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검성의 위치

먼저 한사군을 설치하기 이전의 당시 형세를 살펴봅니다.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고 몽염장군을 보내 북쪽의 흉노를 칩니다. 그리고 북방의 성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쌓지요. 만리장성은 내성이 아니라 적과 대치하는 최전방의 방책선입니다.

초한전쟁이 일어나자 흉노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북방을 통일하여 최대의 유목국가로 성장합니다. 항우를 이긴 유방은 흉노와의 전쟁에서는 참패를 당하고 7일간 포위되었다가 간신히 도망칩니다. 그 이후 흉노와는 전쟁을 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지요. 그리고 흉노와 조약을 체결하는데 한의 공주를 선우(흉노 지도자)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키고, 한나라는 매년 조공을 바치며, 형제맹약을 맺고, 만리장성을 경계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그 이후 매년 조공이 늘어납니다. 중국 사서에 기록을 안 할뿐 사실은 흉노의 속국이었지요.

한 무제가 즉위를 한 후 조약을 파기하고 흉노를 공격합니다. 북쪽으로 신장 일부와 서역을 확보하고 비단길을 개척합니다. 이 전쟁으로 양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지만 실크로드를 잃은 흉노의 타격이 더 심했지요.

이후에 무제는 외교적 마찰을 빚고 있던 위만의 손자 우거왕에게 사신 섭하를 파견하지만 이를 무시합니다. 그러자 무제는 섭하를 요동군 동부도위로 임명을 하지요. 이에 우거왕은 섭하를 죽입니다.

여기서 추론할 사실은 요동과 조선의 관계입니다. 사료를 보다보면 요동과 양평, 평양 그리고 왕검성이란 이름이 혼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마치 우리의 서울을 일본은 경성, 중국은 한성, 예전에는 한양 또 장안을 차용해서 서울 장안이란 말도 썼지요. 한사군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평양을 현재의 평양으로만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입니다. 평양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자료를 가지고 논하겠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고조선이 요동이라고 하는 곳을 차지하고 있는데 무제가 섭하를 보내 요동의 반환을 요구합니다. 우거왕은 요동이 본래 고조선의 성지 왕검성이라며 거절하자, 섭하를 요동군 총독으로 임명을 합니다. 이에 격분한 우거왕이 군사를 데리고 가서 섭하를 죽여 버립니다.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당시의 왕검성과 요동성은 이름만 다르고 같은 지역을 의미한다고 추정합니다.(한사군이야기에서 상술)

무제는 기원전 109년 가을에 고조선침략을 실행합니다. 1년여의 전쟁으로 왕검성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기원전 108년 우거왕은 주화파에게 살해됩니다. 왕검성이 함락이 되면서 고조선은 망합니다.

당시를 기술한 사마천 사기에는 우거왕을 치고 조선을 멸한 뒤 사군을 설치했다는 말만 나옵니다.

사기 조선열전 원문에,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封参為澅清侯, 隂爲萩苴侯, 唊爲平州侯, 長爲㡬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温陽侯.

고로 조선이 평정되자 4개의 군을 만들었다. 참을 봉하여 홰청후(澅清侯)로 삼았고, (한)음을 추저후(萩苴侯)로 삼았고, (왕)협을 평주후(平州侯)로 삼았고, (우거의 아들)장(강)을 기후(㡬侯)로 삼았고, (노인의 아들)최는 죽은 아버지가 공이 있어 온양후(温陽侯)로 삼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우거왕을 살해한 조선인들로 을사오적과 같은 위만조선의 5적이지요. 바로 이 때 기원전 108년부터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해서 17년 후인 기원전 91년에 마친 걸로 추정합니다. 당시를 실시간으로 기술한 거와 같습니다.

사기가 나온 후 약 200여년이 지나서 완성된 한서의 조선열전에는 사기의 내용과 거의 유사하나 한사군의 명칭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故遂定朝鮮為真番、臨屯、樂浪、玄菟四郡. - 고로 조선이 평정되자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4군으로 나눴다고 기술합니다. 약 600년이 지난 남북조시대의 배인은 집해(集解)라는 주석을 달았고,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의 당나라 사마정은 색은(索隱)이라는 주석을 달지요.

集解駰案、眞番臨屯樂浪玄菟也. - 배인의 주석 집해에 (4군은)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이다. - 아마 한서의 기록을 참고했겠지요.

