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사 인물 연구의 빈곤과 '육삼정 의거'

육삼정 음식점이 있었던 공간으로 지금 건물은 해방 이후 지어진 건물임(출처 : 독립기념관,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16. 225쪽)
육삼정 음식점이 있었던 공간으로 지금 건물은 해방 이후 지어진 건물임(출처 : 독립기념관,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16. 225쪽)

'육삼정 의거'(1933. 3)는 이봉창 의거(1932. 1), 윤봉길 의거(1932. 4)와 함께 독립운동사를 대표하는 해외 3대 의거입니다. 윤봉길 의거는 성공한 장쾌한 거사였고 이봉창 의거는 거사를 실행했으나 히로히토를 폭살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육삼정 의거'는 아예 거사를 실행하기도 전에 실패했지요. 그러함에도 '육삼정 의거'가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빛나는 이유는 직접 폭력 투쟁으로 일관한 아나키즘 계열 항일독립운동사의 최고 정점에서 빚어낸 의열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밀양시 소재 의열기념관 전경(출처 : 하성환) 의열기념관 근처 의열거리에는 김원봉을 비롯해 박차정, 윤세주 벽화가 있다.
밀양시 소재 의열기념관 전경(출처 : 하성환) 의열기념관 근처 의열거리에는 김원봉을 비롯해 박차정, 윤세주 벽화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민중 직접 폭력 투쟁’으로 의열 투쟁을 본격화한 것은 1919년 11월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이 그 시작입니다. 1920년대 전반기에만 300명이 넘는 의열단원들이 목숨을 잃는 치열한 투쟁이었습니다.(주1 그러다 1925년을 전후로 국내에서도 코뮤니즘 운동이 항일독립운동의 대세를 이룹니다. 그 이전 이른바 자치운동을 표방한 20년대 민족 개량주의자들은 일제에 타협하며 변절합니다. 일제에 타협 투항한 대표 사례로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을 발간하다 운동을 청산한 채 1921년 귀국한 이광수의 친일 행보가 있습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운동은 30년대에 들어서서 일제의 노골적인 탄압으로 명맥조차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합니다. 1937년 중일전쟁 직후 민족주의 항일운동은 온데간데없고 대부분 친일로 돌아서는 게 역사의 진실입니다.

민족주의 계열 독립지사들은 1922년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전개합니다. 일제의 우민화 정책에 맞서 조선에 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일선공학제를 표방하며 경성제국대학(해방 후 서울대학교)을 설립합니다. 그 결과 입학생 절반이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은 민립대학 설립 운동의 취지를 단칼에 무질러버립니다. 우리가 흔히 30년대 항일독립운동으로 기억하는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1929-1931)과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1931-1934)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일제의 허락하에 진행되다가 30년대 중반 일제의 불허 방침으로 사라진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입니다.

그러나 아나키즘 운동과 코뮤니즘 운동은 다릅니다. 일제와 대부분 타협하지 않았고 독자 노선을 걷습니다. 심지어 아나키즘과 코뮤니즘 간 갈등과 충돌, 그리고 상호 적대적인 태도는 국내외에서 심각한 갈등으로 치닫습니다. 그만큼 아나키스트와 코뮤니스트 간 독립운동 노선 투쟁과 갈등의 골은 깊었습니다.

시야 김종진(출처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자료) 김종진은 우당 이회영의 주선으로 윈난성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과 한족총연합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코뮤니스트에게 납치, 살해되었다.  피살 당시 30세로 참으로 원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시야 김종진(출처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자료) 김종진은 우당 이회영의 주선으로 윈난성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과 한족총연합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코뮤니스트에게 납치, 살해되었다.  피살 당시 30세로 참으로 원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적이 아닌 항일 동지임에도 서로를 향해 살기를 띤 채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습니다. 대중이 기억하는 대표 사례가 아나키스트 김좌진 장군의 죽음입니다. 고려공산청년회 소속 코뮤니스트 청년 박상실이 1930년 자행한 피살 사건입니다. 아나키스트 항일독립군이자 백야 김좌진 장군(1889-1930)의 육촌 동생인 시야 김종진(1901-1931) 역시 코뮤니스트에 의해 살해됩니다.

항일 투쟁 동지임에도 코뮤니스트와 아나키스트 간 끔찍한 살육을 묘사한 장면이 있습니다. 아나키스트 항일 투사이자 ‘육삼정 의거’에 가담한 화암 정현섭의 회고록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정화암은 일제가 체포하기 위해 김원봉, 김구에 이어 현상금 액수에서 세 번째로 많았던 인물입니다.

