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년 전 ‘보은집회’(1893)는 ‘촛불 혁명’의 뿌리

<공익 공간 삼각지>에서 교사 아카데미 선생님들과 함께한 박용규 박사(검은 정장에 목댕기 맨 분)(출처 :하성환)
<공익 공간 삼각지>에서 교사 아카데미 선생님들과 함께한 박용규 박사(검은 정장에 목댕기 맨 분)(출처 :하성환)

〚좋은 세상 연구소〛 산하 <3-4월 교사 아카데미> 다섯 번째 강의 주제는 「‘근대 민주 인민’의 탄생, 동학사상, 동학 농민 혁명」이다. 지난 토요일(4/22) 「공익공간 삼각지」에서 열렸다. 강사는 박용규 박사(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로 독립운동사 전공자다. 그는 최시형, 전봉준을 위시해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전한 농민들을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추서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실천적 지식인이다.

그는 70년 동안 야산에 방치된 독립유공자 이윤재 선생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활동한 참 지식인이다. 글쓴이가 알기로 일본군 위안부 수요시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일본 정부를 규탄했던 최초의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이번 전봉준, 최시형을 위시해 2차 동학농민군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를 위한 투쟁도 벌써 5년째를 맞고 있다. 그는 세 번씩이나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보훈처는 낡은 내규를 들이밀며 받아주질 않고 있다.

보훈처 심사위원 학자들이 내미는 보훈처 내규는 이병도(서울대), 신석호(고려대) 등 친일 사학자들이 60년도 더 지난 시절에 만든 낡은 기준이다. 그들이 박정희 정권 공훈 심사위원으로 일할 당시, ‘항일 독립운동의 시작을 을미의병(1895)부터’라고 내규로 정한 탓이다.

보훈처 내규는 오늘날 한국 사학계에선 수용할 수 없는 철 지난 학설이다. 항일 독립운동의 출발점을 갑오의병(1894. 8)과 제2차 갑오 농민혁명(1894. 9)으로 한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 한국 사학계 정설이다. 그에 맞춰 고교 한국사 9종 교과서에도 제2차 동학농민혁명을 ‘항일 구국 투쟁’으로 기술하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이 보는 미래앤 출판사 『한국사』 교과서 196쪽에도 제2차 동학농민혁명을 '항일구국투쟁'으로 기술하고 있다(출처 : 하성환)
전국에서 가장 많이 보는 미래앤 출판사 『한국사』 교과서 196쪽에도 제2차 동학농민혁명을 '항일구국투쟁'으로 기술하고 있다(출처 : 하성환)

학문 정의가 왜곡된 불의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오늘도 박용규 박사는 분투한다. 그의 격정 넘치는 강연을 글쓴이의 부족한 능력이지만 여기에 일부라도 옮기고자 한다. 좀 더 많은 시민들이 함께 읽고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작은 힘을 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학사상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가 내걸었던 ‘보국안민’(輔國安民)은 서양과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고자 한 주체적 표현이다. 송나라 개혁정치가 왕안석이 처음 내건 ‘보국안민’(輔國安民)은 ‘보국안민’(保國安民)이 아니다.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평안히 하게 한다는 ‘보국안민’(保國安民)이 아니라, ‘나라를 도와 잘못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내걸었다.

최제우는 19세기 중엽 몰락한 경주 양반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며 성리학에 능통했던 당대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지식인이었다. 그러함에도 조선의 성리학이 죽은 학문이자 낡은 이데올로기임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는 ‘사람을 하느님처럼 모시라’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주장하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인간 ‘절대 평등사상‘을 부르짖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지 않는 사회”, 바로 만인 평등 세상을 지향했다.

수운 최제우가 쓴 <용담유사>를 들고 해설하는 박용규 박사(출처 : 하성환)
수운 최제우가 쓴 <용담유사>를 들고 해설하는 박용규 박사(출처 : 하성환)

나아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주체 역시 수운이 『용담유사』 「안심가」에서 표현한 대로 “개 같은 왜적놈들”과 맞서는 자신과 절대다수 인민에게 있다고 역설했다. 잘못되어 가는 나라를 바로 잡는 사회변혁의 주체를 특정 지배계층이나 군주가 아니라 ‘인민’ 자신에게 있음을 선포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사건으로 ‘인민’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평등 세상을 외친 혁명의 언어였다.

결국 그는 수배를 당했고 쫓기는 신분임에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써서 자신의 사상을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성경이나 불경, 그리고 코란과 달리, 제자들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자기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스승 수운의 가르침 그대로 목숨처럼 보존하고 계승했다.