여기서 문제를 야기한 원인은 군(郡)의 개념이 사기를 쓸 때와 한서를 쓸 때 달라졌거나, 아니면 고을이라는 의미가 조선 땅에서 한나라 수도인 서안까지 가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큰 나라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사군이 아니라 사현(4縣)을 설치했다면 사실에 가까웠을 텐데 전공을 부풀리다보니 이런 현상이 생겼을 것입니다.

주석과 후대의 기록을 무시하고, 사마천의 원문만 보면 위만조선이 망하자 땅을 4개로 나누고, 자기들을 도운 조력자 5명을 각 지역 제후로 봉한 것입니다. 한 무제부터 제후에게 봉읍을 내릴 때는 지명을 붙입니다. 장량을 유현의 제후인 유후, 한신을 회음현의 제후인 회음후로 불렀지요. 따라서 진번, 임둔, 낙랑, 현도는 이백여 년 후에 변화된 중국의 군현에 따라 추가되었다고 봐야합니다. 사기 원문에 있는 난해한 이름이 당시 조선에서 부르던 원음과 가깝게 적었다고 해석을 해야 되지 않을까요.

한 가지 의문은 4군을 설치하고 제후를 5명으로 삼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왕협이 단군왕검의 후손으로 단군왕검의 사당을 지키는 장손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왕험(검)성 즉 양평성의 제후란 의미로 평주후에 봉했다고 추정해봅니다.

하지만 4백여 년 후의 주석에서는 5적에게 봉한 훼청, 추저, 평주, 기, 온양을 제, 발해, 양부, 하동, 제에 있는 지명이라고 해석을 해놓았습니다. 갈수록 사기 원문에서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광복 후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이 미국에 가본 적도 없는 김구선생을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임명하면 캘리포니아 주민은 승복할 것이며, 김구선생은 주지사업무를 수행할 수 있나요?

처음 조선을 정벌할 때도 사기에서는 5만 명의 죄인을 모아 공격을 합니다. 졸정다란 장군이 우거에게 대패를 당하고 5만의 병력을 잃자 법에 따라 처형이 됩니다. 누선이란 장군이 7,000명의 제나라 출신 병력을 끌고 와서 재차 공격을 합니다. 누선장군도 패하며 병사를 많이 잃었기에 죽여야 마땅하나 평민으로 만들고 용서했다고 기록합니다. 1년이 넘도록 다른 어떤 장군도 공을 쌓아 제후가 되지 못합니다. 그냥 내란으로 조선은 멸망했습니다.

100만의 정예군과 보급인력 100만을 동원해서도 요동을 못 넘은 수양제가 날이 추워지자 철수를 했는데, 한나라 무제는 추운 가을에 5만의 죄인들을 파견 산해관을 넘어 대동강의 평양까지 와서 위만조선을 점령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인정해야할 사실은, 고조선이 있던 지역에서 지도층이 바뀌었고, 한사군 지역이 그리 넓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당시 한나라의 국익에 부합하는 조선인 5적에게 땅을 나누어 제후로 삼고 위탁통치를 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마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이승만과 김일성을 통치자로 세운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 산서성에 있는 만리장성의 안문관입니다. 중화제1관이라는 큰 현판이 붙어있고, 역대 많은 황제들이 찾았던 곳. 흉노와 한나라 사이의 관문으로 왕소군도 이 안문관을 넘어갔습니다. 사진 : 2016년 4월

한나라 무제 이후 한나라가 항상 강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흉노는 여전히 강해서 툭하면 만리장성을 넘어 공격을 했지요. 7대 무제는 조약을 파기하지만 다시 힘을 기른 흉노는 또 한나라에 공주를 요구합니다. 11대 원제 때는 중국 4대 미녀중의 하나인 왕소군을 흉노의 호안야 선우에게 출가를 시킵니다.

흉노의 호안야가 공주를 요구 하자 원제가 잔머리를 씁니다. 친딸을 오랑캐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궁녀를 하나 뽑아 공주라고 위장을 해서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궁녀들 초상화 화첩을 보고 제일 못생긴 여자 왕소군을 뽑아 공주로 삼았습니다. 출가하기 전날에야 원제는 왕소군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중국 4대 미녀 중 서시와 더불어 이론이 없는 왕소군의 미모에 넋을 잃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지요.

