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좌진 이상으로 오동진 장군을 기억해야
1920년대는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시기입니다. 1919년 3·1 만세 시위가 잔혹하게 탄압 당하자 무장투쟁노선으로 급선회합니다. 의열단 등장과 2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주역인 통의부(1922), 참의부(1923), 정의부(1924), 신민부(1925)의 등장이 바로 그렇습니다.
특히 정의부는 남만주 일대 가장 넓은 자치 행정 조직과 군정부 조직을 통할했습니다. 그리고 22개 초·중학교를 통해 국어, 역사, 지리 등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교과 중심으로 항일 교육을 실천했고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수백 회에 걸쳐 국경을 넘나들며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습니다.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 일제 관공서 143개를 파괴했고 일제 경찰과 밀정, 그리고 친일 부호 914명을 처단했습니다. 바로 그 정의부 사령관이 송암 오동진 장군(1889~1944)입니다.
송암 오동진 장군은 일송 김동삼, 백야 김좌진과 함께 2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3대 맹장으로 일컫습니다. 일경과 교전 횟수나 국내진공작전, 그리고 그 삶의 치열함과 애국 청년들의 존경심에서 김좌진을 월등히 능가하는 인물이 바로 오동진 장군입니다. 정의부 중대장 정이형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청년들이 가장 따랐던 독립운동가”로 오동진 선생을 꼽았습니다.
그러나 변절한 독립군 부하 김종원의 술책에 말려들어 1927년 친일 고등계 형사 김덕기에게 체포됩니다. 김덕기는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뒤, 박정희처럼 출세를 위해 39살 늦은 나이에 경찰에 투신한 ‘고문 황제’입니다. 김덕기에게 체포된 독립지사들이 박헌영, 안창호, 조봉암, 오동진, 홍증식 등 1,000명이 넘습니다.
피검된 독립지사 1,000명 가운데 10%는 사형당했고 10%는 무기징역을 받았으며 10%는 징역 10년 형 이상을 받았습니다. 그 정도로 친일 경찰 김덕기는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계 형사로만 16년을 활약하면서 제국주의 일본을 위해 복무했던 악질 친일 경찰입니다. 반민특위 특별재판소에서 최초로 사형을 언도받지만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면서 풀어줍니다.
송암 선생은 재판정에서 일본인 판사를 향해 “이놈들! 심판을 받아야 할 네 놈들이 나를 심판해! 이놈들 이리 내려와서 내 심판을 받아봐라!”며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고 판사를 엄히 꾸짖으며 비호처럼 달려들어 판사의 멱살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세계평화를 위한 정당한 독립운동이었고 하느님의 뜻”이라고 열변을 토합니다. 그 장면을 지켜본 항일변호사 이인은 감동 끝에 송암 선생이야말로 “대륙의 천지를 진동케 했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우리 독립군의 영웅”이라고 고백합니다.
송암 선생은 신의주형무소에서 재판을 거부하며 33일 동안 옥중 단식 투쟁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경성형무소로 이감된 뒤에도 48일 동안 옥중 단식 투쟁을 감행합니다. 깜깜한 징벌방에서 100일 동안 버티고 온전한 정신으로 나오자, 일본인 간수장조차 신(神)을 높여서 부르는 호칭인 ‘가미사마’라 칭하며 존경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일본인 형무소장 또한 오동진 장군 앞에선 항상 예를 갖췄습니다.
일제강점기 형무소장들은 대체로 검사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형무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수인들 식비를 공공연히 갈취함으로써 축재의 길을 터주려 했던 게 식민당국의 의도였습니다. 그런 비루하고 부패한 형무소장조차 오동진 장군 앞에선 예를 갖췄다고 하니 송암 선생의 인품이 얼마나 고매한 경지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오동진 장군은 경성형무소 수감 중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정신질환자로 분류돼 공주형무소로 이감됩니다. 공주형무소로 이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44년 5월 20일 순국합니다. 유해를 근처 야산에 파묻었음에도 해방 80년을 맞는 오늘까지 발굴을 안 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과 함께 오동진 장군 유해를 발굴해 제대로 된 예우를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김좌진 장군 논문은 많이 발표되었고 김동삼 선생에 대한 논문 또한 여러 편 존재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동진 장군에 대한 연구 논문은 단 한 편도 없는 실정이고 교과서조차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1982년 9월에 공주 군수 조기택이 오동진 장군 추모비를 공산성 안내센터 근처에 건립한 게 전부입니다.
독립유공자 최고 훈격인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음에도 추모식은 정부 차원에서 단 한 번도 열린 적은 없습니다.
공주시에서 발간한 「공주 순례길」 안내 책자나 「공산성」 소책자에도 오동진 장군을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하거늘 길거리 지나는 서울시민이 어떻게 오동진 장군의 존재를 알 수 있겠습니까?
다행스러운 것은 2020년 12월 1일 코로나 사태 당시, 처음으로 「오동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출범했습니다. 쌍달도서관 양동진 공주시민과 김도석 교사 시인, 조유진 무용가, 최도은 민중가수가 최초로 오동진 선생을 추모하는 추모식을 거행했습니다.
오동진 장군은 평북 의주 출신이라 남쪽에 후손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동작동 현충원 무후(無後)선열제단에 첫 번째로 133위 선열들과 함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오동진 장군은 민족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이지 코뮤니스트가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북쪽 애국열사릉에 모신 이유는 오동진 장군이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과 절친 사이인데 1926년 김형직 사망 직후 14살 어린 김일성을 정의부 소속 민족학교인 「화성의숙」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도록 배려한 인물이 바로 오동진 장군이기 때문입니다.
서울신문 기사 가운데엔 오동진 장군 유해를 북쪽으로 모셔가 애국열사릉에 묘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유해가 발굴돼 모신 것은 아닙니다. 후손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오동진 장군 유해를 발굴해 제대로 순국선열에 대한 예우를 다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오동진 장군의 고결한 삶을 가르치고 시민들에게도 김좌진 장군 이상으로 오동진 장군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역사의 진실에 부합하는 일이자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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