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환 칼럼] 교사의 「학생관」에 대한 역사적 성찰

하성환 주주통신원l승인2018.09.10l수정2018.09.1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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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현장에서 교사의 학생관은 크게 3가지로 나뉩니다. 전통적 학생관과 통제적 학생관, 그리고 주체적 학생관입니다. 먼저 「전통적 학생관」은 교사를 교육의 ‘주체’로 그리고 학생을 교육의 대상으로 분리해 규정합니다. 교육의 주체는 당연히 교사이고 학생은 피동적 위치에 섭니다. 따라서 인격적 주종관계로 학생은 일방적인 주입과 훈육의 대상으로 존재했습니다.

완성된 어른이자 인격자인 교사가 아직 미완의 학생을 성숙의 도정으로 이끄는 행위로 보았습니다. 교육을 미성숙한 학생을 대상으로 가치를 주입하고 이끌어 주는 행위라고 여겼지요. 교육의 과정 역시 주입된 지식의 암기와 훈육을 특징으로 합니다. 교육에 대한 봉건지배층의 관념이자 전통적 견해입니다. 낡은 모화사상, 바로 화이론(華夷論)에 기초한 조선사회 지배계층이 유교 이념을 주입시킨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유교의 경전이 조선시대 학문과 교육과정, 그리고 과거시험 전반을 지배했던 시절입니다.

'전통적 학생관'이 지향한 교육의 목적은 선비를 길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선비의 주류는 중국(중화)를 모방한 '소중화(小中華)'를 꿈꾸었습니다. 이런 사대주의 정신은 우리말글인 한글을 대하는 태도에서 대단히 비주체적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조선시대 선비교육은 교육의 본질에서 볼 때 비주체적인 인간형을 양산하는 참혹한 결과를 자초했습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 가운데 선비사상이 한국의 고유사상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위험하다 할 수 있습니다. 선비 스스로 비주체적이었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과 거리두기를 자초했으니까요.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구분 짓기'였습니다. 따라서 글자를 모르는 너희들은 우리의 가르침과 통치를 받아야 하고 저항은 원천적으로 있을 수 없는 ‘야만’으로 규정했습니다.

청렴하고 청빈하면서도 유교사회 비판적 지식인상인 선비를 이야기할 때 통상적으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연상합니다. 이황, 이이 모두 조선조 성리학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선비로서 추앙받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퇴계 이황 가문의 손자와 손녀 5명이 소유한 노비가 353명이었고 재산도 상당했습니다. 남인의 태두 이황과 쌍벽을 이룬 노론의 태두 이이의 7남매는 노비만 119명을 상속받았고 수만 평에 이르는 논밭을 소유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선비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배반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통사회에선 왜곡된 지식인상인 선비=인격자로 교육목표를 설정하고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전통사회 스승과 제자는 인격적으로 예속된 주종관계였고 이것은 그대로 전통적 학생관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전통적 학생관」은 아직도 위계적인 질서와 수직적인 학교문화에 깊이 그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오늘날까지 학교현장을 감싸고 있는 지배적인 학생관이자 학교문화의 거대한 한 축을 이루고 있지요.

서양사회도 고대사회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학생관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일례로 고대 로마사회에서 아버지는 자녀에 대한 권능이 절대적이어서 자녀를 매로 때리고 쇠사슬을 걸머지운 채, 노동을 시켰으며 심지어 자녀를 팔거나 죽이기도 하는 합법적 권능을 종신토록 지니고 있었습니다. 수도원학교 등 서양 중세의 학생 체벌은 너무도 유명한 사실이지요. 교사들이 교직과목을 이수할 때 다 읽어 본 서양교육사의 한 토막이지만 매우 가부장적이고 인도주의에 반(反)하는 야만적인 모습입니다. 누가 야만이고 누가 문명인인지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국가 통치이념이 관철되는 권위주의적 질서 속에서 「전통적 학생관」은 전통적 가치와 권위에 대한 복종을 요구했습니다. 지배질서에 순치된 인간형을 ‘모범적인 학생상’으로 설정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양산힘으로써 교육을 철저히 지배 질서의 방편으로 이용했지요. 「전통적 학생관」은 국가 - 사회 - 가정으로 이어지는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배태된 학생관으로 한국사회의 경우, 박제화 된 유가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21세기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오늘날 아직도 학교현장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린 '수구적 학생관'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는 교육의 본질을 크게 왜곡시키고 교사 - 학생의 인간관계를 무척 어렵게 만드는 낡은 교육기제로서 학교 현실에서 적잖이 목격되는 풍경입니다. 학생들의 이유 있는 정당한 항변을 단순 말대답으로 치부하여 혼을 내는 방식이지요. 따라서 학생들은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는 미성숙한 인격체로 규정해 교사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만듭니다. 2014 세월호 참사를 낳게 한 중대 요인이자 결정적 원인이기도 합니다. 교육계 스스로 깊은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할 지점입니다.

