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의 안주인, 대한북로독군부의 병참대장 김성녀 여사

최성주 객원편집위원l승인2020.09.25l수정2020.10.1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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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공한 남성의 뒤에는 묵묵히 자신의 몫을 감당했던 아내의 손길이 있는 경우가 많다. 봉오동전투의 숨은 주역 최운산 장군의 곁에도 봉오동 건설부터 1920년 봉오동 독립전쟁의 승리, 그리고 이어진 고난과 투쟁의 역사까지 모든 과정에 동반했던 부인 김성녀 여사가 있었다.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김성녀 여사는 아버지와 오빠가 독립운동을 하러 러시아로 건너간 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독립군의 딸이다. 조선 말기 청나라와 국경 분쟁 시 무력충돌을 불사했던 '연변 도태 최우삼'의 아들로 연길에서 성장한 청년 최명길(최운산)은 무술인이자 군인이었고, 시대적 변화를 발판으로 경제적 안정을 구축한 젊은 자산가였으며, 주도면밀하게 무장독립전쟁의 기반을 마련한 준비된 독립군이었다. 독립군의 딸과 독립군의 혼인은 어쩌면 처음부터 그렇게 예정된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 김성녀 여사

도시인 연길에서 일생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는 거대한 경제력과 성공한 지역사회 유지라는 정치사회적 조건이 충분했음에도 최운산⦁김성녀 부부는 일가 4대와 함께 연길을 떠나 황무지였던 왕청현의 산골로 이주해 그곳을 북간도 조선인의 새로운 삶터로 개척해 봉오동이라 이름 붙였다. 그들은 신한촌 봉오동을 거대한 무장독립군기지로 발전시켰다.

1912년 봉오동의 주민들을 마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창설한 100여 명의 사병부대 시절부터 군복 제작과 식사 준비 등 생활 전반을 책임지며 대규모 살림을 시작한 김성녀 여사는 무장독립군이 되기 위해 봉오동으로 모여드는 <봉오동사관학교> 지원병들을 먹이고 입히며 북간도 독립군들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자 봉오동 독립군의 숫자가 몇 배로 늘어났다. 수백 명 독립군을 위한 대형 숙소와 훈련장이 더 필요했다.

1915년 봉오동의 산중턱을 벌목해 거대한 연병장을 만들 때도, 베어낸 나무로 대형 막사 3동을 지을 때도, 도독부 본부인 저택을 중심으로 둘레에 토성의 두께가 1m가 넘어 말을 타고 토성 위를 돌며 경비를 설 수 있었다는 대규모 성채를 건축할 때도 김성녀 여사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그들과 함께 일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받아들인 최운산 장군 형제들이 도독부를 670명 규모의 대한민국의 독립군부대 <대한군무도독부>로 재창설할 때도 김성녀 여사는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1920년 북간도의 여러 독립군 단체들이 <대한북로독군부>로 통합되어 수천 명 대군단이 될 때도 동네 부녀자들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군복을 만들었다. 쌀과 잡곡, 채소와 고기 등 부식을 배급하는 일 외에도 김치며 간장⦁된장⦁고추장등 각종 양념까지 준비해 각 부대로 보내며 묵묵히 자신의 몫을 해나간 김성녀 여사는 봉오동 독립군의 영양을 책임지던 건강 관리자였다.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의 연병장이 있던 봉오동 상촌에 가면 100년이 넘은 지금도 그녀가 독립군의 식사를 준비하며 콩을 갈 때 사용한 직경 1.5m가 넘는 대형 맷돌이 홀로 남아 역사의 현장을 무겁게 지키고 있다. 

