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총수렵도-동북아역사의 파노라마

제1화에서 낙랑은 식민통치기구가 아니라 일찍이 기자箕子에서 비롯된 유교의 전당으로서 중화(유교)문명의 첨병임을 살펴보았다. 제2화에서는 중화에 대항하여 수천 년 동안 싸워온 우리의 역사와 ‘유화문명’을 이야기하였다. 제3화는 단군신화 ‘웅녀’의 이름으로 유화부인과 주몽신화에 담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영속적인 것임을 확인하였다. 제4화는 한韓민족이라는 이름의 역사다.

제4화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잠시 부연한다.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이름은 중국 한韓나라와 한비자韓非子에 유래한다. 그 사실은 우선 우리 역사의 무대가 한반도와 만주벌판을 넘어 중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적어도 정신·문화사에서는 말이다. 또한 그것은 ‘연대’를 되새기게 한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이나 중국과 싸웠지만, 엄밀히 말하면 중국이 아니라 중화를 상대로 투쟁해온 것이니, 중국의 철학자들 상생의 세계를 꿈꾸는 중국인민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한韓’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막중하다고 하리라.

우리가 ‘한韓’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중국의 노자 장자 한비자 등등의 반유가 철학을 환영한다는 의미다. 반면 낙랑에 맞서서 목숨 걸고 싸웠다는 것은 ‘공자왈맹자왈’을 배격한다는 말이며, 그것은 일찍이 단군신화 주몽신화가 우리에게 부여한 거룩한 사명mission이다. 왜 ‘공자왈맹자왈’을 물리쳐야 하는지 다시 한 번 논어를 보자.

 

「논어」‘팔일八佾’편 제7장.

子曰 공자 가로되,

君子無所爭 군자는 금기[無]의 프레임[所]에서 차별화[爭]하며

必也射乎 필必을 투사project[射]한다.

揖讓而升 스타를 영입[揖]하면 모방[升]하고 벼슬을 사양[讓]하면 재물을 상납[升]하매

下而飮 트리클다운[下]하여 밥을 먹고[食] 물러남[下]으로써 조소[欠]하니

也君子 그렇게 밥그릇[也]을 쟁취[爭]하는 것이 군자다.

 

이런 이야기라면 ‘논어’는 꽤나 유용한 책이 아닌가. 문제는 퇴계 율곡과 같은 1%의 선비들만 이렇게 읽는다는 점이니, 우리에게는 어떻게 읽어주었던가? “군자는 다투는 일이 없지만[君子無所爭] 활쏘기에서 만큼은 반드시 다툰다.[必也射乎] …” 두 해석의 차이를 바라보라. 키워드는 ‘쏠 사射’이다. 학자들은 ‘화살을 쏘다’라고 하지만, 숨겨진 해석은 ‘투사project’다. 전자가 물질(有)세계에 있다면, 후자는 의식(無)세계에 있다. 논어이든 역사책이든 학자들이 오류에 빠지는 기본적인 이유가 이것이다. 옛 저술가들은 有와 無의 프레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데, 오늘날 인문학자들은 인문(無)을 사유하지 못하고 오로지 경영(有)의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2500년의 역사를 지배한 위대한 ‘논어’를 잘못 읽음으로써 우리가 놓쳐버린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화살의 연금술사 ‘큐피드’이다. 중화세계의 선비들은 모두 큐피드이다. 아니지, 공자는 큐피드의 화살을 날릴 수 있어야만 선비(군자)라고 말할 수 있다지 않는가. 군자라면 ‘반드시[必]’를 투사project[射]하라. 반드시 충성하라. 기필코 효도하라, 죽어도 ‘여필종부女必從夫’하라. 그런데 이것은 멋진 남자 아름다운 여신을 사랑하게 하는 큐피드의 화살과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은가. 그러나 큐피드에게는 두 종류의 화살이 있었음을 생각하라. 상대를 사랑하게 만드는 황금화살, 상대를 혐오하게 만드는 납화살. 그렇다면 군자들이 여인에게 화살을 쏘아 ‘절개’를 사랑하게 한다면, 그것은 남자(사랑)를 혐오하게 만드는 납화살이라고 하리라.

그렇다면 황금화살은 누구에게 있을까?

주몽신화를 생각하라. 여러 역사책들은 주몽이 ‘활을 잘 쏘았다[善射]’고 한다. 물론 활도 잘 쏘았을 것이다. 그러나 옛날 역사가들이 말하고자 한 것은 ‘잘 투사project하였다[善射]’는 점이다. 주몽에게 짐지워진 낙랑(중화)과의 전쟁은 주로 깃털전쟁이다. 낙랑(중화)은 공작새깃털을 자랑하고 고구려는 까마귀깃털을 자랑한다. 백성들이 공작새깃털을 사랑하면 고구려는 패배하는 것이니, 고구려의 대장 주몽은 까마귀문화를 ‘잘 투사project[善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제 무용총 수렵도를 보라. 단기필마의 사냥꾼이 달아나는 호랑이를 거침없이 쫓는 풍경은 용감무쌍한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나타낸 작품임에 누구도 이의가 없으리라. 그런데 1998. 10. 17. 방영된 kbs역사스페셜 1화 <무용총, 고구려가 살아난다>에서는 컴퓨터그래픽 복원기술을 활용하여 놀라운 사실을 보여주었다. 화살촉 부분을 확대하여 보았더니 화살은 살상용이 아니라 소리를 일으키는 ‘명적鳴鏑’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 속의 사냥꾼들은 짐승을 잡는 사냥꾼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움직이는 큐피드들이 아니겠는가.