다음으로 「통제적 학생관」은 한국사회의 경우 식민지 시대에 배태되어 해방 후 수십 년간 지속된 '퇴행적 학생관'입니다. 이는 전체주의의 정신적 가학행위에서 생성된 학생관으로 학생들을 잠재적 저항집단으로 인식하는 관점입니다. 따라서 국가권력에 굴종시켜야 할 감시대상으로 규정하는 '반동적 학생관'이지요.

불의한 국가권력에 저항하려는 사회의식과 정의감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교육목표 - 교육과정 - 교육평가로 순환하는 교육의 전 과정에 국가권력이 직접 개입합니다. 그리하여 국가이데올로기를 집요하게 주입함으로써 ‘수동적인 이념형 인간’을 양산하지요. 무서우리만치 맹목적인 히틀러 유겐트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 아이들의 눈빛은 이상할 정도로 신념에 차 있습니다. 마치 한국전쟁을 전후한 서북청년단의 광기어린 눈빛을 연상시켜 줍니다.

교육현장에서 「통제적 학생관」은 학생들을 관제행사의 동원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학생들의 집회나 소모임을 권력에 저항하는 불순한 경향으로 단속해 왔습니다. 일체의 학생결사와 집회를 허가대상으로 삼았고 정당한 학생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억압했습니다. 학생의 정당한 항변을 학교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했습니다. 게다가 학생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을 전체주의 냄새가 짙은 교칙을 내세워 가혹하게 탄압했지요.

1940년대 일제 말기 동래중학 독서회 사건 등 전국적인 학생 독서 서클 사건을 혹독하게 대했던 일제당국의 처사가 대표적 사례입니다. 해방 후 이승만 반공독재체제에서 학생관제데모도 그렇습니다. 50년대를 관통해 자발적인 학생시위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지요. 제1공화국 내내 「통제적 학생관」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960년 4 · 19 혁명의 단초가 되는 대구 2 · 28 학생데모(1960)는 한국현대사에서 크나큰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올해 '대구 2 · 28 학생민주운동' 58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는데 그것은 그런 역사적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일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역대 정부 가운데 최초로 대구 2 · 28 학생민주운동 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습니다. 그리고 기념식에 참석하여 '대구 2 · 28 학생민주운동'은 ‘독재를 무너뜨린 첫 번째 역사적 사건’이라고 역사적 의미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박정희 - 전두환 - 노태우로 이어지는 30년 군부독재 시절 역시 학생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교육당국은 퇴학 – 형사처벌 - 의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무자비한 국가폭력의 공범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대학생들의 경우 숱한 의문의 죽음들이 발생했으며 5공 초기 삼청교육대 사건에서 보듯이 고등학생도 연행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학생을 감시 · 감독의 대상으로 보는 「통제적 학생관」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 준 시대가 군부독재시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학생회가 학도호국단으로 이름이 다시 바뀌고 학교사회가 준전시체제로 병영화된 시기였으니까요. 이 시기 학교는 거대한 수용소와 같았습니다. 교사 역시 교도소 간수 역할을 수행하며 학교는 가장 정치화된 공간으로 기능하는 슬픈 풍경을 연출하곤 했습니다.

교사는 국가권력구조에서 말단의 지위였음에도 국가이데올로기를 학교현장에서 예외 없이 관철시키는 최선봉이었습니다. 독재자 - 교육부장관 - 교육감 - 학교장 - 교감 - 주임(부장) - 평교사로 이어지는 권력의 서열화 구조 맨 끝에 위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학생활동을 직접적으로 억압하고 학생들을 감시 · 통제하는 정치권력의 말단 통제단위로 전락하지요.