▲ 대한북로독군부 본부가 있던 상촌에 남아있는 대형 맷돌

김성녀 여사는 손재주가 좋은 부녀들과 함께 군복을 제작하는 ‘봉오동 재봉틀부대’의 대장이었다. 독립군들이 속속 봉오동으로 모여들었고, 봉오동전투 직전인 5월 19일 '대한북로독군부'로 대통합을 이루었다. 수천 명으로 늘어난 통합군단의 독립군을 위해 8대의 재봉틀이 쉬지 않고 돌아갔다. 병사들의 숫자보다 훨씬 많은 군복을 만들어야 했다. 봉오동전투 당시 일본군의 눈에 잘 띄게 길에서 잘 보이는 산위에 군복 입힌 허수아비를 세워두는 작전을 썼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최운산 장군에게 일이 너무 많아 힘들다는 하소연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오빠가 연해주 어딘가에서 그렇게 살았을 독립군이었다. 독립군을 돌보는 일은 남편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이라 스스로 정해놓은 당신의 몫이었다. 최운산 장군이 애국청년들을 모아 독립군으로 훈련시키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 김성녀 여사가 독립군을 먹이고 입히는 일을 단 한 번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일로 품어낸 결과였다.

만주의 독립군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은 영화 ‘봉오동전투’처럼 허름한 한복차림이거나 다 닳아버린 코트를 입은 독립군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6월의 봉오동은 코트가 필요 없는 봄 날씨였고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치른 우리 독립군들은 '봉오동 재봉틀부대'에서 만든 새 군복을 입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었다.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굶주리는 의병들이 아니라 허수아비에도 군복을 입힐 만큼, 카메라를 준비해 전투 중 실전황을 찍에 임시정부로 보내 세계에 선정하라고 할 만큼, 군자금에 여유가 있었다. 모든 병사들이 신형무기인 러시아제 모신나강과 미제 브라우닝 소총을 가지고 전투에 임할 만큼 준비된 전쟁이었다. 군자금과 무기, 훈련과 작전이 없었다면 봉오동⦁청산리전투의 승리는 없었다. 전쟁의 승리는 애국심과 용기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독립군에게 밥을 해주시고, 독립군들의 군복을 지어주셨고, 독립군들의 모든 살림살이를 도맡아 해주신 이 분이야말로 진짜 훈장을 받으셔야 할 독립군이시다!”

1960년대 초, 부산 국제시작에서 최운산 장군의 부하였던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이 아버지와 빼닮았던 최운산 장군의 큰아들을 알아보았다. 어머니 김성녀 여사가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오셨다는 소리에 그가 집으로 찾아와 크게 감사를 전하며 후손들에게 들려준 말이다.

▲ 1960년의 가족사진, 김성녀 여사의 팔을 잡고 앉은 아이가 3살의 필자, 그 곁에 최진동 장군의 손녀인 6촌이 함께 있다. 

1907년 열네 살에 스물둘의 청년 최운산과 혼인을 한 김성녀 여사는 열아홉 살인 1912년부터 남편과 함께 병사들 관리에 뛰어들었다. 20대 후반인 1920년 봉오동전투를 치르며 전쟁터가 된 봉오동을 지켰고,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형제들이 독립군을 이끌고 연해주로 떠난 30대엔 남은 가족들을 돌보며 군자금을 만들어 연해주로 보냈다. 사망한 독립군 가족에게 생활비를 전달하고 돌보는 일도 젊고 건강한 그녀의 몫이었다. 

최운산 장군은 무술의 달인, 변장의 귀재답게 비밀리에 활동하였으나 1924년 3년간 감옥생활 한 것을 시작으로 1945년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하실 때까지 모두 여섯 차례나 투옥과 고문을 피하지 못했다. 김성녀 여사는 여러 차례 검거 당하고 고난을 당한 최운산 장군의 옥바라지와 간호에도 최선을 다했다. 또한 안정적으로 봉오동에 머물지 못하고 연해주와 북만주 삼림지대를 종횡하며 전투를 치르고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군 양성하는 남편의 손과 발이 되어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고 자금 관리를 도왔다.

봉오동 주민은 대부분 독립군과 그 가족이었다. 봉오동전투 순간을 비롯해 어떤 위기에도 물러섬 없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던 여장부 김성녀와 그녀와 함께 했던 동네 부녀자들의 열정을 기억해야 한다. 김성녀 여사는 일생 중 가장 활발한 할동기인 10대 후반~ 50대의 모든 시간을 봉오동에서 독립군을 돌보며 지냈다.

시기에 따라 인원이 많고 적음이 있었고 독립군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머물기도 했지만 봉오동은 언제나 북간도 독립군과 무장투쟁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봉오동의 중심에 김성녀 여사가 있었다.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김성녀 여사가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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