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를 주변화하는 <국가주의 교육행정>을 청산해야
우리 머릿속엔「봉오동전투=홍범도」,「청산리전투=김좌진」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길거리 지나는 시민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 원인은 제도권 학교 교육을 통해 수십 년 동안 유포한 결과이고 그것을 증폭시킨 것은 사교육 시장과 제도권 주류언론들이다. 그들이 역사 왜곡의 1등 공신들이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가장 많이 보는『한국사』교과서(미래 앤)에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서술하면서 홍범도와 김좌진 사진을 게재해 놓고 있다. 명백히 <개인 영웅사관>에 기초한 역사 왜곡이다. 항일 전쟁 당시 독립군 1명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선 10가구의 희생이 필요했다. 이젠 개인 영웅신화로 항일투쟁을 논할 시대가 아니다.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는 <대한북로독군부>이다. 대한북로독군부 부장, 즉 사령관은 최진동 장군이고 김좌진(제1연대장), 홍범도(제2연대장), 오하묵(제3연대장)은 최진동의 지휘를 받는 연대장의 위치였다. 봉오동전투 승리 부대, <대한북로독군부>의 핵심 부대! <군무도독부>를 일군 주체는 최진동 장군의 동생, 바로 최운산 장군이다. 최운산 장군은 북간도 제1의 갑부로 3일 밤낮을 걸어도 남의 땅을 밟지 않을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국수 공장, 성냥공장, 비누공장, 양조장, 콩기름 공장, 참기름 공장, 콩과자 공장 등 여러 생필품 공장을 경영해 경제적 부를 쌓은 항일지사이다.
최운산 장군은 항일무장투쟁 당시, 축적한 토지와 재산을 전부 쏟아부어 첨단 무기와 군수품을 반입했다.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소유한 총기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사용한 무기와 병참, 보급 일체는 오롯이 최운산 장군 개인 재산을 기부해 이뤄낸 산물이다.
매우 늦었지만 KBS가 체코공화국의 도움을 받아 2021년 2월과 3월 두 차례 보도한 「파르티잔 늑대의 시대 1, 2부」에서 최운산 장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소개했다.
그렇게 체코 병단에서 구매한 총기는 당시 모신나강 소총으로 일제 아리사카 소총보다 월등히 성능이 뛰어났다. 일본군이 썼던 아리사카 소총은 유효사거리가 500m가 채 되지 않았다. 반면에 당대 최첨단 무기인 모신나강 소총은 700m가 훨씬 넘었다.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한북로독군부>는 모신나강 소총뿐만 아니라 맥심기관총을 보유했다. 20세기 초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일본 제국주의 정규군과 맞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 가운데 한 가지는 독립군들이 당대 최신식 무기로 무장했다는 사실이다. 그 배경에 북간도 제1의 거부 최운산 장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존재한다.
서간도에 이회영 형제 일가가 전 재산 600억을 쏟아부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10년 동안 독립군 3,500명을 양성한 것처럼 최운산 형제들은 북간도에 수백 억에 이르는 전 재산을 쏟아부어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 수천 명을 양성했다. 봉오동전투의 승리 요인으로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따라서 봉오동전투 100주년을 앞두고 2019년 개봉한 영화『봉오동전투』에서 봉오동전투 영웅으로 등장하는 홍범도 장군(최민식 분)의 모습은 기본적으로「봉오동전투=홍범도」라는 고정 관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못내 아쉬웠다.
문제는 아직도 고등학교『한국사』교과서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중심으로 연합부대가 거둔 승리로 기술돼 있다. 2021년 발간된 금성출판사『한국사』교과서 서술 내용이다.
“ 3‧1운동 이후 무장 독립 전쟁을 위해 만주 지역에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다. 서간도의 서로군정서, 북간도의 대한독립군과 북로군정서가 대표적이다.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에 진입하여 관공서를 습격하고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이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활동을 막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의 근거지를 공격해 왔다. 1920년 6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고등학교『한국사』, 금성출판사, 184쪽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가 일궈낸 <군무도독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에 대한 언급도 없다.
