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13일, 20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나는 2일 전 사전투표일에 동네 주민복지센터에서 사전투표를 마쳤다. 그래서 오늘 모임에 나서는 발걸음이 홀가분했다.

지난 3월 12일 한겨레신문 주주총회에서 이동구 팀장을 필두로 13명의 한겨레주주통신원으로 취재팀이 구성됐었다. 총 25건의 행사취재기사와 주주면담기사가 나왔고 이를 서로 응원하는 의미에서 취재팀원 13명과 이동구커뮤니케이션 팀장이 4월 13일에 모임을 하기로 한 것이다.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서 파출소 앞에서 모였다. 취재팀원 중 6명은 사정상 불참했다. 이동구 팀장을 비롯하여 권용동, 김미경, 박효삼, 심창식, 양성숙, 최호진이 참석했다. 모두 낯익은 얼굴들이다.

북측산책로를 거닐어본지는 꽤 오래되었다. 동국대 앞 장충단공원에서 국립국장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간다. 그곳으로 차량통행은 금지되어있다. 그러나 따뜻한 봄날인데다가 선거일로 휴일이어서 상춘객들로 붐볐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저마다 울긋불긋한 봄맞이 옷차림으로 얼굴에는 웃음을 머금고 떠들며 지나친다. 저들은 진정으로 행복할까? 아니면 냉혹한 자본주의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며 그저 행복을 가장하는 걸까?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고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들 또한 행복의 가장행렬에 끼어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나는 장충단공원을 나오기 전 장충단의 유래와 장충단비에 대하여 동료들에게 간단한 해설을 해주었다.

이곳에서 을미사변을 되새길 때마다 분기탱천한다. 스스로 국방력은 기를 생각은 하지 않고, 개혁을 외치는 우리의 백성인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겠다고 조선 조정이 외국군대인 청나라군대를 끌어들이니, 천진조약(天津條約)에 따라 일본군대까지 동시에 한반도에 들이닥치게 되었다. 그 결과는 1894년 7월 청일전쟁의 발발이었다.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두고 그들끼리 싸우는 전쟁임에도 조선군대는 일본군의 군수품을 운반하는 노무자부대로 전락했고, 나중에는 일본군의 군량미까지 조선이 제공하였다. 결국 1895년 4월 일본이 승리하고 일본의 이등박문과 청국의 이홍장 간에 시모노세끼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청국은 요동반도 및 대만을 일본에 할양하니, 일본은 아세아의 식민지를 갖게 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 장충단비

이제 청국은 조선의 종주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대신 일본의 노골적인 내정간섭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간섭에 못 견딘 민비는 일본에 대한 견제정책으로서 친로정책을 채택했고, 두만강과 압록강 등 국경지대의 원시림 벌채권과 함경도 평안도 일대의 금광채굴권을 러시아에게 내주었다. 이에 일본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민비 제거공작을 세웠다. 이른바 ‘여우사냥’에 따라 1895년 양력10월 8일 새벽 민비를 살해하였다. 민비의 살해현장은 미국인 다이(Dye)와 러시아 기술자 사바틴(Sabatine)이 목격하고 기록을 남겼다. 물론 한성신보의 고바야카와 일본기자도 사진까지 찍고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세계 각국의 비난이 일자 일본은 낭인(浪人)들이 한 짓이라고 변명을 하고, 미우라공사 등 관련자들을 본국에 소환하여 재판에 회부하는 등 후속조치를 취하는 시늉을 냈지만 곧 그들을 석방했다.

