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른 생각들로 순서도 정오(正誤)도 없다. 오호(惡好)와 시비(是非)를 논할 수는 있지만 대상은 아니다. 중복도 있으므로 고려하시면 좋겠다. 여러 차에 걸쳐 싣는다.

평소 몸과 맘을 어느 수준에서, 어떻게 추슬러야 평화롭고 평온한 삶이 될까를 생각하다가, 몸과 맘에 대한 단상을 정리해 보았다. 하지만 부족하고 모자란 필자의 지식과 지혜 및 사고력으로는 무리한 주제였다. 몸과 맘을 논하지만 결국 생사의 문제라 생각한다. 생사를 크고 단순하게 보면, 세상에 나고 싶어 난 것도 아니요, 죽고 싶어 죽는 것도 아니다. 났으니 사는 거고, 갈 때가 되었으니 죽는 거다. 그것을 어렵게 만든 것은, 꿈과 희망으로 포장된 인간의 욕망과 욕심이라 생각했다. 필자의 단순 무지는 여기에 귀착한 것이다. 두 번으로 예정했는데 내용이 길어져 추가해 싣는다. 나머지는 독자들께 부탁드린다.

출처:필자
출처:필자

407.

약육강식은 동물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인간은 더 심하다. 동물의 잔인성보다 더욱 냉혹하고 야비하며 질기다. 인간의 욕망과 욕심이란 게 동물에겐 없고, 설혹 있다고 해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작기 때문이다. 몸과 맘(욕망과 욕심)을 가는 대로 방치한다면 자신이 가장 먼저 망가지리라. 가진다고 얼마를 갖겠으며 오른다고 어디까지 오르겠는가? 그 끝엔 도착 불가하므로 도달하기 전에 추락한다. 감당할 수 없기도 하고, 사람 명(命)의 한계이기도 하다. 세상도, 국가도, 기관단체도, 개인도 가장 우선해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이 도착점 없는 목적지가 아닐까?

극한 경쟁과 사투(死鬪)를 통해서라도 최고 지위와 최다 양을 차지하려는 욕구는 멈추지 않는다. 낮은 곳도 위험하고 해롭지만, 높은 곳은 더 위험하고 해로움을 알아야 한다. 평화롭고 평온한 삶은 극저(極低)와 극고(極高)엔 없다고 본다. 두 곳 다 삭막하여 생명이 오래 머물 수 없는 곳이다. 하므로 최고와 최상의 추구를 멈춰야 하지 않을까? 그보다는 상호부조와 상호조화의 적중(的中)에서 참 평화와 평온한 삶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408.

자연인이나 법인이나 모두 잘 살려고 한다. 현 세상에서 잘 산다는 의미와 기준은 대체로 크고 높게, 넓고 많이 갖는 권부(權富)다. 통속적으로 삐까번쩍한 삶이다. 겉으로는 아닌척하지만 결국 대다수는 이 방향으로 간다. 노력한다지만 내부 깊숙하게 자리 잡은 이기심을 몰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대국은 강대국을, 부자는 거부를 지향한다. 이를 달성할 수 있다면 극한 경쟁과 전쟁 등 시비와 정오를 가리지 않는다. 살상과 파괴까지도. 이런 잘못된 짓이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고, 생명의 본원인 천지(天地)에까지 영향을 준다. 결국 자신을 위험에 빠뜨려 졸명(猝命)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또한 모든 추악과 범죄의 원인으로도 작용하고 있으니, 이를 줄이고 없애기 위해 욕망과 욕심의 근원인 몸과 맘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을까, 한다.

만물들이 살만한 지구 환경을 위해서는 생명을 중시하고, 인간의 편익과 풍요를 적정화하거나 최소화해야 하리라. 편익과 풍요 달성을 위한 과학기술의 발전 궤도를 수정하고, 개발과 건설을 중지하거나 최소화해야 하며, 인문(인류 또는 만물)학 중시가 필요하리라. 생명은 모든 이념과 사상에 우선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넘어 홍익만물(弘益萬物)로 넓혀 가면 좋지 않겠는가. 진정 추구할 것은 생명 존중과 선(善)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인간과 기업 및 국가의 생리상, 그 염원(꿈과 희망, 목적과 목표, 비전)을 멈추게 할 수 없음이 선결 과제다. 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현자(지도자)의 출현이나, 천지자연의 합당한 처리(응분의 대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집이 좋고 부럽다고들 하지만,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좋고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추구하는 고가물질이나 소위 명품으로 자신을 치장해 가려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다. 작아진 자신(소아)의 욕구를 만족시키겠지만, 큰 자기(대아)에 대한 평가에는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용함을 깨우쳐야 하리라.