식민지 시절 아침마다 천황의 충량한 신민으로서 인고단련을 맹세하는 글!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게 했습니다. 그리고 천황이 살고 있는 동쪽 궁성을 향해 90도로 허리 굽혀 절을 하는 궁성요배를 강행했고 신사참배와 정신대를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해방 후 반공 · 멸공의 최전선에 서서 반북 적대감을 고취시키는 반공웅변대회와 반공글짓기 · 반공포스터 그리기 대회를 별 고민 없이 주관하던 것과 맥락을 같이하지요. 심지어 학교는 시상까지 하면서 분단을 공고히 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유신시대인 1970년대 교사들은 국민교육헌장을 아이들에게 외우게 했고 시험에 냈습니다. 더구나 월요일 운동장 애국조회마다 교감은 구령대에 올라서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국민교육헌장을 낭독하는 등 어두운 기억은 가히 교육의 암흑기였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통제적 학생관」은 이 시기 근본적으로 한국교육이 교육의 본질에서 크게 이탈하여 교육의 진정한 모습을 상실해 갔던 시기로 기억합니다. ’교육’은 없고 ’주입과 통제’만 살아있는 학교현장은 교육의 본질을 크게 훼손시켰습니다. 학생들을 끊임없이 억압하였고 학교현장에 폭력이 일상화되는 중대한 과오가 지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학생인권이 최악으로 치닫는 비극을 연출했던 시기입니다. 체벌은 교육의 이름으로 미화되었고 일부 폭력교사의 무자비한 인권침해는 쉬쉬하는 형편이었지요. 학생의 뺨이나 얼굴을 구타하는 것이 별다른 죄의식 없이 저질러졌던 시기이자 교실에서 극단적인 언어폭력 · 성폭력조차 합리화되고 은폐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이 땅에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아간 지 30 년이 지났습니다. 비록 진통을 겪고 있지만 비틀린 것들이 본래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국가주의 교육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그 빈 공간을 열린 교실, 열린 교육, 여러 줄 세우기 교육, 꿈과 끼를 키우는 교육으로 학생의 개성을 존중하고 다양성, 창의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80년대 초부터 제도권 교육을 넘어서고자 대안 학교가 처음 등장하고 90년대 들어서는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지요. 또한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하는 정책적 · 제도적 노력이 일부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 10년 동안 교육계 권위주의가 해체되고 수평적인 학교문화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눈 여겨 볼만한 대목입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운동장 애국조회가 완전 폐지되고, 일·숙직제도가 폐지된 것 또한 그것을 반증합니다. 나아가 주번교사제도가 폐지되고 교사를 통제했던 출근부 날인제도 역시 폐지되었습니다, 2010년 곽노현 진보교육감 시절, '가벼운 체벌도 반드시 징계하겠다'는 공문시행과 함께 학생체벌을 엄히 금하는 규정이 강화되고 학생인권을 보호하는 조례가 제정되었습니다. 학생들의 꿈과 끼를 살리는 학생 동아리 활동이 활성화되는 등 여느 때보다 한국교육은 급격한 전환기에 놓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교사의 학생관 역시 과거 권위주의 시대 국가주의 교육의 산물이었던 「통제적 학생관」에서 벗어나 학생을 교육의 주체로 보려는 민주적인 시각이 정립되어 갔습니다.

「주체적 학생관」은 교사 - 학생이 상하 수직적인 봉건적 인간관계를 거부합니다. 나아가 전체주의 이념에 기초해 파시즘적 도덕을 강요하는 획일화된 인간형도 거부하지요. 「주체적 학생관」은 학생을 대상화하는 소외된 학생상을 극복하고 교사 - 학생의 대등한 인격적 관계를 지향해가는 '민주적인 학생관'입니다.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쌍방향적 관계 속에서 교사 - 학생 간 서로 배우고 가르침을 주며 현실의 모순을 함께 헤쳐가려는 동반자적 관계이지요.

「전통적 학생관」이 주종관계였다면 「통제적 학생관」은 교사 - 학생 관계가 대립적 · 갈등적(때론 적대적) 관계였습니다. 반면에, 「주체적 학생관」은 교사 - 학생의 관계 맺기가 인격적 기초 위에 수평적 · 협동적 관계로 정립돼 나아갑니다. 우리는 그러한 생생한 사례로 1989년 전교조(전국교직원 노동조합) 결성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극우독재 권력에 의해 탄압 받던 선생님들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던 학생들의 함성에서 「주체적 학생관」의 면면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89년 6월 구로고등학교 학생회 차원에서 2500명이 넘는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한 채 운동장에서 항의집회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한 달 넘게 교장실 점거 농성으로 파면된 양달섭 선생님(역사 교사)을 지키기 위한 학생들의 눈물 나는 시위였지요. 아이들은 스승의 노래를 부르며 운동장과 교실을 돌면서 교실에 남아 방관하던 아이들의 동참을 촉구했습니다. 운동장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노태우 군부독재정권의 전교조 탄압을 통렬히 규탄했습니다. ‘우리들은 참교육이 무엇인지 안다’고 절규하면서 ‘참교육 받을 권리를 빼앗아가지 말라’고 항의했습니다. 2000여 시위대는 학교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진출하다가 영림중학교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전경들과 격렬히 충돌했습니다.