수운 최제우는 자신이 주장한 ‘인내천’ 사상을 몸소 실천하며 살았다. 자신이 부리던 여자 노비 두 명을 해방 시켜 한 명은 며느리로 삼았고 다른 한 명은 수양딸로 받아들였다. 당시로선 경천동지하고 천지개벽할 사건이었다. 수운이 보여준 실천적 삶은 당대 경주지역을 비롯해 지배 세력의 증오와 적의의 표적이 되었다. 조선 사회 ‘신분제’ 질서에 정면 도전한 결과였다. 결국 그는 1860년 동학사상을 창도한 지 4년째 되던 1864년 관아에서 망나니들 칼에 효수된 채 참형을 당한다. 수운의 잘린 머리는 밧줄에 높이 매인 채, 오가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수운 선생이 주창한 ‘시천주’, ‘인내천’ 사상, 그리고 최시형 선생의 ‘인시천’, ‘사인여천’, ‘삼경’사상, ‘유무상자’ 사상은 박용규 박사의 표현을 빌면 우리 민족이 낳은 “보물 같은 사상”이자 세계정신을 이끌어갈 “세계 시민 사상”으로 그 위대함이 자못 크다.

특히 삼경 사상은 인간을 넘어서서 자연환경까지 존중하고 공경하는 사상으로 오늘날 녹색당의 당 강령과도 상통한다. 유무상자 사상은 자본주의 빈부격차를 뛰어넘는 계급 평등 사회를 지향하는 사상이다. 요컨대 수운이 창도하고 해월이 구체화 시킨 동학사상은 인간 사회 분쟁과 갈등을 최소화하고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서로 하느님처럼 존중하는 사상이다. 나아가 서로 도우며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평등 세상을 지향한다.

18세기 루소가 쓴 사회계약론을 항상 들고 다녔던 로베스피에르가 꿈꾼 프랑스 시민혁명은 여성의 인권이 배제된 반쪽짜리 혁명이었다. 다시 말해 프랑스 인권 선언은 프랑스 남성 시민계급을 위한 인권 선언이자 그들 시민계급만의 평등사상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여성 참정권 운동가 올랭프 드 구즈는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여성들 또한 의정 연설 연단에 오를 권리도 당연히 있다”고 역설했다. 그녀는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은 권리가 존재한다며 투표권을 주장하다가 단두대에서 이슬처럼 사라졌다. 프랑스 사회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이 주어진 시기는 1946년! 20세기 들어와서 한참 뒤 일이다. 그런 점에서 수운은 ‘근대 인민의’ 탄생을 외친 제1세대 인민이자 그가 역설한 ‘인내천’ 사상은 인간 평등사상, 나아가 남녀 평등사상으로 세계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스승 수운의 사상과 실천은 수제자 해월 최시형에게 전수되었다. 최시형은 어린 시절 어머니, 아버지를 차례로 여의고 12살에 고아가 되었다. 최시형은 본명이 최경상인데 최제우와 먼 일가였다. 최제우가 청년 최시형을 거두어 자신의 제자로 삼아 돌보았다. 최시형은 동학에 입도하고 최제우의 수제자가 된 이후 1864년 스승이 참형을 당하자 스승의 가족을 돌보았다. 그리고 1875년엔 최시형으로 개명했다.

최시형은 셋째 부인 사이에 낳은 아들 최동희, 최동호 두 형제를 두었다. 그들 형제 모두 27살, 37살 젊은 나이에 순국한 항일독립투사로 독립유공자다. 최동호는 극악한 물고문으로 27세에 순국했고 최동희는 송암 오동진 장군과 함께 고려혁명당 활동을 하다 폐병으로 순국했으니 삼부자 모두 항일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최시형은 수제자 손병희와 처남 매부 사이다. 손병희의 여동생 손소사가 최시형의 세 번째 부인이다.

최시형은 관군에 쫓기는 은둔과 피신 생활 도중에도 교세를 확장했다. 그가 강원도 인제로 피신했을 1880년에 『동경대전』을 간행했다. 그리고 이어서 충북 단양으로 피신했을 이듬해에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갑신정변(1884)으로 탄압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포교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1885년엔 강원도에서 충북 보은으로 동학 본거지를 옮겼다.

