사명이었다.
■ 비빌언덕이 없을 때는 그저 성실 외에는 답이 없다
아침이면 남들 8시에 출근할 때 나혼자 7시에 출근해서 사장님이 보시는 4개 일간지를 제목만 본다고 하다가 어쩌다보니 신문지를 넘겨 다음 장을 읽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접힌 부분을 다시 그대로 접어서 각도까지 맞춰서 사장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다가 또 뉴스가 궁금하고 세상 돌아가는 게 알고 싶어서 살짝 펼쳐서 읽고 반듯하게 접어 두기를 반복하면서 신문들을 일일이 보기 시작했다. 먼저 보고 그대로 잘 접어둔다고 했지만 사장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처음 접힌대로 잘 접어두었지만 누군가의 손길이 먼저 탄 것을 왜 모르시겠는가.
내가 신문을 보고 신문 내용을 공책에 적고 있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계셨다. 고마운 분이다.
당시 급여가 2만 원 정도 됐는데 사장님이 두 달째부터 3만 원을 봉투에 넣어주셔서 잘 못 들어왔다고 고백을 하기도 했다. 사장님이 “대수야, 너무 깨끗한 물에도 고기도 못산다 적당히 넘어가는 것도 처세야”
라고 하시면서 고지식한 나의 성격에 일침을 가해주셨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이나 태생이 변하기는 어렵다.
어머니께서 늘 없는 집이라 너희들은 나가서 거짓말하지 말고 친구들과 다투어도 안된다고 아침저녁으로 우리한테 들려주셨다. 세상은 그렇게 사는 게 답인 줄 알고 인쇄소에서도 그저 정직하고 근면하게 생활했다. 요령을 피울 줄 몰라서 다른 처세 방법을 찾을 수도 없었다.
50년 전의 나의 모습을 후회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게 사장님께 일을 배우고 사장님의 권유로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하게 되었다.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고등학교 졸업을 인정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으니 무시당하지는 않았다. 중학교 졸업장으로는 세상에 나가 할만한 일도 없었다. 인쇄소에서 일하면서 어느덧 군대에 가게 되었다. 경기도 연천으로 군대 다녀오고 제대 후에 다시 인쇄소에 들어갔다. 사장님이 입소하는 날까지 오셔서 휴가 나오면 꼭 들리라고 신신당부하셨다.
휴가 나올 때는 인쇄소에 꼭 들렸다. 사장님이 용돈도 주시고 사모님이 떡을 해주셔서 부대에 갖고 가기도 했다. 낳아주신 부모님은 아니지만 키워주신 부모님 같은 분들이었다.
그래도 세상이 살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은인들이다. 그 사랑을 받아봐서 나 역시 손해 좀 보더라도 인정을 베푸는 사람으로 살고자 내내 마음먹고 그리 살아왔다.
제대하고 다시 인쇄소에서 일하면서 인쇄소 운영에 관한 업무도 나에게 맡겨주셨다.
거래처에서도 나를 믿고 일을 맡겨 주셨다. 나를 믿어주는 이에게는 충성하고 싶었다. 아버지처럼 모시고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믿고 의지했는데 내 나이 서른 즈음에 사장님이 50살 이셨을 때 간암 진단을 받았다. 지금은 암이 바로 사망은 아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암은 바로 죽음과도 같은 충격이었고 치료하는 과정에 가산을 탕진하는 예가 흔했다.
사장님도 위암이 발병하고 4키로 정도 암덩어리를 떼어 내셨다. 그리고 2년 간의 투병생활을 거친 후에 건장했던 분이 뼈만 남은 채로 돌아가시는 걸 목격하고 충격과 슬픔에 빠져 한동안 너무 힘들었다.
그 즈음에 고향에 계신 어머님도 당뇨 합병증으로 돌아가시면서 내 인생에 큰 의지가 되었던 두 분을 선산에 묻고 내려오는 길은 너무 참담했다.
인쇄소 사모님이 나에게 일을 도와달라고 하셔서 부장님과 둘이서 인쇄소 운영에 관여했다.
이후로 인쇄기술도 배우고 거래처 관리도 하면서 30여 년을 인쇄소에서 일했다.
거래처 여직원이었던 아내와 결혼까지 했으니 내 인생에 훌륭한 효자였다.
사람사는 인정을 알게 해준 사장님 그리고 내 인생의 동반자이자 은인인 아내까지 만났으니 무엇을 더 바랄까.
워낙 없는 집 아들이라 아내의 부모님 반대가 심했지만, 인쇄소 사장님이 아들같은 녀석이라고 믿고 받아주라고 나서주셔서 결혼 승낙까지 무사히 받았다. 운명같은 인연이 있다는 걸 사장님을 통해 알게 됐다. 사장님에게 신뢰를 주었던 나의 성실한 태도가 사장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면 우리 소시민들에게 성실만큼 큰 무기가 없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대전에서 인쇄소 일을 30년 정도 하고 문구 도매상도 20년 정도 했었다. 한번 시작하면 20년 기본으로 했고 큰 돈을 벌지 못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 없을 만큼 손님들에게 인정 받았다. 우리 3남매에게 큰 유산을 물려줄 형편은 못되지만 화목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손주들까지 다들 천성이 착한 아이들이 내 인생의 훈장이다. 세상사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어서인지 칠순 지나면서 아내가 다시 암에 걸려서 3년간 투병하다 작년에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났다.
지금의 나는 사실 고독하다. 아마도 아내의 빈자리가 아직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고향마을에 와서 부모님 집을 정리하다보니 내 인생의 흔적을 지우는 것 같아 아련한 추억들이 조금은 아프
다. 부모님도 떠나고 아내도 떠나고 나도 언젠가는 또 자식들을 뒤로 하고 떠나겠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열심히 살았고 정직했지만 조금은 쓸쓸한 노년이 되어 아쉬움은 있다. 인생은 대단한 무엇을 채워 넣어도 우리 인생을 꽉 차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히려 겸손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인생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공식과 만나게 된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 공식에 어긋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과 적당한 타협보다는 개미처럼 하루하루 허투루 살지 않는 정도, 그 길을 걷는 것이 오히려 인생의 굴곡에 맞서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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