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의 새벽에 문득]
Ⅰ. 카뮈의 긍정적 시선으로
축구 경기장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인터뷰를...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알베르 카뮈는 수상 소식이 발표되고 일주일 뒤 프랑스 텔레비전과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인터뷰 장소가 특이했다. 방송사 스튜디오가 아니라 파리의 '파르크 데 프랭스' 축구 경기장이었다. 3만5천여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라싱 클뢰브 드 파리' 팀과 모로코 팀의 경기가 열린 날, 카뮈는 관람석에 앉아 경기를 관전하면서 인터뷰를 했다. 경기 도중 파리팀 골키퍼가 실책을 저질러 실점하자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며 골키퍼를 두둔하기도 했다. 이 인터뷰 장면은 희귀 필름으로 남아 지금도 유튜브에서 시청할 수 있다.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태어난 카뮈는 어릴 때 이 지역의 '라싱 위니베르시테르 알제'(RUA) 클럽 주니어팀의 골키퍼로 활약했다. 카뮈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골키퍼를 맡은 것도 신발이 가장 잘 닳지 않는 포스트가 골키퍼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카뮈 할머니는 축구 때문에 비싼 신발이 빨리 헤진다고 끊임없이 그를 꾸짖었다. 카뮈는 17살 때 갑작스럽게 폐결핵에 걸려 축구를 중단했으나 축구 사랑은 평생 지속됐다. 파리에 살면서 '라싱 클뢰브 드 파리' 팬이 된 것도 순전히 파란색과 흰색의 유니폼 색상이 자신이 어릴 때 뛰었던 RUA와 같았기 때문이다.
카뮈의 작품 속에는 축구 이야기가 많이 녹아들어 있다. 미완성 자전적 소설 <최초의 인간>에는 주인공 자크 코르므리가 학교 쉬는 시간에 숨을 헐떡이며 축구를 하고 난 뒤 "구두 밑창에 박은 징들이 닳았으리라는 생각에 불안하게 살펴보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축구 때문에 구두가 닳는다고 할머니한테 야단맞던 어린 시절 카뮈의 모습이다. 소설 <전락>에서 주인공 장-바티스트 클라망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진실로 충실하고 열정적이었던 때는 스포츠를 할 때와 군대에서 재미삼아 상연했던 연극에 출연했을 때뿐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에는 놀이 규칙이 있었는데, 진지하지 않은 것을 진지한 것으로 여기고 즐긴다는 것이었지요. (…) 경기장과 극장은 내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세상에서 유일한 장소들입니다." 실제로 카뮈는 자동차 사고로 숨지기 1년 전인 1959년 한 인터뷰에서 "극장과 축구 경기장이 나의 진정한 두 대학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축구에서 배웠다."
카뮈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1956년 RUA 동문회보에서 선수 시절을 회상해달라는 주문을 받고 기고한 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글은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뒤 주간지 <프랑스 풋볼>에도 그대로 실렸다. 당시 카뮈는 프랑스 지성계에서 점점 외톨이가 되고 있었다. 나치 반대 운동 때 '한 팀'을 이뤘던 좌파 지식인들과는 소비에트 및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한 입장 차이로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장 폴 사르트르와도 결별했다. 그래서 축구에 대한 카뮈의 말에는 파리 생활에 대한 환멸이 담겨 있는 듯하다.
카뮈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골키퍼를 하면서) 공은 항상 내가 예상한 방향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은 뒷날 아무도 공정하게 풀레이하지 않는 프랑스 본토에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카뮈는 축구 경기의 단순한 도덕성이 지식인들의 이념적 사상적 논쟁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담배 연기 자욱한 파리의 카페보다 땀투성이 축구 경기장이 더 정직한 윤리적 공간이라고 여겼다. 카뮈가 말한 "도덕과 의무"는 자신이 보기에 프랑스 지성계에는 없는 축구의 미덕, 즉 서로 믿고 의지하는 진한 동료애,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페어플레이 정신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카뮈는 축구의 부조리를 통해 어떻게 위안을 얻었는가
영국의 논픽션 작가 M. M. 오웬은 <카뮈는 축구의 부조리를 통해 어떻게 위안을 얻었는가>라는 글을 통해 '부조리' '반항' 등 카뮈 사상의 핵심 단어를 사용해 그의 축구 사랑을 분석했다. 카뮈의 대표적 저서 <시지프 신화>에서처럼, 축구는 카뮈에게 "신을 부정하고 바위를 끌어올리는 일"이었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면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내던져진 시지프와 같은 존재가 된다. 어찌 보면, 90분간 목숨을 걸고 미친 듯이 공을 쫓아 달리는 것, 공을 네트 안에 넣는 숫자를 그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두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부조리한) 일일 지도 모른다.