출처: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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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

몸은 맘을 따른다고들 한다. 그렇기도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맘이 몸을 따르는 경우가 더 많다. 몸이 있는 곳에 맘도 있고, 몸이 가는 곳에 맘도 따라간다. 고상하다는 분들이 자꾸 이를 역으로 말하니 보통 사람들은 헷갈린다. 사실대로 말하면서 몸이 중하기는 하지만, 맘도 중하니 맘을 잘 다스리라 하면 될 일이다. 어렵겠지만 몸=맘이 되도록 힘씀이 좋겠다. 속세에서 떠도는 말 중에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한다. 필자와 같은 범인은 거의 다 그러리라. 황금만능 세상에서 당연하지 않겠는가? 사랑도 몸으로 시작해서 몸으로 하다가 몸에서 끝나지 않는가? 고귀한 사랑은 어디까지 고귀한지 모르겠다.

중간중간 맘이 관여하겠지만 결정적이지는 못하리라. 몸이 없이 어찌 맘만으로 사랑하겠는가? 불꽃같이 뜨겁고 솜털처럼 포근한 사랑을 맘만으로 되겠는가? 서로의 부드럽고 촉촉한 몸이 접촉해 체온의 열기를 느껴야 사랑이 익어가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온 천지를 가득 메우는 열병이 맘만으로 되겠는가? 아름다운 여인과 멋진 사내가 몸이 아닌 맘으로만 느껴지겠는가? 어느 시인이 말하길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라고 했다. 보지 않고 느끼지 못하면 사랑은 시작도 진행도 어렵다. 육친의 사랑도 그렇다. 부모와 자식 간의 지극한 사랑도 몸이 매개되지 않는다면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인류 평화와 만물 공영을 위해서는 모든 생명을 폭넓게 사랑해야 하리라. 종족을 떠나고 국가도 뛰어넘은 넓고 높은 사랑, 범애가 필요하리라. 이상적인 사랑은 맘으로 하고, 현실적인 사랑은 몸으로 하는 것일까?

‘몸이냐 맘이냐’처럼 ‘사실과 진실’의 관계를 묻는 경우가 있다. 모든 사실이 진실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진실이 사실일 수도 없지 않을까? 실제 삶에서는 사실≥진실이지만, 이상적인 가치로 보면 사실≤진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진실로 사는 게 아니라, 사실로 살 수밖에 없다. 몸과 맘도 동일 맥락으로 생각하면 좋으리라.

410.

몸으로 즉 눈과 귀 등 오감으로 알거나 느끼지 못하는 언행을, 어떻게 마음과 정신 및 영혼이 미리 알고 깨달아, 그를 다시 언행으로 나타내 실행하겠는가? 모든 소통은 몸을 거치지 않고 불가능하다. 마음과 정신 및 영혼만으로 소통할 수 없지 않겠는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하지만 긍정적인 표현일뿐, 이신전심(以身傳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선 몸으로 알고 소통해야, 다음 단계인 맘과 정신으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이런 차원에서는 어폐가 있다.

영혼(정령)을 중시한다는 미주 원주민(인디언)은 죽은 사람의 이름을, 살아있는 자들이 함부로 거론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일종의 금기란다. 그 말에는 몸이 죽으면 영혼도 죽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을까? 산 자들이 죽은 자의 이름을 수시로/멋대로 들먹이면, 그의 영혼이 본향으로 가지 못하고 속세(지상)에 떠돌게 되므로, 산 자나 죽은 자 모두에게 해롭지 않겠는가? 몸은 이미 가버렸는데, 혼이 가지 않고 지상(내 머리 위)에 떠돌고 있다면 좋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땅 위를 떠나지 못한 영혼들의 혼잡으로 인해, 자동차 정체처럼 영혼들의 정체와 충돌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영혼들의 세계가 혼란에 빠지지 않겠는가? 해괴하고 괴이하도다. 영혼이 죽지 않고 계속 늘어가는 게 바람직할까? 자연과 생명의 이치에도 어긋나므로 그럴 수도 없으리라. 몸은 생명의 시작이요 끝이다. 혼령도 몸이 살아 있을 때 혼령이지, 몸이 가면 영혼도 따라가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그래야 세상이 온전히 지속되지 않겠는가? 섣불리 혼령으로 세상을 어지럽히지 말지어다. 다만 산자들의 기억을 죽은자들의 혼령이라 여긴다면, 그 정도는 가능하겠다.

출처: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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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유행가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라는 가사가 있다. 맘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겠지만, 말의 속내는 ‘몸이 고와야 여자지만...’ 맘은 알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 않을까? 몸이 선한 자는 실제 삶에서도 선할 확률이 높지만, 맘이 선한 자는 판단하기 어렵다. 맘이 선한지 선하지 않은지, 그 깊은 심연을 어찌 알겠는가? 오리무중. 몸이 선함은 말과 행동을 통해 곧바로 나타나므로 쉽게 알 수 있지만, 맘이 선하다는 것은 나타날 표징이 없다. 이를 통해 유추하면 몸이 선한 자는 맘도 선할 수 있지만, 맘이 선한 자가 몸도 선할지는 알 수 없다.