"해림을 중심으로 한족총련지역(필자 주 : 아나키스트 본거지)과 영안현을 중심으로 공산지역은 항상 팽팽한 대결상태에 있었다. 어쩌다 잘못하여 상대방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번은 경비를 돌던 교민이 20여 세가량의 청년 공산당원을 잡아 왔다. 하얼빈 쪽에서 공산당 본거지인 영안현으로 가려면 해림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가끔 공산당원들이 해림역에서 체포되어 오는 수가 있었다. 체포되어 온 사람들은 거의 사살해 버렸다. 자루에 산 채로 묶어 넣고 다리 위에서 얼음이 언 강 위로 떨어뜨려 익사시키는 방법, 땅에 구덩이를 파고 사람을 묶어 그 구덩이에 세워놓고는 흙으로 묻어 죽이는 방법, 넓은 벌판으로 데려가 도망치게 하고는 뒤에서 총으로 쏴 죽이는 방법 등 서로가 잔인한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략) 공산당원이라고 잡혀온 그 청년도 순진하고 총명하게 생겨 아까웠다. 언제부터 공산주의자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청년을 설득하여 내 사람으로 만들어 볼 결심이었다. 그런데 내가 산시(山市)의 대표자 회의에 참석한 사이 그 청년은 사살되어 버렸다. 그 뒤에 또 한 사람이 잡혀 왔다."(주2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 등 1920년대 코뮤니즘 운동이 항일운동의 대세를 이루면서 의열단에도 독립운동 노선상의 변화를 초래합니다. 김원봉의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 들어 직접 폭력 투쟁을 접고 독립운동 노선을 수정합니다. 1920년대 직접 폭력 의열 투쟁으로 일관했던 당시 의열단은 단원 80%가 아나키스트였습니다. 그러함에도 의열단장 김원봉은 1929년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 출신 안광천과 함께 베이징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1929)을 조직하고 회보 『레닌주의』를 발행합니다. 이듬해 ‘레닌주의 정치학교’(1930-1931)를 설립하고 코뮤니스트와 연대하며 항일혁명가를 양성합니다. 코뮤니즘이 독립운동의 대세를 형성하면서 노선 변화를 겪은 김원봉과 그를 따르는 의열단원들은 경성의학전문학교(해방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를 졸업한 자혜병원 의사 출신 코뮤니스트 안광천(본명 안효구,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 역임)과 연대합니다.

조선의용대 주둔지 터 진입로(출처 : 독립기념관)
조선의용대 주둔지 터 진입로(출처 : 독립기념관)

결국 의열단 핵심 인물들(김원봉, 윤세주 등)은 개인에 의존했던 1920년대 직접 폭력 투쟁을 접고 군인을 양성해 군대를 보유한 조직적인 항일 무장투쟁으로 전환합니다. 1932년 중국 장제스의 도움으로 출발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가 바로 그렇습니다. 급기야 1938년 중국 관내 최초로 조선인 군대를 창설한 ‘조선의용대’(1938. 10. 10)의 탄생은 그런 흐름의 정점입니다. 의열단 출신 항일혁명 시인 이육사가 절친 윤세주와 함께 의열단 군관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1932) 제1기로 입교한 것 또한 그런 배경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열단의 80%를 점했던 아나키스트들 가운데 아나키즘 정신을 신념으로 간직한 아나키스트들은 군대 보유라는 조직적인 투쟁 노선에 반대합니다. 특히 민주집중제의 원리라든지 중앙집권적인 코뮤니즘 운동에 경멸을 보냅니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의 기초인 개인의 자율과 상호 부조에 기초해 수평적인 연대와 자율적인 연합을 중시하며 항일 투쟁을 지속합니다. 신념으로 아나키즘을 내면화한 아나키스트들은 개인 간 서열이나 상하 수직적인 지시와 복종의 조직체계를 경멸합니다. 다시 말해 아나키스트들은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자유연합의 정신으로 투쟁하고 무정부 공산사회를 추구’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서간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회영, 그리고 신채호, 류자명, 이을규, 원심창, 백정기, 이용준, 정현섭, 오면직, 이규창, 엄형순, 이정규, 류기석 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육삼정 의거'는 비록 실패했으나 마지막까지 아나키즘 정신에 투철한 아나키스트 투쟁의 모범 사례입니다. 그들 스스로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무정부 공산사회'를 꿈꾸면서 직접 폭력 투쟁으로 의열 투쟁을 감행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항일독립운동의 주류에서 벗어났으나 마지막까지 아나키즘 정신을 간직한 아나키스트들은 1930년대에도 자신들의 신념에 기초해 의열 투쟁을 멈추지 않고 지속했습니다. 1932년 4월 훙커우 공원 거사 역시, 김구와 달리 아나키스트들이 먼저 첩보를 입수하고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대회 장소 출입증을 구해다 준다던 중국인 아나키스트(왕야차오, 王亞樵)의 약속 미이행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상해 일본 총영사 아키라 공사 암살 시도(1933. 3) 역시 의열 투쟁의 연속선상에서 발생한 일대 거사였습니다.