사냥꾼의 행렬은 세 개다. 맨 위 주인공으로 보이는 사냥꾼은 동쪽으로 달리는 말 위에서 서쪽으로 도망치는 우아한 한 쌍의 사슴을 겨냥하고 있다. 그 아래쪽 사냥꾼은 동쪽으로 도망치는 불쌍한 호랑이를 추격하고, 뒤에는 또 다른 사냥꾼이 활을 늘어뜨린 채 조용히 뒤따른다. 맨 아래쪽 사냥꾼은 역시 동쪽으로 도망치는 한 마리 사슴을 겨냥하고, 뒤에서는 또 다른 사냥꾼이 ○○을 추격하고 있다.
인물들을 응시하라. 맨 위 사냥꾼의 모자에는 더부룩하게 묶은 새의 휘어진 깃털들이 꽂혀 있다. 그 아래 행렬의 앞쪽 사냥꾼의 모자에는 꼿꼿하게 뻗은 두 가닥 깃털이 꽂혀 있는데, 뒤따르는 사냥꾼의 모자는 맨 위 사냥꾼처럼 휘어진 깃털모자다. 맨 아래 행렬의 앞쪽 사냥꾼의 모자는 조정의 관료들이 머리에 쓰는 ‘사모紗帽’이며, 뒤쪽 사냥꾼의 모자는 둘째 행렬 앞쪽 사냥꾼처럼 꼿꼿한 깃털모자다.
이 세 가지 중 꼿꼿하게 뻗은 깃털은 「주역周易」 제11지천태地天泰 및 제12천지비天地否에 나오는 “삼지창 같은 깃털들”로서 충신·열녀들의 추상같은 절개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둘째 행렬의 앞쪽 사냥꾼과 셋째 행렬의 뒤쪽 사냥꾼은 공자왈맹자왈하며 백성들에게 충신·열녀들의 절개를 투사하는 군자라는 이름의 큐피드일 터, 쫓기는 호랑이는 당당하게 욕망을 추구했던 고조선백성들이리라. 둘째 행렬의 뒤쪽 사냥을 포기한 듯 활을 늘어뜨린 사냥꾼은 중화에 물들기 이전에 고조선 곳곳에 할거하던 부족장들. 군자들이 호랑이 백성들에게 충신·열녀들의 추상같은 절개를 투사하여 순한 사슴으로 교화하는 모습을 목격한 족장들은 기꺼이 중화에 귀의하였으니, 책봉 받은 족장은 셋째 행렬의 선봉에서 사모紗帽를 쓰고 사슴사냥을 시작한다.
둘째 셋째 행렬의 맨 앞에는 두 대의 수레가 나란히 놓여 있다. 큰 것은 성인군자의 수레이며, 작은 것은 제왕(부족장)의 수레다. 두 개의 수레를 탄 공작새 인간들은 열심히 ‘공자왈맹자왈’을 가르치면서 백성의 재물(양)을 수탈하리라.
이제 맨 윗줄의 주인공 주몽을 보라. 주몽이 겨냥한 한 쌍의 사슴 중 암컷은 성인군자이며 수컷은 제왕이다. 서쪽으로 추격해야 할 주몽의 말은 왜 동쪽으로 향하고 있을까? 다름 아닌 ‘왕의 귀환’이다. 서쪽은 중화세계를 말함이니 주몽이 탄생한 (중화화된)부여로부터의 귀환도 논리상 서쪽으로부터의 귀환으로 묘사된 것이다.
그림 하단의 어둠은 기자조선으로부터 시작된 암흑의 시대이니, 주몽 옆의 당당한 산들과는 달리 아래쪽 창백한 산(조정)은 그림자(儒家)에 기대어 있다. 그럼에도 단군이라는 뿌리에서 솟은 나무는 꿋꿋하게 역사의 맥을 이어오며 무성한 싹을 틔우고 있으니 고구려의 이름으로 찬란한 꽃을 피우리라.

지난 1화에서 5화까지는 동북아역사의 배경 구도 맥락에 치중하였다. 동북공정과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에서 확연히 드러난 '매몰된 역사학' 내지 '중화사관의 동굴'에서 벗어나고자 함이다. 우리 역사의 전장은 '까마귀와 공작새의 깃털전쟁'에 있었으니, 그것을 한눈에 보여주는 무용총수렵도로 마무리하고, 다음 6화 이하에서는 중화와의 깃털전쟁이 클라이막스로 치닫던 광개토왕시대의 이야기 '광개토왕비'를 이야기 할 것이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오순정 시민통신원  osoo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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