미래 앤 출판사는 최진동의 <군무도독부>를 언급했으나 봉오동전투 승리 부대 <대한북로독군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지학사, 천재교육은 금성출판사처럼 봉오동전투 핵심 부대인 <군무도독부> 자체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봉오동전투 승리 부대 <대한북로독군부>를 기술한 교과서는 검정제 교과서 가운데 씨마스 출판사가 유일하다. 모두 홍범도 장군을 봉오동전투 중심인물로 서술하는 공통점을 드러낸다.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체이자 청산리전투에도 참가한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의 <군무도독부>와 <대한북로독군부>를 교과서에 기술해야 마땅하다. 문제는 검정제 한국사 교과서로는『봉오동 전투=홍범도』,『청산리전투=김좌진』에 대한 이미지가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7년이라는 교육과정 개정 변경 주기도 문제다. 윤석열 정권하 <2022 개정 교육과정>이 있었지만, 역사학계 연구 성과는 전혀 반영돼 있지 않다. 다시 7년을 기다려 2029년을 기대해야 하지만 실제 그때 반영된다는 보장도 없다. 주류역사학계가 봉오동전투의 영웅을 홍범도가 아니라 <대한북로독군부>를 주도한 최씨 형제들로 수정, 기술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 왜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검정제> 교과서 방침을 폐기하고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채택하도록 방향을 전환해야 한 걸음이라도 역사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북서유럽은 독일, 아이슬란드를 제외하고 모두 <자유발행제> 국가다. 교사들이 직접 교과서를 집필한다. 대입 논술형 시험문제 또한 교사가 출제하고 교사가 채점한다. 우리나라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만큼 대한민국 교육은 <국가주의 교육행정>이 압도하는 현실이다. 해방된 지 79년을 맞는 해이고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민주화 걸음마를 시작한 지 37년이 지났건만 우리 교육은 교사들을 교육의 주체로 존중하고 인정하기보다 교사들을 여전히 지시와 통제의 대상이자 말단 행정요원으로 취급한다.
오늘도 학교 현장에 무수히 많은 공문을 내려보내고 보고하게 하는 현실이 그렇다. 글쓴이는 감히 말하고 싶다. 교육부 장관이든 교육감이든 교육개혁을 말로만 떠들지 말고 공문에서 교사들을 자유롭게 만드는 조치가 진정성 있는 교육개혁의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교육을 개악하면서 ‘교육개혁’이라 부르짖거나 개혁의 본질이 아닌 곁가지를 치면서 이러쿵저러쿵 ‘교육개혁’을 논할 게 아니다. 우리 교육 현실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북서유럽의 경우, 교육과정 결정권이나 교과서 선택권에서 현장 교사들은 교사의 교육권을 존중받기에 가능한 일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학교에서 교사들이 결정해 채택한 교과서조차 실제 수업에 사용하는 경우가 높지 않다는 사실이다. 교사들이 교과서를 포함해서 다양한 자료로 교육과정을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자유발행제 국가이지만 수학과 과학 교과서를 사용하는 비율은 5~10%에 지나지 않는다. 교과서에 대한 교사의 저항이 크기 때문이다. 그만큼 교사의 자율성과 교육의 자주성을 존중한다. 입시 경쟁교육에 포획된 우리나라처럼 국가가 검정한 교과서를 맹신하는 나라는 북서유럽엔 단 한 군데도 없다.
「봉오동전투=홍범도」와 마찬가지로「청산리전투=김좌진」역시 생각의 전환이 시급하다. 청산리전투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단독으로 성취한 전투가 아님은 이미 30년 전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작가이자 역사학자인 송우혜 님(항일독립지사 송몽규의 조카)이 1994년 권위 있는 학술지『역사비평』에 청산리전투가 왜곡되었음을 비판했다.
따라서 현행 고등학교『한국사』교과서에서도 이점을 반영해「청산리전투=김좌진」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홍범도 연합부대와 김좌진의 부대가 공동으로 승리한 전투로 기술돼 있다. 그럼에도「청산리전투=김좌진」이 머릿속에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청산리전투=김좌진」으로 왜곡된 데에는 현대사 속에서 두 가지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한 김좌진의 최측근 이범석 장군의 사적 욕망 때문이다. 이범석은 본래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김좌진의 초빙을 받아 북로군정서로 전입한 인물이다.