군부독재정권에 정면으로 맞선 89년 고교생 투쟁 사례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고등학생 운동사를 정리해야만 할 정도로 89년 봇물 터지듯이 분출되었으니까요. 광주고등학생연합(광고협), 부산고등학생연합(부고협), 서울고등학생연합(서고협), 마산・창원고등학생연합(마창고협)에 이어 전국고등학생연합(전고협)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고교생 스스로 자기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고등학생운동사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지요. 당시 광고협의장 강위원 군(광주 서석고 3년)은 '전교조 교사지지 및 참교육 확보 투쟁'에 나섰다가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1989년 1학기 동안 광주, 전남 지역에서 시국 사건으로 경찰에 연행된 2,400 명 가운데 50%가 넘는 1,265명이 전교조 교사를 징계하는 교육당국에 항의하는 집회에 참여한 중고교생들이었습니다.

89년 1학기 동안 전국적으로 전교조 교사 징계 저지 및 참교육 투쟁 과정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탄압을 받거나 구속되었습니다. 참교육 관련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이유만으로 학교당국의 무기정학과 퇴학 조치가 남발되었고 거리 진출 과정에서 경찰과의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물리적 충돌 과정에서 경찰의 방망이에 속수무책으로 매질을 당하기도 하고 경찰서 연행 또한 다반사로 빚어졌습니다. 심지어 전교조지지 및 참교육 투쟁에 앞장 선 학생회 임원을 교실에서 경찰이 수갑을 채워 연행하는 야만적인 사례까지 등장하였습니다. 서울 구로고 학생들의 거리 시위 진출과정에서 경찰과의 충돌이나 서울고 학생들의 유인물 배포 사건 그리고 경기도 일산종고 학생회 부회장 유민수 군을 시험 도중 교실에서 수갑을 채워 경찰이 연행한 사건들이 그렇습니다.

89년 이후에도 1990년 6월 5일 학교당국의 참교육 탄압에 분노하며 학생자치활동에 열성적인 대구 경화여고 김수경 양이 죽음으로 항거한 투쟁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전남 보성고교 김철수 군은 1991년 5월 18일 '노태우 정권 퇴진과 인간교육 실현'을 외치며 분신하였습니다. 원통하게도 어린 학생들의 희생은 계속됐고 그 고통 또한 너무 컸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군부독재권력에 맞선 주체적인 고등학생운동의 금자탑은 전남 옥과고등학교 학생들의 89년 참교육 투쟁 사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교조 탄압에 맞서 독재정권과 학교당국의 부당징계에 맞서 싸운 승리한 투쟁이자 '주체적 학생상'을 유감없이 보여준 빛나는 투쟁사례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일제강점기 광주학생운동이 서울지역으로 시위가 비화된 1929년 12월과 1930년 1월에 서울지역 중등학생들이 보여준 투쟁 사례를 연상케 합니다. 일제 경찰 기마대의 잔인한 진압에도 두려움 없이 '구속학생 석방'과 '경찰의 학교 진입 반대' 그리고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를 외치지요.

▲ 조선어학회 항일기념탑(서울시 종로구 광화문 광장 부근) 조선어학회 사건(1942)은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던 일제 말기에 전개된 항일 언어독립투쟁이다. 당시 함경남도 홍원경찰서, 함흥경찰서로 압송돼 잔혹하게 고문을 당한 33인의 명단을 새겨 2014년 7월에 건립하였다

