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5세의 막내고모 계순은 귀가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끼고도 대화가 어렵다. 우리가 종이에 글을 써서 질문하면 고모는 귀찮아하지 않고 지난 기억을 더듬어 정확하게 답을 하려고 애쓰신다. 이야기를 듣다가 중간에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고모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아 망설이게 된다.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으면 내용이 훨씬 풍부해질 텐데 필담의 한계가 고모의 아름다운 삶을 다 드러내지 못하게 한다.

열두 살에 부모를 잃고 갑자기 어른이 되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최운산 장군의 막내딸 계순은 그 모진 세월을 다 견뎌내고 70대 노인이 되어 한국으로 오셨다. 연변이 고향인 고모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한국행 보따리를 싼 것이다. 아들 둘은 중국에서 일하고 있고 엄마보다 먼저 한국에 정착한 딸 셋이 친정엄마 근처에 살면서 힘이 되어드린다. 평소 혼자서 생활하는 고모는 매일 집근처 노인복지센터에 나가서 운동도 하고 친구를 만나 소일하는 것으로 마지막 노년의 삶을 지내고 있다.

 최운산 장군의 막내딸 최계순 
 최운산 장군의 막내딸 최계순 

고모는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은 조카의 질문에 답하느라 잊었던 옛 일을 자꾸 들쳐보아야 했다. 어린 동생을 돌보며 소녀가장으로 살아야 했던 고모에게 지난 시간들은 좋았던 기억보다는 잊고 싶었던 아픈 기억들이 더 많았다.

얼마 전 고종사촌 동생이 전화를 했다. 요즘 엄마가 돌아가신 둘째 외삼촌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신다는 것이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하루아침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맨몸으로 집에서 쫓겨난 어린 남매는 비가 뚝뚝 새는 그 마을에서 가장 허름한 집에서 끼니를 걱정하며 지내야 했다. 언니들이 있었으나 몰락한 집안의 딸이 동생들을 돌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어느 날 군대에 끌려갔던 둘째 오빠 봉학이 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 궁핍한 어린 동생은 오빠의 치료는커녕 먹을 것을 구할 수도 없었다. 병든 몸으로 굶주리던 봉학삼촌은 오래 버티지 못하셨다. 죽어가는 오빠에게 밥 한 끼 제대로 해줄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아픔이 계순고모에게 아직도 선명한 상처로 남아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날 오빠가 너무 배가 고프다고, 국수 삶은 물이라도 좀 구해오라고 해서 국수공장에 가서 국수 삶은 국물을 한 그릇을 사다가 오빠에게 드렸다. 국수 삶은 물을 맛있게 마신 오빠는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극심한 영양실조로 그만 돌아가셨다.”  계순 고모가 전해준 봉학 삼촌의 마지막이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 일인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무장투쟁에 내어준 간도 제일의 거부 최운산 장군의 자식들이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굶주림에 시달리며 죽어간 것이다. 

그렇게 동생의 품에서 숨진 봉학삼촌을 계순고모는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 가장 친하게 지냈던 바로 손위의 오빠, 어린 시절 학교 가는 오빠를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는 동생을 학교에 데리고 갔던 착한 오빠였다. 얌전하게 근처에 있겠다고 약속을 하고 따라갔지만 장난꾸러기 계순이 선생님한테 엉뚱한 장난을 쳤고, 선생님께 봉학오빠가 알려준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단다. 학교에서 오빠를 골탕먹이고 창피하게 했던 유년의 꿈같은 기억을 함께 가진 그리운 오빠였다.

선생님께 혼이나고 두 번 다시 학교에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나이에 비해 의젓했던 작은오빠는 늘 여동생 계순을 먼저 챙겼고, 나무상자로 된 틀에 모래 넣고 흔들어 가며 글씨를 쓰고 지우며 놀이처럼 동생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 창립식에서 게순 고모와 호석삼촌으로 모시고

고모는 아버지 최운산장군의 삶이 역사의 문을 열고 나오고 있다는 설렘을 감추지 않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전해주려 했다. 최운산장군의 역사가 복원된다면, 그 꿈같은 일이 이루어진다면 최운산장군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온 일생을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던 일곱 남매의 삶에도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기쁨과 함께 어린 시절 너무도 허망하게 저 세상으로 보내버린 작은오빠가 자꾸 마음 안에 되살아나서 그렇게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봉오동 근처 도문시에는 최운산 장군의 친구였던 의사 김주경씨가 살고 있었다. 최운산 장군이 돌아가셨다는 것과 그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어느 날 둘째 영옥을 만나 동생 계순을 병원으로 보내라고 일렀다. 다음날 병원을 찾아간 계순에게 병원장이었던 그는 내일부터 병원에 나와서 일하라고 취직을 시켜주었다. 10대 후반이었던 계순에게 일자리를 주고 당장 생활이 가능하도록 몰래 도와주려고 했던 것이다.