충북 제천 출신 아나키스트 이용준은 육삼정 의거 당시, 거사 참여를 원했지만 정화암의 제안대로 제비뽑기에서 백정기가 당첨되면서 거사를 돕는 위치에 선다. 그는 앞서 텐진 일본영사관 건물에 폭탄을 투척했다. 2025년 3월 15일 육삼정 의거 92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분들이 여산 이용준 지사 흉상 앞에서 펼침막을 들고 기념촬영한 모습(출처 : 리학효 제천 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 제공)
충북 제천 출신 아나키스트 이용준은 육삼정 의거 당시, 거사 참여를 원했지만 정화암의 제안대로 제비뽑기에서 백정기가 당첨되면서 거사를 돕는 위치에 선다. 그는 앞서 텐진 일본영사관 건물에 폭탄을 투척했다. 2025년 3월 15일 육삼정 의거 92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분들이 여산 이용준 지사 흉상 앞에서 펼침막을 들고 기념촬영한 모습(출처 : 리학효 제천 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 제공)

생각건대 ‘육삼정 의거’(1933. 3)는 몇 개월 앞서 감행한 ‘텐진 일본영사관 폭파 사건’(1932.12)의 연속선상에서 실행한 직접 폭력 투쟁입니다.

톈진 일본 영사관 폭파(1932.12)와 상하이 아리요시 아키라 일본 공사를 폭살하려던 육삼정 의거(1933.3)에 참여한 여산 이용준(출처 : 리학효 제천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 제공)
톈진 일본 영사관 폭파(1932.12)와 상하이 아리요시 아키라 일본 공사를 폭살하려던 육삼정 의거(1933.3)에 참여한 여산 이용준(출처 : 리학효 제천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 제공)
효창공원 안에 있는 삼의사 묘(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출처 : 하성환) 맨 오른쪽에 있는 무덤이 백정기 의사 묘이다. 맨 왼쪽 가묘는  안중근 의사 유해를 중국에서 봉환했을 때를 가정해 백범 김구 선생이 임시로 낮은 봉분의 가묘를 조성해 놓았다.
효창공원 안에 있는 삼의사 묘(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출처 : 하성환) 맨 오른쪽에 있는 무덤이 백정기 의사 묘이다. 맨 왼쪽 가묘는  안중근 의사 유해를 중국에서 봉환했을 때를 가정해 백범 김구 선생이 임시로 낮은 봉분의 가묘를 조성해 놓았다.

문제는 아나키스트 항일독립운동사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텐진 일본영사관 폭파 사건’(1932.12)의 주역 이용준을 비롯해 '육삼정 의거'(1933. 3) 주역 원심창, 백정기, 이강훈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빈곤한 현실입니다.

아리요시 아키라 공사 암살 관련 흑색공포단 아나키스트 백정기  보도자료(출처 : 공훈전자사료관,1933년 11월 11일자  동아일보 )
아리요시 아키라 공사 암살 관련 흑색공포단 아나키스트 백정기 보도자료(출처 : 공훈전자사료관,1933년 11월 11일자 동아일보 )

특히 원심창(이명 원훈), 청뢰 이강훈에 비해 구파 백정기와 여산 이용준 연구는 매우 부족한 실정입니다. 끝까지 아나키즘 신념을 간직한 아나키스트들은 초지일관 직접 폭력 투쟁으로 일관했고 그들의 의열 투쟁은 오면직의 맹혈단 등 1930년대 후반까지 지속했습니다.

요컨대 '육삼정 의거'는 1920년대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한 의열 투쟁의 연속선상에서 발생한 직접 폭력 투쟁으로 20년대 의열 투쟁의 명맥을 이어 30년대 의열 투쟁으로 계승, 발화한 항일독립운동입니다. 절대다수가 훼절한 민족주의 계열이나 중앙집중의 명령 체계와 상하 지시에 충실한 코뮤니즘 운동과 달리, '육삼정 의거'는 ‘자유 평등한 개인들 간 자유연합의 정신’에 기초해 결행한 아나키스트 의열 투쟁의 순수결정체였습니다.

1937년 4월 30일 아나키스트 김지강(본명 김성수) 체포 관련 기사(출처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37년 4월 30일 아나키스트 김지강(본명 김성수) 체포 관련 기사(출처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향후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무정부 공산사회'를 꿈꾼 류자명(1894-1985, 건국훈장 애국장), 이을규(1894-1972, 건국훈장 애족장), 정현섭(1896-1981, 건국훈장 독립장), 원심창(1906-1971, 건국훈장 독립장), 이용준(1907-1946, 건국훈장 애국장), 백정기(1896-1934, 건국훈장 독립장), 이강훈(1903-2003, 건국훈장 독립장), 오면직(1894-1938, 건국훈장 독립장), 엄순봉(1906-1938, 건국훈장 독립장), 김지강(1900-1969, 건국훈장 독립장)을 필두로 재중국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 남화한인청년연맹, 흑색공포단, 맹혈단 등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사 연구가 보다 진전하고 풍성하기를 기원합니다.

<참고문헌>

주1) 님웨일즈(1986). 아리랑. 동녘. 103

주2) 정화암(1992).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17-118.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하성환 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