특히 1930년 1월 서울지역 2차 학생 시위에선 이화여고보, 배화여고보, 동덕여고보, 경성여자상업학교 등 서울지역 여학생들 거의 전체가 참여합니다. 일제도 경성시내 조선인 여자 중등 학생들 거의 대부분이 참가하였다고 했습니다. 서울 어느 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장을 조선인 학생들이 리어카에 태우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돈 뒤에 쓰레기장에 쏟아 부은 적이 있지요. ‘제국주의 타도, 일본인 교사 축출, 노예교육 반대, 구속학생 석방’ 등의 구호도 함께 외쳤습니다. 의열단 조선의용군 출신 연변 작가 고 김학철 님의 문학작품 『격정시대』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서울 구로고, 고척고, 신목고 학생회 차원의 참교육 투쟁과 전남 옥과고 투쟁 등 89년 전국적인 고교생 항의 투쟁은 군부 독재 권력에 맞서 부당하게 탄압받는 ‘전교조 선생님들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학생들 스스로 올바른 교육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참교육을 요구하는 교육권 확보 투쟁’의 성격을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그 투쟁 과정에서 학생들은 학생의 권리를 스스로 확보하기 위한 사회변혁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교육의 일 주체로 '주체적 학생상'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는 학생들이 현실 사회의 변화를 위해 주체적으로 자각한 양상이자 진보적인 교사와 동반자적 관계로 연대해 갈 수 있는 지위로 성장했음을 선포하는 함성이었습니다. 이후 학교 현장은 학생을 바라보는 태도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바깥 사회 민주화의 흐름에 발맞추어 학생의 지위도 크게 향상되기 시작하였지요. 물론 반동 기제가 작동하기도 했습니다.

89년 중고교학생들의 정치사회의식 고양과 집회, 시위 양상에 놀란 지배집단은 갑작스레 중고교 교복 착용을 강제하기 시작합니다. 80년대 전두환 5공 정권 때 자율복 시대를 뒤엎는 처사이자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명백한 반역이지요. 80년대 중고교생들은 교복 없이도 학교생활을 잘하였습니다. 10년 동안 자율복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음에도 89년 학생계층의 정치사회적 진출에 화들짝 놀란 지배집단의 즉자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교복을 안 입히면 학생통제가 안 된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말이지요. 그 결과 90년대 중반 즈음엔 거의 모든 학교들이 교복을 채택하게 됩니다.

1998년 학생들의 교육과정 선택권 확대와 동아리 등 특별활동의 정책적 배려 그리고 1999년 학생 체벌 규정 강화와 2000년 학생 두발 규정에 대한 학생들의 집단적인 항변은 학교현장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인권의 문제, 복지의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2010년에 학생 머리 길이를 이유로 생활지도 단속과 통제를 하지 못하도록 공문이 시행됩니다.

2014년 진보교육감 2기에선 단속, 통제 위주의 교문 지도를 지양하고 ‘학생 맞이’ 행사로 생활지도 방침이 변경돼 시행됐지요. 2010년 학교선택제 이후 슬럼화된 일반 인문계고교에는 바로 적용하기엔 어렵겠지만 큰 흐름에서 교육의 변화, 학교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교사의 학생관 역시 「주체적인 학생관」으로 변모해 가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교사 - 학생의 관계가 낡은 관계에서 벗어나 다시 바람직하게 정립되고 교육 주체로서 ‘동반자적 관계’임을 새롭게 인식, 정립해 가는 것이지요. 나아가 건강한 사회 변화를 위한 교육주체로서 교사-학생 간 연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하고 있음을 종종 목격합니다.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여중생의 촛불집회 당시 교사들은 조직적으로 집회에 참여함으로써 여중생 시위로 촉발된 촛불집회에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2016년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사태 당시 촛불집회에서도 교사-학생들은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연대했습니다. 2016년 겨울과 2017년 1월 촛불시민혁명 당시 광장민주주의를 학생들은 직접 체험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해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광장에선 서로가 서로를 평등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배려와 양보, 그리고 협력하고 참여하는 전 과정을 지켜보기 때문이지요.

▲ 고3 학생들의 플래카드 시위(10/29 1차 촛불집회)10/29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을 규탄하며 고3 학생들이 연도에 플래카드를 펼치자 거리의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장면

2016년 10월 29일 제1차 촛불집회에서 중고교생들이 연단의 연사로 등장하여 격하게 성토하는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초등학생도 무대 위에 올라 규탄사를 할 정도였으니까요. 1차 촛불집회에선 고3 수험생들조차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2차 촛불집회에선 ‘교육혁명 고등학생 연대’라는 다소 과격한(?)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수백 명의 고교생들이 광화문 일대를 행진하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이 모든 현상은 학생들이 역사와 사회 변화의 주체로서 집단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이자 학생계층 스스로 「주체적 학생상」을 획득해 가는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요컨대 교육기본법 제2조의 규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 실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문화돼 있습니다. 민주시민은 주체적인 학생상을 통해 가능합니다. 따라서 「주체적 학생상」은 민주적인 학생상으로 대한민국 교육이념에 가장 적합한 학생관입니다. 21세기 전환의 시대! 「주체적 학생상」이 한국교육이 지향하는 바람직한 학생관으로 정립되길 소망합니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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