이범석은 백화문으로 저술한『韓國的 憤怒』(1941)에서 청산리 전투를 ‘대첩’으로 표현하며 김좌진 장군보다 이범석 본인 자신을 더 화려하게 분칠했다.『韓國的 憤怒』는 해방 후『한국의 분노』(1947년)로 번역, 출간하였다. 이범석은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자신의 정치적 출세를 위해 청산리전투의 역사를 과장하거나 크게 왜곡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미국에서 기밀문서가 해제되었다. 그러자 국회도서관장이 1970년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청산리전투에 대한 역사 자료를 수집해 왔다. 이범석 역시 그를 의식해 1971년『우둥불』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우둥불』은『한국의 분노』보다 분량이 4배나 더 많다. 더구나 청산리전투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단독이 아니라 <홍범도 부대>, <안무 부대>, <최진동 부대> 등을 언급하면서 독립군 연합부대의 존재를 최초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초점은 <북로군정서>와 이범석 자신에게 맞추고 있는 책이다. 천수평 전투 당시 일본군 1개 소대 병력과 맞섰음에도 1개 중대 병력을 괴멸시켰다고 뻥튀기한 서술은 그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로「청산리전투=김좌진」으로 왜곡된 근본 요인으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지속된 극단적 반공주의 이념과 관련이 깊다. 아나키스트 김좌진이 코뮤니스트 청년에 의해 피살된 사실은 ‘반공’을 국시로 내건 독재 정권에겐 정치 선전용으로 이용하기에 안성맞춤인 소재였다.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된 김좌진 장군이 크게 부풀려지고 어린 김일성을 도운 오동진 장군이 외면당한 배경이기도 하다.
항일무장투쟁의 맹장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인물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은 그러한 역사교육 자체가 최고의 반공교육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남북 체제 경쟁 속에서 반공-승공-멸공으로 치닫던 극단적 정치 환경이 김좌진 장군을 우상화한 결과를 낳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가들끼리 살육전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항일 독립투쟁에 목숨을 바친 항일 독립지사들인데도 통군부(통의부 전신) 내 복벽주의자와 공화주의자 간 살육전이 그러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주의, 공화주의자들끼리도 노선상의 차이로 살육전이 벌어졌다. 참의부와 통의부 간 전투와 '국적(國賊)'이라 칭하며 상호 비방전 또한 살벌했다.
게다가 아나키스트와 코뮤니스트 간 살육전도 마찬가지다. 아나키스트가 코뮤니스트 항일 청년을 죽이는 장면은 묘사하기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교과서엔 그런 내용들이 서술돼 있지 않다. 아나키스트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코뮤니스트 청년 박상실은 3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백미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했던 독립군 청년이다.
결국 왜곡된 역사교육의 결과, 2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3대 맹장(오동진, 김동삼, 김좌진) 가운데 김좌진 장군은 유관순만큼이나 어린아이들이 모두 알 정도이다. 그렇지만 김좌진 장군보다 더 치열하게 수백 회에 이르는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던 오동진 장군은 청소년은커녕 어른들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김좌진 장군에 대한 논문은 여러 편이 존재한다. 반면에 일제와 교전 기록과 횟수, 그 치열함과 고결한 인품에서 더더욱 훌륭한 분인 오동진 장군에 대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는 실정이다. 우리현대사 속에서 역사학계 또한 그동안 학문의 자유가 없었던 탓이자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결과였다. 모두 분단시대, 분단사학이 초래한 역사 왜곡이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전된 지 37년도 더 지났다. <봉오동전투=홍범도>, <청산리전투=김좌진> 신화를 비롯해 이젠 국뽕 수준으로 과대 포장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할 시점이다. 나아가 북간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최운산 장군과 만주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별! 오동진 장군 등 밀봉된 채, 밀실에 갇힌 역사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어 햇빛에 비추고 널리 알려야 한다.
그 길이 역사 정의를 올곧게 세우는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한국사>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향한 역사(교육)학계와 교육운동단체의 분발을 촉구한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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