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버킷리스트인 ‘모교 기부’ 실현한 유족들
딸 기억하는 그림책 ‘보고 싶지만, 괜찮아’ 펴내

지난 21일 오후 서울 중구 이태원참사 서울광장 분향소 인근 카페에서 엄마 김남희(49)씨와 아빠 신정섭(53)씨가 그림책 ‘애진이의 여행(신칠라의 여행)’의 한 페이지를 설명하고 있다. 해당 그림은 딸과추억이 담긴 여행지들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다. 고병찬 기자
지난 21일 오후 서울 중구 이태원참사 서울광장 분향소 인근 카페에서 엄마 김남희(49)씨와 아빠 신정섭(53)씨가 그림책 ‘애진이의 여행(신칠라의 여행)’의 한 페이지를 설명하고 있다. 해당 그림은 딸과추억이 담긴 여행지들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다. 고병찬 기자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더 많은 ‘신칠라’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었어요. 신칠라는 나를 찾아, 내 이름을 찾아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신칠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걱정했어요. 보고 싶지만 괜찮아. 신칠라는 슬퍼하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자신의 이름을 찾아 떠났습니다.”

지난 14일 저녁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한 카페에 모인 ‘신칠라’의 친구 32명과 가족 9명은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하는 ‘신칠라’를 기억하며 그림책을 읽어나갔다. 그가 자주 듣던 플레이리스트가 배경음악이 됐고, 대형 스크린엔 그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여러 장의 사진이 지나갔다. 책을 든 채 ‘신칠라’와 친해진 계기, 취업 과정에서 밤늦게까지 도움을 받았던 이야기 등의 사연을 나누던 이들은 그녀를 떠올리며 웃다가도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히려 이들을 위로한 건 그림책 속 ‘신칠라’였다. “우린 다시 만날 거야. 보고 싶지만 괜찮아.” 이날은 ‘신칠라’의 생일(10월19일)을 닷새 앞둔 날이었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중구 이태원참사 서울광장 분향소 인근 카페에서 엄마 김남희(49)씨가 그림책 ‘애진이의 여행(신칠라의 여행)’에 사용된 그림을 들고 있다. 김씨는 이태원 참사 발생 100일 추모제가 열린 날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 준 수많은 시민들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 고병찬 기자
지난 21일 오후 서울 중구 이태원참사 서울광장 분향소 인근 카페에서 엄마 김남희(49)씨가 그림책 ‘애진이의 여행(신칠라의 여행)’에 사용된 그림을 들고 있다. 김씨는 이태원 참사 발생 100일 추모제가 열린 날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 준 수많은 시민들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 고병찬 기자

자신의 이름을 찾아 먼 길을 떠난 그림책 속 ‘신칠라’는 지난해 10월29일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신애진(25)씨다. 애진씨의 엄마 김남희(49)씨와 아빠 신정섭(53)씨는 애진씨의 생일을 맞아 딸의 생전 일기와 그림책을 묶어 ‘신애진 이야기집(보고 싶지만, 괜찮아)’을 펴냈다.

그림책 ‘애진이의 여행(신칠라의 여행)’은 김씨가 딸이 그리워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을 모아 제작됐다. “‘신칠라’는 애진이가 동물 ‘친칠라’를 닮아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래요.” 딸이 떠난 후 첫 번째 생일 선물로 엄마·아빠는 애진이와 행복했던 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책을 만들기로 했다. 100부가량 제작된 그림책은 지난 14일 애진씨의 25살 생일 모임에서 배부됐다. 정식 출간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로 숨진 고 신애진씨의 유족들이 만든 고인을 추모하는 책 ‘신애진 이야기집(보고 싶지만, 괜찮아)’. 이 책은 ‘애진이의 일기’, ‘애진이의 친구들’, ‘애진이의 여행(신칠라의 여행)’으로 구성돼 있다. 유가족은 최근 고인의 모교인 고려대에 장학기금 2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이태원 참사로 숨진 고 신애진씨의 유족들이 만든 고인을 추모하는 책 ‘신애진 이야기집(보고 싶지만, 괜찮아)’. 이 책은 ‘애진이의 일기’, ‘애진이의 친구들’, ‘애진이의 여행(신칠라의 여행)’으로 구성돼 있다. 유가족은 최근 고인의 모교인 고려대에 장학기금 2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그림책은 우주로 떠나는 ‘신칠라’ 로켓 그림으로 시작한다. 김씨는 ‘그날’ 이후 딸이 자신의 이름을 찾아 떠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애진이가 사라진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우니까 태어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 봤어요. 1998년 나사(NASA)에서 화성에 우주선을 보내면서 이름을 실어주겠다고 할 때, 애진의 태명인 ‘재희’를 태워 보냈거든요. 그래서 ‘애진이는 이 우주선에 있는 자신의 이름을 다시 찾으러 갔구나’ 그렇게 생각한 거죠.” 21일 서울광장 분향소 인근에서 한겨레를 만난 엄마 김씨와 아빠 신씨는 참사 이후 딸이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출판 경험이 없었던 엄마·아빠를 도와줬던 건 의외의 인연이었다. “참사 이후 뭐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으니까 그림도 그린 거고, 딸의 죽음의 의미를 기릴 수 있는 공간을 찾아다니기도 했어요.” 그러다 지난 2월 경기 용인시 느티나무도서관에서 아빠 정섭씨의 일기를 다룬 기사가 도서관에 전시된 걸 발견했다. “우리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도서관에서 뭐든 하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인연을 맺은 도서관장이 김씨의 그림을 보고 출판을 제안하며 기획사업을 진행하는 ‘노사이드 스튜디오’ 정지원 피디(PD)를 소개해줬다. 정 피디는 “디자이너를 소개만 하려고 했는데,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니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며 “이 책을 통해 어떻게든 살아남은 이들이 애진님을 기억하면서 새로운 원동력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고려대 본관 총장실에서 열린 고 신애진 교우 및 유가족 장학기금 기부식. 고려대 제공.
지난 19일 고려대 본관 총장실에서 열린 고 신애진 교우 및 유가족 장학기금 기부식. 고려대 제공.

애진씨의 생일은 이날을 기점으로 매년 새롭게 애진씨 죽음의 사회적 의미를 되새기는 일을 기획한다는 점에서, 엄마·아빠에겐 “설날”이다. 애진씨 모교인 고려대에 장학기금 2억원을 기부하고 책을 펴낸 게 그 시작이다. “내년엔 어떤 선물을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궁극적으로는 카페든 서점이든 애진이를 기억하고 사회적 의미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그러려면 지금 당장은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조속히 통과돼야 한다고 했다. “희생양을 만들겠다는 게 아니에요. 참사 당일 누가 어떻게 재난 대응 시스템을 운용했는지 그 과정이 명확하게 밝혀져야 젊은 아이들이 또 이렇게 떠나지 않을 거 아니겠어요. 그래야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고, 인권이 가장 최우선으로 지켜져야 할 가치라는 사회적 참사의 의미가 되새겨질 거예요.”

‘작가’ 김씨는 이날 책을 한장 한장 넘기며 그림에 담긴 딸과의 추억을 40여분간 들려줬다. “엄마는 딸과의 추억을 단 한 하나도 빼놓을 수 없어서 말이 길어져요.” 엄마의 눈엔 별처럼 빛나는 눈물이 맺혔다. 김씨가 넘긴 마지막 책장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없어 힘들어하는 모든 분들에게 바칩니다.”

고병찬 기자 kick@hani.co.kr,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옮긴 이  : 김미경 편집위원

한겨레 고병찬 기자 kick@hani.co.kr,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