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손자들이 모여 할아버지 최운산장군의 역사를 찾아드리겠다는 다짐을 한지 꼭 1년 만인 2016년 7월 4일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창립식을 했다. 우리나라 무장독립전쟁의 상징 봉오동·청산리전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공유한 참석자 모두는 최운산 장군 삶에 깊은 감동과 감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달 후 경향신문에서 광복절 특집 기획 “봉오동·청산리 전투, 빛나는 승리 뒤에 가려진 이름 ‘최운산’” 기사가 신문의 12면 한 면 전체에 걸쳐 실렸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122049005&code=210100#csidx24e6205be4dc1cb9e16738ac0df023e

또 얼마 후 아시아경제에서 시민운동가 최성주의 배경에 독립운동가 할아버지의 삶이 있다는 기사 “봉오동·청산리 전투 '비운의 영웅' 최운산”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항일투쟁 숨은 주역 할아버지 업적 기리는 손녀 최성주씨’ 라는 부제를 붙여 나를 기사화하기도 했다.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6083009555460716 

이제 할아버지 삶이 세상에 이렇게 제 모습을 찾아간다는 감사를 드리던 어느 날, 하와이에서 살고 계신 경주 당고모 전화를 받았다.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였다. 내가 어릴 때 부산 우리 집을 한번 찾아온 적이 있었지만, 대화를 나눈 기억도,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당고모였다. 뉴욕에 살고 있는 6촌 언니를 통해 당고모가 아직 하와이에 살아 계시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미국으로 떠났고 아버지가 생전에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분이 나한테 연락할 일이 있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호놀룰루 공항 버스 정류장에서 당고모 최경주

큰할아버지 최진동 장군의 자식들 중 후처 소생의 어린 삼남매는 부모를 모두 잃고 외할머니와 함께 해방 직전인 1944년 서울로 내려왔다. 그 당고모 둘과 당숙은 어린 시절을 서울에서 보내고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그곳에서 사업에 성공하고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간혹 들었지만 우리 가족과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였기에 복순 당고모와 인국 당숙이 돌아가셨다는 소식도 한참 후에야 6촌 언니를 통해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소원한 관계였다.

최진동 장군 자식 중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85세 당고모는 50년 전쯤 나를 본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하셨다. 한참 통화를 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면서도 내가 전화를 끊어 버릴까봐 조바심하면서 통화를 이어갔다. 청력이 나쁜 분과의 대화는 힘이 들었다. 답답한 대화가 계속 오간 끝에 이해한 당고모의 결론은 당신이 죽기 전에 나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최운산 장군 업적이 재조명되는 것을 언론을 통해 알게 되었고, 나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자신은 늙고 병들어 움직이기 힘들다고 나보고 하와이로 오라는 것이었다.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당고모 요청에 나는 며칠씩 일정을 비워 외국을 방문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답을 했다. 

당시는 봉오동에 있는 증조부 산소에 비석을 세우기 위한 봉오동 방문을 한 달 앞둔 때였다. 이런저런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지난해 봉오동에 가서 봉오동 선산에 있는 증조부 묘소를 찾았고 1년여에 걸쳐 비석 건립을 추진했다. 이제 결실을 눈앞에 두고 점검 중이라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외여행 경비가 부담스러웠다. 전화 한 통화에 서로 남처럼 살아와 얼굴도 모르는 당고모를 만나러 비행기로 하와이까지 날아갈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당고모는 어린애처럼 매달렸다. 생각해보겠다고 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으나 인사치레였다. 

