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묘비명 “전봉준 장군 서훈에 헌신한 사람” 박용규 선생

내가 그를 만난 곳은 여의도고등학교다. 2012년 그 학교에 부임했고 교무실이 달라서 1년 동안 서로 얼굴도 모른 채 지냈다. 2013년에 연구부(1층)에서 1학년부 교무실(2층)로 옮겼다. 박용규 선생은 생활지도부(3층)에서 진로상담부(5층) 내 직업반 담임으로 이동했다. 점심시간 천 명이 넘는 소란을 피해 조용한 공간을 탐색했다. 우연히 5층 복도 맨 끝 교실을 발견했다. 교실이라기보다 꾸민 것 없는 조그만 방이다. 다섯 평 정도 되는 방인데 평소엔 비어있다가 직업학교 학생들이 등교하는 월요일에만 작은 교실이 되는 그런 공간이다.

<조선어학회> 목대잡이 이극로 선생(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이극로 선생은 조선 최고의 국어운동가다.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지만 평생 국어 연구와 국어운동에 모든 걸 바쳤다. 귀국 후 안정된 보성전문학교장직을 제안받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거절했다. 아내가 교사였기에 오롯이 아내가 경제적으로 가정을 뒷받침했고 그는 자신과 아내의 결혼 기념 반지와 이동휘 선생이 선물로 준 망원경조차 전당포에 맡겨 조선어학회 자금으로 썼다. 조선어학회 사건(1942-1943) 당시 물고문, 비행기 태우기 등으로 일곱 번 혼절할 정도로 고문을 받았고 징역도 가장 센 6년형을 받았다. 해방되지 않았으면 옥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해방 이틀 뒤 들것에 실려나왔다. 우파 민족주의자임에도 북을 선택한 인물이다. 오늘날 남북이 분단된 지 78년이 지났음에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은 남쪽(최현배)과 북쪽(이극로, 이만규)에서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주시경의 언어민족주의에 입각한 일관된 정책을 추진해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조선어학회> 목대잡이 이극로 선생(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이극로 선생은 조선 최고의 국어운동가다.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지만 평생 국어 연구와 국어운동에 모든 걸 바쳤다. 귀국 후 안정된 보성전문학교장직을 제안받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거절했다. 아내가 교사였기에 오롯이 아내가 경제적으로 가정을 뒷받침했고 그는 자신과 아내의 결혼 기념 반지와 이동휘 선생이 선물로 준 망원경조차 전당포에 맡겨 조선어학회 자금으로 썼다. 조선어학회 사건(1942-1943) 당시 물고문, 비행기 태우기 등으로 일곱 번 혼절할 정도로 고문을 받았고 징역도 가장 센 6년형을 받았다. 해방되지 않았으면 옥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해방 이틀 뒤 들것에 실려나왔다. 우파 민족주의자임에도 북을 선택한 인물이다. 오늘날 남북이 분단된 지 78년이 지났음에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은 남쪽(최현배)과 북쪽(이극로, 이만규)에서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주시경의 언어민족주의에 입각한 일관된 정책을 추진해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013년 어느 봄날 한강 전망이 좋은 5층을 찾았다. 그리고 5층 끝 조용한 방에 들어가 쉬었다. 행복한 점심시간이 지나고 예비종이 울렸을 즈음, 5층 작은 방을 나왔을 때 박용규 선생이 나를 불렀다. 박용규 선생은 조심스레 ‘이극로’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답했다.

