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이야기는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로 보면 되겠네요. 꿈속에서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라는 착각에 빠지지요. 잘못 해석하면 일장춘몽의 허망한 인생살이가 되겠네요. 그것은 아니고, 내가 사라지므로 자연과 하나가 되어 나 아닌 것이 없고(無我無不我), 나의 집이 없어지므로 나의 집 아닌 것이 없어져서 우주가 나의 집이 되는 것이지요(無家無不家).

▲ ‘언젠가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문득 깨어 보니 틀림없는 자신이 아닌가.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나비의 꿈을 소재로 중국 명나라 화가 육치가 그린 ‘호접몽’. <한겨레> 자료사진 (사진출처 : 2017년 9월.29일 자 한겨레신문)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꿈속의 나비는 대상이고 꿈을 꾸는 나는 주체이다. 하지만 내가 나비를 대상으로 떨어뜨리면 나 또한 다른 주체에 의해 대상으로 떨어지고 만다. 상대를 부정하면 나 또한 부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처럼 나비 또한 내 꿈을 꿀 수 있는 평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비의 비상은 자유를 얻기 위한 날갯짓이다. 장자에게 자유와 평등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유란 상대를 대등한 존재로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자유란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일 수 있는 세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전호근. 경희대 교수).”

개인의 욕심과 아상, 아집, 아만을 내려놓음으로써 우주 천지자연과 하나가 되는 초연한 삶의 방식을 말하지요. 그래서 대자유의 나비가 되고, 붕새가 되는 것이지요. 주객일체(主客一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가 되네요.

재미난 이야기로, 방바닥에 떨어진 100원, 500원 짜리 동전을 가지고 형제가 싸우는 모습을 본 엄마는 싸울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요. 그 동전들은 모두가 우리 것이니 싸우지 말라고 하지요. 그런데 엄마는 밖에 나가서 이웃집과 쓰레기 문제로 다투지요. 예수님이 볼 때는 싸울 일이 아니지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생각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요. 여기까지는 심법(心法)의 영역이네요. 우주에서 보면 수많은 별 중에 하나 지구. 먼지 별. 그 안에 또 먼지 같은 인생들... 이것은 이법(理法)의 관점이지요.

이 경지는 우리가 평생을 노력해서 지양하고 지향해야 하는 지점이 되어야겠지요. 이 목표점을 서양에서는 ‘이데아(idea)’라 했고 동양에서는 ‘중도(中道)’라고 한 것이지요. 진리의 세계는 비교하지 말고, 차별 분별하지 않는 세계이지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한 순간도 비교, 차별 분별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지요. 그래서 진리 공부를 잘못하면 진리의 우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겠지요. 자아분열과 광신, 맹신이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결론은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하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중도적 삶, 이데아를 지향하는 삶, 진선미를 향한 삶’이라지요.

본체의 도(진리 법)는 작용의 현실로 드러나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현실의 삶이 중요한 것이겠지요. 본체의 도는 바람을 일으키는 풀무 같은 것이네요. 현실의 내가 우주의 주인공으로 힘을 받고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요.(연재물 93회). 현실의 ‘나’라는 존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면서 사는가?’ 여기에 핵심이 있는 것이네요. 비록 본체면에서 ‘나(我)’는 ‘무상(無常), 무아(無我), 공(空)’이어서 실체(實體)가 없는 것이라 해도, ‘지금, 여기’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여기의 내가 우주의 주인공인 것이지요.

근본체

본체. 본질

작용. 현상

공. 무. 허

(空. 無. 虛)

몸짓-손짓. 발짓.

눈짓, 코짓...

청정수

된장국. 배추국. 설탕물. 흙탕물. 커피. 얼음. 안개. 이슬. 서리. 구름. 눈. 비...

순금

반지. 귀걸이. 팔찌. 금관...

中. idea

正. copy

이런 본체(본질)의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이유는 집착을 다스릴 수 있고,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모르면 3毒 5慾에 끌려 다니며 노예생활을 하게 되지요. 이런 생활을 인생의 모든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고통의 연속이지요. 그러나 이런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온전히 주변을 위해 다시 베풀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무한한 긍정의 에너지가 솟는다지요.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사람들, 차별받고, 핍박받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의(正義)의 편에서 삶을 산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부처님, 마더 테레사의 일생을 보면 알 수 있네요.

요컨대 진리를 깨닫는 것으로 꿈에서 깨어나고, 전도몽상(顚倒夢想)의 인생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가치 지향적 삶을 살게 되겠지요. 이것이 우주의 주인공으로 사는 것이네요. 불교철학과 장자사상의 핵심이지요(隨處作主 立處皆眞). 비록 행동과 실천이 어렵더라도 먼저 머리로 이해를 하면 도움이 되겠지요.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면 효과도 없고 중간에 멈추게 되지요. 그것이 철학하는 글공부가 되네요.

<참고자료>

호접지몽(胡蝶之夢)
昔者莊周夢為蝴蝶(석자장주몽위호접).
栩栩然蝴蝶也(허허연호접야), 自喻適志與(자유적지여)!
不知周也(부지주야).

언제인가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俄然覺(아연각),則蘧蘧然周也(즉거거연주야)
不知周之夢爲蝴蝶與(부지주지몽위호접여),
蝴蝶之夢為周與?(호접지몽위주여?) 周與蝴蝶(주여호접).

그러나 문득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장주가 아닌가.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을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則必有分矣(즉필유분의) 此之謂物化(차지위물화).

장주와 나비에는 겉보기에 반드시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절대적인 변화는 아니다.
이러한 변화를 物化(만물의 변화)라고 한다(齊物論 32).

(번역 1)

언제인가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장주가 아닌가.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을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장주와 나비에는 겉보기에 반드시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절대적인 변화는 아니다.
이러한 변화를 物化(만물의 변화)라고 한다(齊物論 32).

(번역 2)

옛날에 장주(장자의 이름)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훨훨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것이 스스로 기뻐 제 뜻에 맞았더라!
(그래서) 장주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깨어, 곧바로 뚜렷이(혹은 놀라서 보니) 장자가 되었다. 알지 못하겠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장자와 나비 사이에 반드시 구분이 있다.
이것이 만물의 변화라고 하는 것이다.

[편집자 주] 한겨레 주주인 김상학 선생님은 현재 대학 교육원에서 주역, 노자, 장자, 역학 등을 강의하고 있고, 한민족의 3대경서를 연구하고 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김상학 주주통신원  saram5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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