계순은 기쁜 마음에 자신이 일하게 된 병원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주사실에 들어갔을 때 누군가 계순을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너 혹시 최봉우의 동생이 아니냐?”고 물었다. 깜짝 놀라서 아니라고 대답한 계순은 그 길로 병원을 나와 도망쳤다. 너무 무서워 다시는 그 병원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최봉우와 한 집안 식구라는 것이 알려지기만 해도 어떤 해를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한순간도 긴장을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 둘째딸 영옥과 아들, 10대 시절의 막내 아들 호석과 막내딸 계순
▲ 둘째딸 영옥과 아들, 10대 시절의 막내 아들 호석과 막내딸 계순

6.25 전쟁이 끝난 후 큰오빠 봉우의 친구 박만홍(당시 도문시 공안국장이었다가 나중에 학교 교도주임으로 일함)씨가 계순에게 “평양방송국에서 일하던 너희 큰오빠 봉우가 전쟁 중에 없어졌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당시 평양은 미군의 폭격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아수라장이었다. 병원이나 교회도 공습에서 제외가 아니었던 참혹했던 평양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봉오동에 남아있던 형제들은 평양에 다니러가신 김성녀 여사와 오빠 가족이 전쟁 통에 모두 죽은 줄 알고 크게 상심했었다고 한다. 어느 집 친척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는 소식이 가끔 들리기는 했지만 그런 운 좋은 집보다는 폭격에 일가족이 몰살했다는 소식이 더 많이 들렸던 때였다.

그 무렵 봉오동에서는 6.25 전쟁통에 사라진 최봉우가 사실은 죽지 않았고, 남한에서 백골단을 창설해 훈련을 시키고 있으며 언젠가 자신들에게 복수하러 돌아올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어깨에 금빛견장을 단 군복을 입은 최봉우가 군사들을 모아 훈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봉오동에서 가장 높은 초모정자산의 서기를 받고 태어나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란 최운산 장군의 장남, 자신들이 행한 그 모진 고문과 매질에도 죽지 않았고, 장례나 치르라고 내보내자마자 탈출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최봉우란 인물의 생명력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최운산 장군 집안의 내력을 소상히 아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것일 테지만, 마치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전해준 것처럼 소문이 꽤 그럴듯하고 구체적인 실체를 지니고 있었다. 남은 형제들은 혹시나 그 소문으로 인해 자신들에게 해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아야 했다. 최봉우를 고문한 사람 중에 초모정자산의 기운을 받은 사람을 해치면 자신들에게 해가 미친다고 믿었던 사람이 만든 헛소문이었지만 그로 인해 남은 형제들의 생활이 더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결국 봉오동을 떠나야 했다.

계순고모가 청산을 당하지 않은 친척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도 했지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어린 호석을 데리고 사촌오빠 흥국의 집을 찾아갔을 때도 올케언니의 냉대로 하룻밤을 눈물로 지내고 떠났다. 지주의 집안이라 청산을 맞고 집에서 쫓겨나 오갈 데가 없어진 빈손의 어린 남매를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그 큰 집에 매일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적거렸는데 하루 아침에 이렇게 모두들 외면하다니 생각할수록 서럽고 고통스러웠다. 부모님이 안 계신 어린 계순에게 현실은 냉혹하기만 했다.

6.25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북한은 군관 가족들을 중국의 시골마을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공산당 간부의 가족인 둘째고모 옥순도 4살, 3살의 정애와 철호, 둘을 데리고 중국으로 피난을 갔다. 목단강 근처 산골인 팔면툰(목릉현)에서 흙집을 짓고 지게로 물을 길어 먹으면서 3년을 지내고 북한으로 돌아갔다. 피난민촌이지만 장교의 자식들이라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열었고, 옥순고모가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피난민들에게 생활비가 지급되었는데 아이들은 8원, 어른은 6원씩이었다. 매달 22원을 받았던 옥순고모는 그걸 아껴서 중국의 동생들에게 매달 10원씩 생활비를 나눠주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북한으로 돌아간 후에도 옥순은 가능한 동생들을 도와주려고 애썼다. 어느 날 두만강가로 계순을 불러내 쌀 40근을 사주고 자신이 입고 온 빨간색 코트를 벗어주고 남편의 군복코트도 한 벌 주었다. 계순은 쌀을 머리에 이고 양손에 옷 보따리를 들고 도문다리를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중간 중간 쉬어야 하는 먼 길 이었지만 머리에 인 쌀이 무거운 줄도 모르고 한나절 길을 걸어서 돌아왔다고 한다. 언니가 준 코트는 팔아서 생활비로 쓰고 군복은 뜯어서 동생 호석의 겨울옷을 만들어주었다.

▲ 한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했던 계순고모 팔순잔치, 왼쪽에 호석삼촌
▲ 한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했던 계순고모 팔순잔치, 왼쪽에 호석삼촌

고모들은 그렇게 서로 도우며 어려운 시절을 견뎌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85세의 계순고모는 이제 자신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몸이 약했는데 기대보다 훨씬 오래 살았으니 감사한 일이고, 딸들과 사위들이 모두 착해 곁에서 잘 돌봐주고 있으니 그것도 모두 다 선물이라는고 한다. 단지 죽기 전에 최운산 장군의 역사가 바로 서는 걸 보고 싶다고, 그 일을 모두 조카들한테만 맡겨놓아서 미안하다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신다. 

계순고모가 우리 곁에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힘이 되는데... 그 고통스러운 세월을 묵묵히 감당한 고모들의 당당한 삶에 감사하며 최운산 장군의 역사찾기에 더 매진하기로 다짐하는 2017년이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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