배화여고보 교무주임 시절 야자 이만규(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야자 이만규는 개성에서 외과의사였지만 항일민족주의 교육운동가로 변신 후, 해직 당시 방대한 사료를 섭렵해 전무후무한 교육사서 <조선교육사>(상, 하)를 집필했다. 해방 공간 조선 최고의 교육자로 이만규, 이극로, 백남운 3인을 꼽는 데 이견은 없다
배화여고보 교무주임 시절 야자 이만규(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야자 이만규는 개성에서 외과의사였지만 항일민족주의 교육운동가로 변신 후, 해직 당시 방대한 사료를 섭렵해 전무후무한 교육사서 <조선교육사>(상, 하)를 집필했다. 해방 공간 조선 최고의 교육자로 이만규, 이극로, 백남운 3인을 꼽는 데 이견은 없다

그러자 ‘이만규’를 아느냐고 다시 물었다. 순간 ‘이만규’라! ‘이만규’는 월북한 항일 교육자다. 교육학과 2학년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이만규의 『조선 교육사』를 읽은 적이 있다. 대학 4년 동안 교육학과 교수들 가운데 ‘이만규’를 언급한 사람은 단 한 분도 없었다. 아예 관심조차 없었던 시절이다. 따라서 교사들 역시 ‘이만규’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이다.

그런데 박용규 선생이 느닷없이 ‘이만규’를 이야기하다니... 갑자기 박용규 선생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헤어지는 순간 그는 자신이 쓴 논문 「민족주의 교육사상가 이만규」를 읽어 보라고 권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박용규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민족주의 교육사상가 이만규」는 1993년 『역사비평』에 실린 논문이다. 집에 가서 단숨에 읽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박용규 선생은 ‘이극로’를 연구해 2009년 고려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분이다. 그렇게 2013년 간간이 5층 조용한 방을 오가며 박용규 선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니 ‘이만규’와 ‘이극로’를 매개로 교제하며 교육자로서 우정을 나눴다. 그러다 2014년도엔 생활지도부(3층)로 옮기게 되었는데 박용규 선생이 바로 옆자리로 왔다. 글쓴이는 1학년 사안(징계) 담당이고 박용규 선생은 2학년 사안(징계) 담당으로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2014년 어느 날은 자신의 연구논문을 거의 베끼다시피 통째로 표절한 경북대 어느 교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나는 옆에서 지식을 도둑질한 것이라고 맞장구치며 함께 성토했다. 그런데 어쩌랴! 마음속으론 “그게 학계 비일비재한 관행들인 걸!”하면서 씁쓸해했다. 그러나 박용규 선생은 가만 있질 않았다. 그 경북대 교수로부터 잘못을 인정받고 사과를 받아 내는 게 아닌가! 어떻게 하면 싸움에서 승리하는지 그 지혜로운 방법을 아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2014년 박근혜 정권과 정면 충돌했던 시절, 전교조 여의도고등학교 조합원 선생님들과 함께한 집회(출처 : 하성환)
2014년 박근혜 정권과 정면 충돌했던 시절, 전교조 여의도고등학교 조합원 선생님들과 함께한 집회(출처 : 하성환)

2014년은 4·16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해다. 우리는 틈나는 대로 둘이서 박근혜 정권을 질타했다. 더구나 그해 10월엔 『한국사』 국정제 시도가 꿈틀대던 시절이자 거기다 공무원 연금개악이 강행되던 시절이었다.

<박근혜 정권 타도>를 외치며 <제1차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2015년 11월 14일 전교조 조합원 교사들이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출처 : 하성환) 이날 경찰이 쏜 물대포는 강렬한 최루액이 들어있어서 비록 빗맞아도 눈을 뜨기가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불행하게도 이날 우리밀 농사를 짓던 민주화운동가 백남기 농민은 경찰이 쏜 잔인한 물대포에 비극을 맞았다.
<박근혜 정권 타도>를 외치며 <제1차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2015년 11월 14일 전교조 조합원 교사들이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출처 : 하성환) 이날 경찰이 쏜 물대포는 강렬한 최루액이 들어있어서 비록 빗맞아도 눈을 뜨기가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불행하게도 이날 우리밀 농사를 짓던 민주화운동가 백남기 농민은 경찰이 쏜 잔인한 물대포에 비극을 맞았다.