그는 포교 활동 중에도 세 번에 걸쳐 스승 최제우의 교조 신원 운동을 펼쳤다. 1892년 11월 전주 삼례역에서 교조 신원 운동과 함께 포교의 자유, 그리고 탐관오리 처단을 청원했다. 이듬해 2월에는 40명이 넘는 접주, 대접주들이 동학을 대표해 경복궁에 집결, 사흘 밤낮을 통곡하며 직접 상소를 제기했다. 그때마다 조정은 들어줄 듯하면서 오히려 탄압을 가해왔다.

최시형은 스승의 ‘인내천’ 사상을 이어받아 ‘인시천’(人是天) 사상과 ‘사인여천’(事人如天), 그리고 ‘삼경’(三敬) 사상을 역설했다. 사람이 바로 하느님이니 사람을 하느님처럼 섬길 것을 강조했다. 그는 나아가 여성 인권을 주창했다. “며느리가 베를 짜는 소리는 하느님이 베를 짜는 소리”라 하여 ‘천주직포설’(天主織布說)을 강조했다. “며느리 인격을 하느님처럼 존중하라”는 최시형의 가르침은 여성 인권 운동 그 자체였다.

박용규 박사가 해설한 최시형 선생의 <천주직포설> 파워포인트 자료(출처 : 하성환)
박용규 박사가 해설한 최시형 선생의 <천주직포설> 파워포인트 자료(출처 : 하성환)

그의 가르침은 동학교도들에게 널리 퍼지면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여성도 혁명군에 참여했다. 전남 장흥 지역 동학농민혁명 전투에 ‘이소사’라는 부인이 동학혁명군으로 참전한 사례가 그렇다. 그뿐만 아니라 최시형은 어린이 인권도 존중할 것을 역설했다. 3대 교주 손병희의 사위, 소파 방정환 선생이 천도교 교인으로서 천도교 기관지 『개벽』을 창간했고 「천도교 소년회」를 창단했으며 「어린이날」을 제정했다. 나아가, 「어린이」 잡지를 만들어 어린이 인격을 존중할 것을 역설했다. 이 역시 모두 동학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람은 곧 하느님이기에 적서의 차별, 여성에 대한 차별, 어린이에 대한 차별은 동학의 가르침이 아님을 강조했다. 최시형은 조선 사회처럼 “적서 차별은 집안을 망하게 하고 반상의 차별은 나라를 망치는 근본이라” 결코 하느님 뜻이 아님을 역설했다. 그리하여 1865년 10월 28일 해월 선생은 ‘신분제 철폐’를 외치며 모든 인간은 하느님처럼 평등하게 태어났음을 선포했다. 10월 28일은 신분제에 대해 최시형 선생이 사망선고를 내린 날이다. 10월 28일을 우리가 특별히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이유이다.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도, 율곡 이이도, 심지어 성리학을 비판한 다산 정약용도 노비제도를 옹호했다. 실제로 그들은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다. 심지어 다산은 영조 때 완화된 종모법이 시행되자 이에 반발해 종부종모법인 일천즉천(一賤則賤)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목민심서』에서 주장할 정도로 신분제 질서에 상당히 고루했다. 18세기를 살았던 루소보다 19세기 전반기를 살았던 후대 인물임에도 당대 내로라하는 지식인으로서 다산 정약용의 한계가 아닐 수 없다.

최시형은 교세 확장에 힘입어 1893년 3월 13일부터 4월 2일까지 무려 20일 동안 ‘보은집회’를 주도했다. 비폭력 평화 시위였는데 최소 2만 명에서 최대 8만 명이 운집한 집회였다. 이날 집회에서 “척양척왜, 탐관오리 척결, 민씨 축출”을 외쳤다. ‘보은집회’를 계기로 동학운동이 순전히 종교의 자유를 외친 신앙 차원을 넘어서서 정치운동으로 변모해 갔다.

1893년 3월-4월 수만 명이 운집한 <보은집회>는 평화시위이자 광장 민주주의로 2016-2017 촛불혁명의 시원이자 정신적 뿌리이다.
1893년 3월-4월 수만 명이 운집한 <보은집회>는 평화시위이자 광장 민주주의로 2016-2017 촛불혁명의 시원이자 정신적 뿌리이다.

놀라운 사실은 20일 동안 집회를 개최하는 동안 민중들은 대소변을 본 뒤에 땅에 묻고 가래침도 땅에 묻었으며 검불 하나 없이 수만 명이 운집한 집회를 깨끗하게 정리하였다. 당시에 떡장수와 엿장수가 많았는데 떡 광주리와 엿판에 사람들은 정직하게 한 푼도 어김없이 돈을 놓고 갔다고 했다.