사실 나는 그동안 하와이에 살고 있던 당숙과 당고모가 최진동 장군의 자식답지 못하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5촌 당숙과 당고모이면 아주 가까운 사이라 할 수 있지만 너무 오랫동안 소식 없이 지낸 탓에 그분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10년에 한 번 정도 한국을 방문하는 6촌 언니를 통해 미국에서 의류사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행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바람결에 소식을 들으면서 50년의 세월이 흘렀고 아버지도 당숙도 모두 돌아가셨다. 얼마 전에야 인국 당숙이 살아계실 때 사업차 한국을 자주 방문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문득 사촌형에게 인사조차 오지 않았던 이유가 혼자서 다섯 남매를 키우는 사촌형이 혹시 경제적 도움이라도 바라지 않을까 경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그것도 그들의 문제니 별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수교가 없던 1986년, 경제적 여유가 있는 미국 국적의 최진동 장군의 후처 소생의 삼남매가 봉오동을 방문했다. 그러나 중국물정에 어두웠던 탓인지 처음 방문한 고향에서 그들은 돈 많고 무례한 사람들이었다는 이미지만을 남겨놓고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연변의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제공하면서 관계를 지속했다. 그러나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국 당숙이 계속 지원을 요청하는 연변의 지인들과 충돌했고, 그 문제는 오히려 최진동 장군의 친일 의혹으로 왜곡 확산되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당숙이 최진동 장군의 삶과 가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고 단순하게 접근했어야 한다. 안타까움이 크다.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에 계급투쟁이 극심했고 지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비판도 심해졌던 때였다. 손자와 가족들의 문제와 연결되었던 것이지만 연변에서 최진동 장군도 지주 출신이고 친일파였다는 오해가 역사계를 중심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르면서 그 오해가 정리되었고 최진동 장군의 이름이 독립운동사에서 그 중요성을 확인되기 시작하였다. 2006년 인국 당숙이 연변역사학회에 의뢰해서 최진동 장군 일대기 『최진동장군』을 발간했다.

그런데 여섯 살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본인이 알고 있는 가족사가 거의 없었던 탓인지 책의 내용을 모두 연변역사학자들에게 맡겨놓아 그 책에 실린 우리 집안 역사가 왜곡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역사와 우리 가족사의 관계를 알지 못했고, 증조할아버지 최우삼에 대해 제대로 된 자료를 제공하지 못했다. 연변 역사학자들이 중국의 시각으로 최진동 장군이란 책을 쓰도록 만든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만주지역 근대사를 접근하는 관점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책에는 증조부에 대해 조선 말기에 먹을 것을 찾아 아들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온 함경도 유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건너갔다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증조할아버지 최우삼도 그런 과정을 밟았으리라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가 농토를 개간하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증조부 최우삼은 연변 지역의 조선 사람들을 다스리던 관리 ‘道台도태’였다. 그리고 그 책에는 딸이 하나만 있다고 서술했는데 딸이 둘이었다. 증조부는 4남 2녀 자식을 두었다. 명록, 명길, 명순, 명철 4형제는 연길의 관청거리 국자가에서 태어났다.

연변학자들이 추측한 가족사 중 가장 말이 안 되는 부분은 증조부 최우삼이 중국에 귀화입적하고 중국인처럼 치발역복 했다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사실 왜곡이다. 증조부가 중국 땅에서 먹고살기 위해 변발을 했다니! 증조부가 사셨던 당시의 간도는 조선 땅이었다.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에 몰래 숨어들어간 것이 아니라 일찍부터 조선 변방 황무지를 개간해 농토를 넓혀간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간도지역 우리나라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탓에 지금은 중국에서 설명하는 대로 역사가 고착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집안 역사를 잘 모르는 당숙이 중국에서 정리해준 내용을 그대로 『최진동 장군』 책에 기록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가 연변도태 최우삼의 손자인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의 모습을 물었던 적이 있다. 아버지는는 어린 시절 품에 안겨 놀았던 증조할아버지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하셨다. 증조부 최우삼은 조선시대 선비 모습으로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르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들려주셨던 증조부 수염에 대한 여러 일화 중 여러 번 들어 우리 형제들이 모두 기억하고 있는 내용도 있다. 고종의 가까운 친척(공주라는 설명도 있다)이었던 증조할머니 전주이씨 부인은 왕족이라는 이유로 기세가 등등했다.

남편과 시댁에 기죽지 않고 아들 셋을 낳을 때까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서울 친정으로 가버리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증조부 최우삼이 기생집에 다녀오셨는데 그것 때문에 화가 난 증조모가 남편 수염을 확 잡아당겨서 수염이 한 움큼이나 빠진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랫사람들 보기에 창피해진 증조부가 화가 많이 나셨고 남편이 화난 것이 무서워진 증조모가 또 서울로 도망가신 적이 있었다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다. 그런데 그런 조선 선비 풍모를 지닌 증조부 최우삼을 중국인이 되기 위해 변발을 했다고 묘사한 책을 손자가 만들다니 기가 막혔다.