2013년도 전교조를 합법노조에서 법외노조로 밀쳐낸 사건과 함께 당시 전교조는 박근혜 정권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박용규 선생은 가끔 오마이뉴스에 기고도 했다. 특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이길상 박사가 ‘이만규’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기고하자 즉각 문헌 고증을 통해 장문의 반박 기사를 썼다. 그리고 일찌감치 이만규 선생의 『조선 교육사』를 펴냈던 심성보 교수(부산교대)와도 연락하며 이길상 교수의 글을 비판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글쓴이는 국회도서관이 여의도고등학교에서 가까운 곳이라 자주 들렀다. 걸어서는 20분 거리였고 자전거를 타고 한강 변으로 가면 5분 거리였다. 점심도 당시 4천 원인데 무척 잘 나왔다. 점심도 먹을 겸 들른 적도 있지만 학교 마치고 해방감을 안고 국회도서관을 찾을 때가 많았다. 박용규 선생을 통해 자극을 받은 탓일까?... 갑자기 대학 2학년 때 만났던 ‘이만규’를 30년이 지나 다시 호출했다. ‘이만규’ 선생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려는 욕망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이만규와 국내 절친인 여운형에 대해 지적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 같다.

자료 검색을 하다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이길상 교수에게 학위논문 지도를 받았던 어느 여성이 이만규 선생의 여성관을 비판하는 논문을 접하고 놀랐다. 지도교수의 영향 탓인지 그 여성도 이만규 선생이 쓴 『가정 독본』을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었다. 축첩제도를 비롯해 봉건성을 떨치고 교육과 결혼생활, 가정생활에서 남녀평등을 강조하며 사회참여를 독려하는 여성관이 이만규 선생의 관점이었음에도 하나같이 봉건성을 면하지 못한 인물로 비판하는 논조였다. 지도교수의 단단한 껍질을 벗고 세상 밖으로 나오질 못한 느낌이었다.

2013년 어느 날 박용규 선생은 자신이 발굴한 15세 최연소 항일 투사 ‘주재년’ 열사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2012년도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여줬다. 일제강점기 항일투사 주재년은 “일본 섬 놈들은 망한다”며 “조선과 일본은 다르다”고 바위에 글씨를 새겼다. 그 일로 여수경찰서로 연행돼 넉 달 동안 배후를 대라며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지 한 달 만에 순국했다.

주재년 열사의 무덤은 바위글씨를 남긴 목화밭 근처 골짜기에 있다(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주재년 열사의 무덤은 바위글씨를 남긴 목화밭 근처 골짜기에 있다(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2012년 4월은 여수에 ‘주재년 기념관’이 건립된 해다. 박용규 선생은 2007년 직접 여수를 현지 방문해 소년 항일 투사 ‘주재년’이 살았던 공간을 찾아갔다. 그리고 생존한 친척 인터뷰도 따올 정도로 열성을 다했다. 발로 뛰며 연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 면에서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학자로서 학문하는 자세가 반듯하고 신실했다.

어느 날은 자신이 존경하는 「조선어학회」 목대잡이(지도자의 순우리말) ‘이극로’ 선생 사진이 자신이 소장한 사진 자료보다 훨씬 선명하다며 그 사진을 구하러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관」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학교 마치고 양평 쪽 경의중앙선을 타고 그 먼 길을 가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선명하게 나온 사진 한 장을 가져온 것에 매우 흐뭇해하던 그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박용규 박사의 역작 <조선어학회 항일투쟁사> 책 표지(출처 : 하성환) 조선어학회 사건(1942-1943)을 연구한 박용규 박사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언어독립투쟁>으로 그 성격을 규정했다. 피검된 조선어학회 관계자 33인에 대한 무지막지한 고문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33인 인물에 대해 개인별로 세밀하게 연구된 보기드문 저작물이다.
박용규 박사의 역작 <조선어학회 항일투쟁사> 책 표지(출처 : 하성환) 조선어학회 사건(1942-1943)을 연구한 박용규 박사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언어독립투쟁>으로 그 성격을 규정했다. 피검된 조선어학회 관계자 33인에 대한 무지막지한 고문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33인 인물에 대해 개인별로 세밀하게 연구된 보기드문 저작물이다.