20일 동안 열린 평화 시위이자 광장 민주주의 <보은집회>(1893)는 <근대 민주 인민>이 탄생한 최초 집회였다(출처 : 하성환)
20일 동안 열린 평화 시위이자 광장 민주주의 <보은집회>(1893)는 <근대 민주 인민>이 탄생한 최초 집회였다(출처 : 하성환)

이는 마치 2016년 –2017년 촛불 혁명 당시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130년 전 ‘보은집회’(1893)는 민중들의 평화 시위이자 자유롭게 담론을 펼쳤던 광장 시위로 근대 ‘민주 인민’이 탄생한 최초 집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보은집회’(1893)는 2016-2017년 촛불 혁명의 시원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집권층의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결국 고부 접주 전봉준이 최제우의 ‘다시 개벽’을 ‘다시 좋은 세상’으로 표현하며 “모든 사람을 하느님으로 대우하는 세상, 신분제 없는 세상, 귀천 차별이 없는 세상, 인신매매 없는 세상, 빈부 차이가 없는 세상, 외적을 불러들이지 않는 세상, 좋은 정부를 만들어 갖는 세상”을 천명했다.

2021년 1월  박용규 박사가 펴낸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 책 표지 (출처 : 인간과 자연사)
2021년 1월  박용규 박사가 펴낸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 책 표지 (출처 : 인간과 자연사)

그는 1893년 11월 사발통문을 작성해 민중 봉기를 촉구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을 효수하고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해 인민을 고통에 빠트리는 탐관오리를 격징한 뒤, 전주 감영을 접수하고 서울로 진격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1894년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반봉건’을 기치로 전주를 점령한다. 그렇지만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일대 ‘인민 자치’의 효시인 집강소를 설치해 폐정개혁안을 시행한다. 그러나 1894년 7월 23일 새벽녘, 일본군은 혼성 여단 병력으로 서울 도성을 포위한 채, 경복궁을 점령했다. 왕궁수비대와 교전 끝에 조선 군사 17명을 사살하고 60명 넘는 살상을 저지르며 고종과 명성황후를 볼모로 삼았다.

전제 군주 사회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조선의 정궁을 침탈한 사건으로 전봉준과 최시형에겐 크나큰 충격이었다. 이에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2차 거병을 감행했다. 이른바 ‘반제 반외세’를 기치로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남접과 북접이 논산에 집결해 총사령관 전봉준, 부사령관 손병희는 서울 진격로 공주 우금티를 향했다. 우금티에 주둔한 관군과 일본군을 향해 접전을 벌이지만 우금티 전투는 화력의 열세로 참패한다. 스나이더 소총과 무라타 소총, 최신식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앞에 동학농민군의 화승총은 속수무책이었다.

2021년 7월 5일 서울지방 보훈처 앞에서 피켓 시위 중 기념 촬영한 박용규 박사(맨 왼쪽), 최인경 단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박용규 박사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인 전봉준, 최시형을 비롯해 농민군들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야 한다고 연구 발굴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최인경 단장은 최시형 선생의 직계 고손이다.(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2021년 7월 5일 서울지방 보훈처 앞에서 피켓 시위 중 기념 촬영한 박용규 박사(맨 왼쪽), 최인경 단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박용규 박사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인 전봉준, 최시형을 비롯해 농민군들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야 한다고 연구 발굴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최인경 단장은 최시형 선생의 직계 고손이다.(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따라서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사건에 분노해 의병을 일으킨 갑오의병(1894. 8)에 이은 2차 동학농민혁명(1894.9)은 항일 구국 투쟁이자 항일 독립운동이다. 따라서 우금티 전투, 태인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일본군에 체포돼 교수형, 화형, 작두형, 참형으로 희생된 동학농민군을 독립유공자 반열에 속히 올려야 한다. 을미의병에 참여한 양반들 145명은 모두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했으면서 평민들인 동학농민군에 대해 단 한 명도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하지 않는 것은 일국의 보훈 정책으로서 매우 옹졸한 보훈 행정이 아닐 수 없다.

반제 반외세 ‘항일 구국 투쟁’인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25년 뒤 3·1혁명으로 이어진다. 3·1혁명 당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5명이 천도교(동학) 교인으로 그중에 손병희를 비롯해 9명이 제2차 동학농민혁명 우금티 전투에 참전했던 인물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3·1혁명은 당시 신도수 100만 명에 기반한 천도교가 실질적으로 주도한 항일 독립운동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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