또 그 책에서 증조부가 중국 땅에서 먹고살기 위해 큰아들을 중국인에게 양자로 보냈다고 했는데 그것도 상상에 의한 것이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道台인 증조부가 청의 간도정책에 맞서 청나라 군대와 전쟁을 하고 패하여 옥에 갇히자 가족들이 증조부를 구하기 위해 가산을 모두 처분해서 가세가 기울어졌다. 어려워진 집안형편에 명록(진동), 명길(운산) 두 아들이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큰아들 명록이 중국인의 양자로 적을 옮기거나 집을 떠난 것이 아니라, 중국인 부호의 집에서 일하던 명록의 영민함을 눈여겨본 중국인 부호가 명록에게 땅을 나눠주고 자신의 재산관리를 맡기며 양자로 삼겠다고 한 것이다. 그렇게 사실과 다른 서술이 책의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인국 당숙이 가족사를 너무 모른 채로 책을 의뢰한 탓에 연변 역사학자들이 빈 부분을 채우느라 중국의 잣대로 우리 가족사를 설명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인국 당숙은 무슨 이유인지 동생인 최운산 장군을 일부러 제외시키면서 책을 만들어달라고 연변 역사학자에게 요청했다. 그 책을 보면 최운산 장군은 마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최운산의 삶과 최진동의 삶이 하나로 합쳐져 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동생들과 같이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라 최진동 장군 혼자서 부대를 창설하고 전투를 치른 것처럼 보인다. 최진동 장군은 봉오동전투 이전부터 이미 명망 있는 연변 사회의 지도자였다. 최진동 장군이 동생들과 함께 만주 무장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을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 왜 형제들이 함께 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최진동 장군 혼자서 했다고 축소해서 기록하고 싶어 했는지 우리는 인국 당숙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한 사람이 위대한 영웅을 기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한 집안 전체가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면 후손으로서 그것이 더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시영, 이회영, 이석영 일가가 훌륭한 가문으로 추앙을 받는 것은 6형제가 뜻을 모아 함께 했다는 것에 있는 것처럼, 형제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만주 무장독립투쟁의 근거를 마련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할아버지들의 활동을 같이 서술하고 정리했다면 훨씬 크고 풍요로운 업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빨리 만주의 무장독립전쟁사의 진실이 역사에 드러났을 것이다.

당숙은 그 책을 만들기 시작할 때도, 책이 완성된 후에도 한국에 있는 조카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우리는 10년이 지난 2015년에야 도서관에서 봉오동전투에 관련된 자료를 찾다 우연히 그 책을 발견했다. 책을 만들 때 우리가 알았더라면 여러 오류들을 수정해서 우리 집안 역사를 제대로 정리할 수 있었을 텐데 가족사가 왜곡된 채로 책이 발간되어 너무 안타까웠다. 화가 나고 실망스러웠지만 이미 인국 당숙이 돌아가신 뒤라 화를 낼 수도 그 이유를 물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남처럼 지낸 시간이 길었다.

더구나 10월 초에 봉오동 선산 증조부의 묘소에 비석을 건립하기 위해 손자들이 함께 비용을 마련하고 지난 1년여 노심초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5남매가 처음으로 봉오동에 같이 가기로 했고 한국 역사학자들이 동행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앞두고 있었다. 비석에 새길 비문을 고무판에 새겨 인편으로 중국으로 보내는 일이 아직 남아있었다, 항공권도 예매했고 일정이 정해졌으니 마무리에 집중해야 했다. 무엇보다 그 일이 우선인 시기였다. 당고모를 만나러 하와이에 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차고 넘쳤다.

▲ 당고모와 함께

그런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85세의 노인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한 번은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신세한탄이나 변명에 불과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분들의 행태를 보면서 쌓인 분노를 잊어서가 아니라 그 분노를 넘어서는 한 걸음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라면, 아버지라면 조건 없이 다녀오라고 하실 것 같았다. 사랑은 하기 싫은 것, 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했다.

미국에 가본 적이 없는 나는 우선 항공료가 얼마인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난해부터 더 힘들어진 가정경제를 생각하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액수인지 알아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런데 하와이행 저가항공권을 검색하는 것을 본 남편이 갑자기 더 싼 항공권을 찾아주겠다고 했다. 아직 가겠다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하며, 남편이 모르던 당고모와의 관계도 설명했다. 남편은 무조건 가라고, 그 여러 이유가 바로 당고모를 만나야할 이유라고 하면서 항공권을 예매해주었다. 얼떨결에 남편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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