박용규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을 전공한 학계의 권위자다. ‘이만규’ 선생에 대한 논문도 무려 4편이나 학술잡지에 발표한 학자로서 다른 사람이 범접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이만규’ 선생을 일찌감치 80년대 후반 책으로 출간한 심성보 교수조차 ‘이만규’ 관련 논문이 두 편에 그칠 정도였다. 80년대까지 이만규 관련 논문은 매우 척박했다. 30년도 더 지난 지금도 큰 차이는 없지만 그래도 일제강점기 시절 이만규의 항일교육 투쟁사는 그 실체가 규명된 셈이다. 오롯이 박용규 선생의 공이 컸다.

실제로 그는 이만규에 대한 1차 자료를 수집하고자 이만규 선생의 고향인 강원도 원주를 여러 차례 답사차 다녀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박용규 선생은 국가가 외면하고 방치한 항일 독립투사들을 발굴해 국가보훈처에 직접 서훈을 촉구했다. 다시 말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추서하는 데 주저함이 없이 앞장섰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후손을 발굴해 일일이 찾아가 인터뷰했다. 먹고살기 바빠서 자신들 조상에 대해 무관심한 후손들은 직접 설득하기도 했다. 겨우 설득해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를 작성하고 독립유공자 등록 신청서도 작성해 보훈처를 찾아간 것도 여러 차례로 기억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10만 어휘를 뜻풀이한 『조선어사전』(1938)을 펴낸 문세영의 후손을 최초로 찾아간 것도 박용규 박사였다. 문세영이 만든 『조선어사전』은 60년대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전이다. 그러나 두 차례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추서 받도록 애썼음에도 보훈처로부터 거부당했다. 6·25 때 행불자로 처리돼 납북됐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윤재 선생을 대구 야산에서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안장했을 때 찍은 기념사진. 정 중앙 여성 왼쪽 옆에 있는 이가 박용규 박사다.(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이윤재 선생을 대구 야산에서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안장했을 때 찍은 기념사진. 정 중앙 여성 왼쪽 옆에 있는 이가 박용규 박사다.(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2014년 5월에 대구 인근 야산에 방치된 항일 투사를 국립묘지로 모셔서 안장하기도 했다. 바로 항일 독립투사 이윤재 선생이다. 이윤재 선생은 「조선어학회」 33인 가운데 한 분으로 함흥경찰서로 끌려가 모진 고문과 악형을 당했던 사학자이자 국어학자다. 문세영이 최초로 출간한 「조선어사전」을 일일이 교정보며 도움을 주었던 인물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노산 이은상의 스승이다. 제자인 이은상이 일제강점기 변절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스승이 감옥에서 어떻게 견디며 죽어갔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윤재 선생은 예심 재판도 열리기 전에 감옥에서 순국했다.

2014년 7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사이에 건립된 <조선어학회 항일기념탑>(출처 : 하성환)
2014년 7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사이에 건립된 <조선어학회 항일기념탑>(출처 : 하성환)

박용규 선생은 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인물들을 발굴해 서훈을 추서 받도록 고군분투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권덕규, 신영철, 그리고 창씨개명에 격분해 자결로써 항거한 신명균 등이다. 월북한 국어학자 이극로, 이만규, 정열모는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한 상태로 애석해한다.

그가 쏟은 각고의 노력으로 2014년 7월에 건립된 항일기념물이 광화문에 있는 ‘조선어학회 항일기념탑’이다. 당시 서울시 공무원들이 ‘항일’이란 말에 거부감을 느꼈던지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탑’이란 애매한 표현으로 문구를 새겨넣자 홀로 탄식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박용규 선생은 2014년도를 마지막으로 홀연히 학교를 떠났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학교를 떠나면서 목포에 있는 가톨릭 계통 고등학교인 모교에 1,000만 원을 기부했다.

사연인즉슨 박용규 선생은 전남 신안군이 고향이다. 그곳 지도읍에서 초중학교를 졸업했다. 형은 아버지가 목포고등학교로 진학하게 했는데 정작 자신은 중학교를 졸업하자 부친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고 했다. 중학교를 전체 2등으로 졸업했음에도 가난이 발목을 잡았다. 그때 중학교 담임 선생님께서 목포에 있는 가톨릭 계통 고등학교를 소개하며 기숙사비 포함 3년 전액 무상으로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응모해 보라 하셨다.

