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픈'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 어느 순간부터 사용하게  된 '웃기면서도 슬픈 이야기'라는 뜻의 합성어(혹은 신조어)가 왠지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았고 공감을 얻게 된 것이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남을 조롱하며 웃는 자들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어째서 웃나? 이름만 바꾸면 당신 이야기인 것을."  말하자면 '웃픈'이란 말은 호라티우스의 지각을 반영한 조어일지도 모른다. 남들의 하잘것없어 보이는 웃기는 이야기는 주어를 바꾸면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남의 웃기는 이야기는  어느 순간 그저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나의 슬픈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소외되거나 실패한 인생을 그저 못난 자의 삶으로 여기며 살 수만은 없다. 그러기에는 서로가 너무나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세상이기에 그렇다. 타인의 아픈 처지가 어느새 나의 처지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돈과 권력이 있다고 장담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그의 앞에 어느새 불행이 다가오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아직 교만과 독선에 빠져 있다면 그는 아직 자신을 포함한 가족의 질병이나 사고가 불현듯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예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웃픈'이라는 말은 타인과의 공감을 내포하고 있다.

'힘들것 같아도 가장 쉽고 편한 건 좁은 길 '(출처, 한겨레 2021.5.14)
'힘들것 같아도 가장 쉽고 편한 건 좁은 길 '(출처, 한겨레 2021.5.14)

다소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호라티우스의 말을 약간만 비틀어보자. "당신은 어째서 울고 있나? 이름만 바꾸면 남들의 이야기인 것을." 나의 슬픔은 누군가 다른 어느 곳에서 겪고 있을 남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겪고 있는 비탄이나 고통은 나만의 것은 아니다. 지구촌 어딘가에 나의 슬픔만큼이나 큰 슬픔을 겪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나의 슬픔이나 비통은 남들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 너무 비통해할 필요도 없다. 상황은 각자 다르겠지만 나만큼이나 비통해하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오늘은 웃자. 상황과 처지가 어렵건 편하건 상관없이 그저 웃자. 입가에 옅은 미소 혹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하루를 시작하자.  그런 미소와 웃음으로 이웃과 친지를 대하며 하루를 살아가자.

그러다 때로는 울기도 하자.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에 잠겨 있을 불쌍한 처지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같이 울어주자. 세상의 환란과 질곡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애통하는 심정으로 바라보자. 고통과 눈물이 사라질 세상이 언젠가 올 거라고 마음 속으로 기원하며 그렇게 하루 또 하루를 살아내자.

매일 어김없이 다가오는 하루를 그렇게 살아가면 좋겠다.  오늘의 나의 단상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장

심창식 편집장  cshim777@gmail.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