궁녀들은 황제에게 간택되기를 바라며 화공에게 뇌물을 주어야하는데 왕소군은 가난해서 뇌물을 주지 못했고, 화공은 왕소군을 추녀로 그렸던 것입니다. 화공은 목이 잘리고, 미녀 왕소군을 보낸 덕분에 흉노와는 2대에 걸쳐 오랫동안 화목했지요. 그 왕소군을 생각하며 당나라 시인들이 글을 씁니다. 추운 오랑캐 나라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눈물이 주된 소재였고, 그중에 유명한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 봄이 와도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녹지 않아 봄이 오지 않은 것 같다는 의미) 구절이 소군원(왕소군의 원망)이란 시에 나옵니다.

▲ AD 2년의 전한 지도. 왕망이 집권하기 6년 전 지도입니다. 좌측 위 큰 원은 흉노, 아래는 한나라 수도 함양. 우측 위는 고구려, 아래는 양평입니다. 다른 중국 지도에는 한반도 평양부터 북측 대부분을 한사군으로 표시하는데, 최근 지도는 조금 다릅니다. 대신 고구려를 한나라 영토에 편입시켰습니다. 사진 : 위키피디아

섭정을 하던 태후의 조카 왕망이 실권을 잡아 황위를 찬탈하며 전한은 15대로 망하고, 신(新)이란 나라를 세워 15년간 유지합니다. 북쪽의 흉노와 국내 문제도 만만치 않았지요.

남북조 시대 송나라 범엽(AD 398~445)이 편찬한 후한서에 따르면 왕망이 초기에 흉노의 침략으로 고생을 합니다. 고구려군사로 흉노를 치려고 했는데 고구려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당시는 고구려 2대 유리왕 때입니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쓴 내용은, 흉노를 치라는 부탁에 오히려 한나라 군현을 노략질하자, 요서대윤을 보내 고구려군사와 싸우지만 전사를 합니다. 그러자 왕망의 장수 엄우는 고려후를 성내로 꼬드겨 들어오게 한 후 목을 베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후 고구려왕을 하구려후(제후급)로 부르며 비아냥거리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당시의 고구려는 흉노와 전쟁도 할 수 있는 국력입니다. 만리장성에서 수 천리 떨어져있는 한반도에 고구려가 있고, 중간에 한사군이 있다면 이게 가능한 이야기 인가요? 100년이 흐르면서 한사군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고구려는 만리장성 가까이서 한나라, 흉노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유리왕은 당시 국내로 도읍을 옮긴 상태였습니다.

이에 관한 중국 자료에 따르면,

玄菟郡設於前107年,其他三郡設於前108年。四郡並存的情況只存在了二十多年,到前82年,真番、臨屯二郡與玄菟郡的東部地區被併入樂浪郡,分別設東部都尉和南部都尉,玄菟郡治遷至高句驪縣。之後的東漢、曹魏與西晉皆保留了樂浪郡與玄菟郡(위키백과) - 현도군은 기원전 107년에, 기타 3군은 108년에 설치가 되었다. 함께 존치가 되었던 시기는 20여년이고, 기원전 82년에 진번 임둔과 현도군의 동부지역이 낙랑에 합병이 되면서 동부도위와 남부도위로 나뉜다. 현도군은 고구려현으로 옮겨 다스린다. 후한과 위진 시대에는 낙랑군과 현도군만 남았다.(이런 해석은 중국인의 입장이고)

실상은 현도군은 고조선이 망하기 전에 다른 지역에 있었고, 한사군은 26년 만인 기원전 82년에 깨져 남부, 동부 도위로 축소됩니다. 현도군은 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사라졌다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후한, 위진 남북조시대에는 낙랑과 현도만 형식상 존재하였지만 313년 고구려 미천왕이 고조선 지역을 탈환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위만 조선이 멸망할 때의 왕검성은 요동에 있었으며, 당시의 지명 양평으로 봐야합니다.(평양성이야기에서 재론) 왕검성도 고정된 지명이 아니라 단군왕검이 머무는 성의 의미로 수도의 개념이라고 봅니다.

우리 한민족이 가장 집착했던 대상은 조상과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배계층은 자신이 천자, 즉 하늘의 후손임을 강조합니다.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시지요.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종묘라고 하는데 종묘사직은 국가와 동일 개념입니다.

따라서 단군왕검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곳이 왕검성입니다. 고조선 왕조의 종묘사직은 환인(하늘)의 후손인 단군왕검의 보살핌으로 1,000년을 넘게 이어졌지, 왕검이 1,000살 넘게 살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부에디터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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