그렇게 3년을 고등학교에서 무상으로 먹고 자고 공부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자신에게 장학금을 보내준 분들은 천주교 신앙을 지닌 오스트리아 평범한 여성들이 십시일반 보내준 성금이었다. 그는 그 순간 인류애를 몸소 체험했다고 고백했다. 얼굴도 모르는 먼 나라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장학금을 보내준 그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고 자신도 모교에 1,000만 원을 장학금으로 기부한 것이다. 선이 선을 낳고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을 낳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박용규 박사가 일본군 위안부 수요집회에 참석한 모습(출처 : 하성환) 그는 이날 마이크를 잡고 일본제국주의 만행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부를 통렬히 규탄했다.
박용규 박사가 일본군 위안부 수요집회에 참석한 모습(출처 : 하성환) 그는 이날 마이크를 잡고 일본제국주의 만행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부를 통렬히 규탄했다.

학교를 떠난 이후 어느 날 ‘일본군 위안부’ 수요집회에서 만났다. 마이크를 잡고 일본을 격렬히 성토했다. 아마도 역사학자 가운데 최초의 사건으로 기억한다. 대중 앞에서 일본을 성토한 역사 교사, 정치인은 있었지만 역사학자나 역사학 교수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를 위해 당일 투쟁기금 100만 원도 쾌척한 그였다.

한글학회 개혁을 촉구하며 한글회관(광화문 새문안로 소재) 정문 앞에서 1인 피켓 시위하는 박용규 선생(출처 : 하성환)  옛 전교조 동료 교사들이 지지, 응원하는 모습.
한글학회 개혁을 촉구하며 한글회관(광화문 새문안로 소재) 정문 앞에서 1인 피켓 시위하는 박용규 선생(출처 : 하성환)  옛 전교조 동료 교사들이 지지, 응원하는 모습.

학교를 떠난 2015년부턴 자신의 주된 전공인 「조선어학회」와 관련된 활동에 매진한 듯하다. 특히 2018년 박용규 선생은 한글학회 연구위원으로 재직할 당시 한글학회 회칙에 담긴 한글학회 내부 비리를 폭로하며 ‘한글학회 개혁 국민위원회’를 조직해 영하 17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에도 1인 시위하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결기가 느껴졌고 자신이 몸담은 공간에서 모순과 싸우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2018년 3월 24일 정기총회 당시 <한글학회 > 개혁을 촉구하며 열변을 토하는 박용규 선생(출처 : 하성환)
2018년 3월 24일 정기총회 당시 <한글학회 > 개혁을 촉구하며 열변을 토하는 박용규 선생(출처 : 하성환)

2018년 3월 드디어 한글학회 총회가 열렸다. 글쓴이는 한글학회 직원들로부터 총회 참석을 저지당했다. 순간 기지를 발휘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임을 밝혔다. 그러자 순간 직원들 태도가 바뀌고 입장할 수 있었다. 글쓴이는 그날 한글학회 총회가 열리던 한글회관 지하 강당에서 열변을 토하던 박용규 선생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한글학회는 연구단체이지 한글 운동하는 시민단체가 아니다”는 한글학회 회장(서울대 언어학과 교수)의 발언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결기에 찬 성토였다. 결국 회장 직선제와 한글학회 회칙 개정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 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박용규 선생은 박사학위 논문으로 「조선어학회」 간사를 했던 ‘이만규’ 선생을 쓰려고 했다. 그러다가 「조선어학회」의 실질적 목대잡이가 ‘이극로’ 선생임을 알고 논문주제를 ‘이극로’로 바꾸었다. 그는 『이극로』 고향인 경남 의령에 가서 강연도 했는데 2019년 『말모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크게 분노했다. 조선어학회 대표 ‘이극로’를 상징한 류정환(윤계상 분)이 부유하면서도 부패한 경성 제일중학교 이사장인 친일파의 아들로 묘사돼 나왔기 때문이다.