축구는 부조리한 삶의 축소판이다. 경기장은 그 자체로 부조리한 공간이다. 공은 언제나 의도와 달리 원치 않는 방향으로 튀어버린다. 특히 골문을 지키는 파수꾼인 골키퍼는 가장 외로운 존재다. 선수들은 경기 시간 내내 커다란 바위를 가파른 언덕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 한번 경기에서 이긴다고 해도 계속 이길 수는 없다. 바위를 다시 언덕 위로 굴려야 한다. "카뮈는 몸으로 하는 이 육신의 드라마에서 삶의 충만함과, 모든 비애와, 모든 구원의 은총을 목격했다. 카뮈는 절망이나 망상에 굴복하지 않고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원했다. 그는 축구의 그 즐거운 비합리성을 즐겼다"고 오웬은 짚었다.
소설가 김훈은 유명 사진작가 그룹 매그넘의 축구 사진들에 글을 붙여 <공차는 아이들>이란 책을 펴냈고, '공차기의 행복' 등 축구에 대한 적지 않은 글을 남겼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문득문득 카뮈가 겹쳐져 다가온다. "공을 차는 아이들은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풀싹처럼 어여쁘다. 공을 쫓는 아이들의 동작에서, 생명으로 태어난 것들의 기쁨의 언어가 터져나오고 있다." "뜬 공을 향해 몸을 날릴 때, 그리고 다시 땅에 내려와 닿을 때, 나는 내 몸의 한계와 속박에서 자유로웠다. 속박과 그 속박을 벗어나려는 꿈이 이 아름다운 동작을 빚어낸다. (…) 공은 억압할 수 없는 생명의 충동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그중에서도 2006년 그리스 크레타 공항 대합실에서 월드컵 경기 텔레비전 중계를 지켜보고 쓴 글은 카뮈, 그리고 시지프의 모습과 선연히 겹쳐진다. "공을 놓친 골키퍼가 홀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육신이 내뿜는 한 가닥의 맹렬한 적막이 관중의 함성을 뚫고 치솟는 듯했다. 그는 외로워 보였지만, 비참하지는 않았다. 그의 패배와 그의 추락에는 치욕이 스며들어 있지 않았다. 그의 적막은 외로움이라기보다는 순결이었다. (…) 그는 쓰러졌던 두 다리로 쓰러졌던 자리를 딛고 다시 일어섰다. 실패한 골키퍼는 뒤로 돌아섰다. 돌아선 그의 어깨는 정직하고도 단순했다. 혼자서 감당하는 자의 빛나는 어깨였다."
카뮈는 자신의 고향 알제리를 닮은 남프랑스 루르마랭 지방을 사랑해서 노벨상에서 받은 상금으로 그곳에 집을 한 채 구했다. 일요일마다 들판 가장자리에서 지역 클럽의 아이들이 훈련하거나 이웃 마을 팀과 경기를 하는 것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1960년 1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숨진 자동차 안에는 그가 쓰고 있던 자전적 소설 <최초의 인간>의 미완성 원고가 있었다. 카뮈는 사고가 난 뒤 이틀 뒤 루르마랭에 있는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장례 행렬의 선두에는 아내 프랑신, 형 뤼시엥, 오랜 친구인 시인 르네 샤르가 섰다. 그리고 지역 축구 선수들이 그의 관을 운구했다.
2편 ->> 축구에 대한 두 시선, 카뮈와 에코…그리고 대통령실 만찬을 보며 2
<편집자 주> 김종구 언론인은 1988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서 한겨레21 편집장, 한겨레신문 편집국장, 편집인,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남서울대 객원교수, 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로 매스컴과 글쓰기 등의 강의를 하고 있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실린 글입니다.
* 원문 보기 : https://n.news.naver.com/article/002/0002269223?type=main
편집 : 김미경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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