그렇다면 민비는 어떻게 살해되었을까? 미우라공사는 민비 측근의 러시아 시녀를 유혹하여 그녀로부터 민비의 가슴에 검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경복궁 북쪽 끝 건청궁으로 쳐들어간 일본의 낭인(그들의 말대로 낭인이라고 치자)들과 일본군은 왕비의 가슴에서 검은 점을 발견하기 위하여 왕후복장으로 위장한 궁녀들을 수없이 자살한 다음 드디어 시녀복을 입은 민비를 찾아냈다. 그 가슴을 일본도로 찢고, 죽기도 전에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난도질로 토막 낸 시신에는 석유를 부어 불태웠다. 민비의 시신은 완전히 재로 변했다. 재마저 초겨울 바람에 어둠속으로 흩날렸다. 매관매직으로 관료사회와 재정을 고갈시키고,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시아버지 대원군과 끊임없이 싸웠던 희대의 왕비는 그렇게 최후를 마쳤다. 그리고 고종은 아관파천을 했으며, 국기는 뿌리째 흔들렸다. 그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고종은 그로부터 5년 후인 1900년에 을미사변 때 순국한 훈련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 그 당시 죽은 장병을 추모하기 위하여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지었다. 나중에는 임오군란 때며, 갑신정변 때 죽은 장병들도 함께 제향하는 국립현충시설이 되었다. 그러나 1907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한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 세계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세 사람의 외교사절을 보냈다가 일본에 의하여 강제 퇴위된 후 장충단의 제향도 금지되었다.

▲ 이준 열사 동상

한때는 43만㎢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이었지만, 군사정권에 의하여 신라호텔로, 자유총연맹으로, 타워호텔로, 국립극장으로, 국립국악원 등으로 떼어주고 지금은 3만3천㎢밖에 남아있지 않은 왜소한 공원이 되었다. 그 가운데 외롭게 장충단비가 서있다. 전면의 비문은 세자시절 순종이 쓴 어필이고, 뒷면의 찬문(撰文)은 충정공 민영환이 썼다. 우리들은 구한말의 수난과 모멸과 통곡의 현장을 분노도 없이 지나고 있었다.

▲ 수표교

장충단비 바로 앞에 있는 수표교(水標橋)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다. 세종 2년(1420)에 개천(開川, 현재의 청계천) 2가에 처음 세웠다. 그 당시에는 부근에 우마를 매매하는 시장이 있었다고 하여 마전교(馬廛橋)라고 불렀다. 수심을 재기 위한 수표(水標)는 그로부터 21년 후인 세종 23년(1441)에 처음 세웠는데, 나무로 된 것이었다. 수표를 세우면서부터 다리이름도 수표교로 바꾸어 불렀다. 돌기둥수표는 후대에 설치했는데,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관중인 돌기둥수표는 영조 36년(1760) 개천을 준설하면서 다시 세운 것이다. 그때 교각에는 ‘경진지평(庚辰地平)’이란 글씨를 새겼다.

▲ 수표교 경진지평

화강암으로 짜 맞춘 4각형교각은 2단을 이루고 있는데, 아랫것은 다듬지 않은 것이지만, 위의 것은 모를 죽여 물 흐름의 저항을 줄이려고 했다. 난간석의 연꽃봉오리와 연잎조각이 아름답다. 다리 바닥의 투박한 천판석(天板石)은 세월의 모진 공격에도 끄떡없을 영원한 반석이다.

▲ 수표교

원래 개천에 있던 다리를 장충단공원으로 옮긴 것은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였다.

그대로 지나치자니 건너편 신라호텔이 눈에 들어온다. 을사늑약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는 박문사(博文寺)가 있던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글프게도 그 정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뜯어다지었고, 그 부속건물은 경복궁의 목재를 뜯어다지었다. 해방 후 그곳은 관광공사의 영빈관이 되었고, 그 정문에도 영빈관(迎賓館)이라는 현판이 붙었다. 영빈관을 인수하여 1979년 준공한 신라호텔 또한 영빈관을 그 정문 이름으로 사용했다. 뒤늦었지만 1988년 경희궁 복원 시 그것을 제자리로 이전했으니, 현재의 신라호텔 정문은 그것의 모조품이다. 그의 23주기인 1932년 10월 26일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및 일제관리들 외에도 친일부역자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이 대거 참석하여 그를 추념했다.

▲ 수표교 너머로 보이는 신라호텔

사진 : 박효삼 편집위원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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