국회도서관 정문 옆에 있는 영화 <말모이> 홍보 걸개(출처 : 하성환)
국회도서관 정문 옆에 있는 영화 <말모이> 홍보 걸개(출처 : 하성환)

실제로 이극로 선생은 경남 의령의 평범한 빈농 출신이다. 영화 『말모이』가 토박이말을 수집하기 위해 조선 민중의 역할을 크게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역사 사실을 형상화한 빼어난 작품임엔 틀림없다. 그러함에도 시나리오를 썼던 엄유나 감독이 한 번만이라도 박용규 선생을 만났더라면 좀 더 고증을 거쳐 더욱더 사실에 부합하는 멋진 영화를 만들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

무엇보다 박용규 선생은 주시경-이극로(최현배)-허웅으로 이어지는 민족주의 언어학에 관심과 애정이 깊다. 그리하여 철두철미 한글전용론자다. 2015년 박근혜 정권 시절 이희승(이숭녕)-남광우로 이어지는 국한문 혼용 내지 한자 병기를 주장하던 자들이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를 강하게 밀어부쳤을 때 박용규 선생의 투쟁이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반대 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장’을 떠맡아 최전선에서 1인 피켓 시위, 학술대회 개최, 언론 투고, 그리고 전교조 등 관련 70여 개 단체 연대투쟁을 주도했다. 그 투쟁의 결과 박근혜 정권 교육부는 2016년 초등교과서에 한자 병기 도입을 강행하려던 정책을 일시 중단했다. 일시적이지만 그나마 박용규 선생이 최전선에 서서 투쟁한 결실이었다. 그는 지금도 한자능력시험을 주관하며 여전히 한자 병기를 초등교과서에 관철하려는 기득권 단체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6년전 박용규 선생은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50개 단체가 연대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국민연대」(약칭 서훈 국민연대) 상임대표를 맡아 동학농민혁명 2차 전쟁을 연구하며 분투하고 있다.

박용규 박사가 2021년 1월에 펴낸 책 표지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 책 표지(출처 : 인간과 자연사 제공)
박용규 박사가 2021년 1월에 펴낸 책 표지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 책 표지(출처 : 인간과 자연사 제공)

박용규 선생은 2차 동학농민혁명군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야 할 역사적·법적·학문적 정당성을 충분히 간직하고 있음을 역설했다. 특히 그는 나주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 목사와 간사한 향리 토호 세력들이 동학농민군 수백 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음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전라도를 비롯해 전국 119개 지역에 걸려 있는 ‘2차 동학농민혁명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를 촉구하는 펼침막’이 유독 나주에만 내걸려 있지 않다며 나주를 통렬히 비판했다. 그럴만한 역사적 원인이 나주 지역에 축적돼 있다는 과학적 분석과 함께 개탄했다. 이는 나주 시민들이 크게 성찰할 대목이다.

<동학네트워크 정읍문화제>에서 박용규 박사가 <항일투쟁의 총사령관 전봉준 장군 - 독립유공자 서훈해야>라는 주제로 전봉준 장군 고택에서 강연하고 있는 모습(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동학네트워크 정읍문화제>에서 박용규 박사가 <항일투쟁의 총사령관 전봉준 장군 - 독립유공자 서훈해야>라는 주제로 전봉준 장군 고택에서 강연하고 있는 모습(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그뿐만 아니라 역사학계와 역사 교육계를 넘나들며 때론 서명운동으로 호소하고 때론 학술대회와 강연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을 보는 낡은 시각을 교정하며 고군분투했다.

2021년 7월 5일 국가보훈처 서울 보훈청 앞에서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을 촉구하는 피켓 시위 장면(출처 : 하성환)  맨 왼쪽 분이 박용규 박사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분이 최시형 선생의 직계 고손 최인경 님이다.
2021년 7월 5일 국가보훈처 서울 보훈청 앞에서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을 촉구하는 피켓 시위 장면(출처 : 하성환)  맨 왼쪽 분이 박용규 박사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분이 최시형 선생의 직계 고손 최인경 님이다.

국가보훈처를 직접 찾아가 혼을 내기도 했다. 어떤 땐 독립유공자 심사위원들의 태도에 분개하기도 했다. 그러다 드디어 입법 투쟁에서 출구를 찾아 나섰다.

2023년 8월 25일 국회 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동아시아 독립운동과 제2차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발제하고 있는 박용규 박사(출처 : 하성환)
2023년 8월 25일 국회 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동아시아 독립운동과 제2차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발제하고 있는 박용규 박사(출처 : 하성환)

그리하여 2차 동학농민혁명 관련자 서훈 추서를 위해 여야를 넘나들며 국회의원들을 접촉하고 그들을 견인해 국회 의원회관에서 학술대회도 개최했다. 드디어 여야 의원 공동으로 법안을 발의하도록 성사시켰다. 그 기쁨과 희망, 그리고 설렘이 무척 컸으리라!

<항일독립운동>의 출발점은 일제가 경복궁을 무력으로 침탈한 갑오변란(1894. 7)에 맞선 갑오의병(1894. 8)과 2차 동학농민혁명(1894. 9)이다. 이는 역사학계 정설이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그렇게 서술돼 있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함에도 국가보훈처 공훈 심사위원들(역사학계 교수/역사학자들)은 아직도 60년대 초 이병도, 신석호가 만든 서훈 내규인 을미의병(1895. 10)을 기점으로 삼고 있다. 여전히 친일사학자들이 만든 내규를 고집하고 있다. 박용규 박사는 이를 규탄하는 학술대회, 전국 보훈처 지청 앞 1인 항의 시위, 펼침막 설치 투쟁, 언론투고 등을 몇해 동안 여러 차례 진행했다. 이번 학술대회 역시 21대 국회 임기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미 발의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입법기관을 움직이게 하려는 또 하나의 활동이다.(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항일독립운동>의 출발점은 일제가 경복궁을 무력으로 침탈한 갑오변란(1894. 7)에 맞선 갑오의병(1894. 8)과 2차 동학농민혁명(1894. 9)이다. 이는 역사학계 정설이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그렇게 서술돼 있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함에도 국가보훈처 공훈 심사위원들(역사학계 교수/역사학자들)은 아직도 60년대 초 이병도, 신석호가 만든 서훈 내규인 을미의병(1895. 10)을 기점으로 삼고 있다. 여전히 친일사학자들이 만든 내규를 고집하고 있다. 박용규 박사는 이를 규탄하는 학술대회, 전국 보훈처 지청 앞 1인 항의 시위, 펼침막 설치 투쟁, 언론투고 등을 몇해 동안 여러 차례 진행했다. 이번 학술대회 역시 21대 국회 임기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미 발의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입법기관을 움직이게 하려는 또 하나의 활동이다.(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그러나 이를 어쩌랴! 정치가 실종된 시대! 발의된 법안이 계속 계류 중이고 내년이면 자동 폐기될 운명이라 한편으론 크게 기대도 하지만 낙심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아직도 전봉준 장군, 최시형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2차 동학농민혁명군들이 단 한 명도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 받질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오늘도 고심하며 분투 중이다.

그는 싸우면서도 상대를 미워하지 않는다. 원수를 기쁘게 하는 일이 없도록 긴 안목으로 투쟁을 즐기면서 현실의 모순과 싸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싸움에 임해서는 매우 끈질기다. 싸움꾼으로서 그가 지닌 특징이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을 “전봉준 장군 서훈에 헌신한 사람 박용규”라고 미리 정해 놓았다고 언명했다.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장두’ 같은 굴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글쓴이가 생각하기에 고 이이화 선생을 잇는 참된 지식인이다.

오늘날, ‘행동하는 지식인’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실제 역사 현장을 찾아가 파묻히고 왜곡된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세상 속으로 빛을 보게 하는 지식인은 더더욱 찾기 어렵다. 가장 정치적이면서도 가장 유연하게 현실의 모순과 싸우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이 바로 박용규 선생이다. 내가 그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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