몸과 맘을 통해 선악을 구별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몸은 선에 가깝고, 맘은 악에 가깝지 않을까? 일부 국가를 지칭해 ‘악의 축’이란 말이 회자할 때가 있다. 사실은 자국이 ‘악의 축’임에도 이를 은폐하고, 자국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상대 국가를 매도하기 위한 술책이리라. 개인 간에도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세상을 조금 살다 보니, 빈자와 약자 및 약소국은 몸과 맘이 부드러운 선에 가까웠고, 부자와 강자 및 강대국은 몸과 맘이 매서운 악에 가까움을 알게 되었다. 빈자와 약자 및 약소국의 권익을 빼앗지 않고는, 부자와 강자 및 강대국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자가 빈자를 배려하고,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며,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지 않고 동반해 협력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꿈꿔 본다. 이게 바로 과한 꿈과 희망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것참, 이는 비정상으로 간 세상을 정상으로 돌리자는 것이지, 사사롭고 과도한 욕구와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도 불가한 각 개인의 몸과 맘도, 어느 한쪽이 강하거나 약해지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며, 조화롭게 살아간다면 평화롭고 평온한 삶과 세상을 이뤄가는 데 이바지하리라 생각한다.

 

412.

인간을 비롯한 생명들은 대부분 물리(몸)적 세계의 존재다. 그러다가 순간순간 정신(맘)적 세계의 존재가 되기도 한다. 양 존재 사이를 왕복하며 사는 게 실제 삶인 거다. 어느 곳이 중한지를 딱 부러지게 말하기 곤란하지만, 그 중심은 물리적 존재에 있으리라. 혹자는 정신세계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되새겨보자. 진정 그러한가? 그러면 물리적 세계를 떠나 정신적 세계에서 전적으로 살 수 있겠는가? 한 번 살아보시라. 그게 가능하겠는가? 그런 주장을 한다고 고상해지지 않고, 더욱 현자와는 거리가 멀어지리라. 실제와 실상을 인정하고 문제가 있으면 그를 보완하는 방법을 제시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선각자들의 할 일이기도 하고. 구체 해결법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지 않기를 바란다. 문제만 양산하고 혹자들에게 오도된 삶을 살게 할 수 있다. 누가 책임지겠는가? ‘잘하라’라는 말처럼 모호함도 없다. 뭘 잘하고 살라는 건가? 어떻게 하는 게 잘하는 것인가? 무엇보다 본인부터 확실한 언행으로 모범을 보여야 하리라. 물론 그 반대 경우인 ‘물리적 세계에서 전적으로 살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도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본다.

출처: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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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보통 탄생을 생리적, 물리적 상태로 인식하지만, 생태기능으로 보면 몸과 맘이 만나 상호 역할을 수수하며 공존할 때이리라. 이때가 실질적으로 하나의 생명이 탄생한 것이지 않을까? 흑암에서 광명의 세계로 나온 몸과 맘이, 서로의 기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현상이 삶이고 인생이라 여긴다. 서로를 주고받던 몸과 맘이, 더 이상 공존하지 못하고 역할 수수를 멈출 때가 죽음이리라. 인생은 몸과 맘이 만나 서로를 공유하며 살다가 이별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인 거다. 거기에서 무슨 의미를 찾거나, 사명 같은 것을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삶이 고달파지고 경직된다. 순탄하고 유연해야 할 삶이, 본래 없는 의외의 의미가 더해짐에 따라 부작용이 생기고 변질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각종 이설과 명분으로 세상에 나서→살다→죽음이라는 단순함을 복잡미묘하게 만들지 말자. 동일 차원에서 누구의 외압이나 강요 없이 몸에도 맘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된 삶을 살다 가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이도 저도 아닌 그렇고 그런 삶을 살다 가는 게, 범인의 보잘것없는 인생이 되었다며 침통한 심정을 가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라고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동일 맥락에서 ‘인생이 별(특별한)것인가?’라며 희화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농담과 한담으로 한 순간 위안 삼기 위함이겠지만, 바른 삶의 태도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리라. 인생이 별것 아니면 무엇이 별것이겠는가? 이 지구상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인생 이상의 별것은 없지 않을까? 한 사람의 인생은 유일하고 독보적인 별것이다. 자연성(인성)과 천지성(신성)을 잃지 않고, 몸과 맘을 잘 조화시킨 자기만의 삶을, 별스럽게 살다 가야지 않겠는가? 이게 참 인생이지 않을까?

 

*덧붙임: 

글을 올리기 직전, 이 땅에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믿기도 싫었다. 하지만 현실이라니. 청춘 시절에 겪은 참혹한 장면이 떠올랐다. 일설하고 이쪽이건 저쪽이건 살상 없이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살기 위해서는 변해야 하고, 종종 혁신과 혁명도 필요하다. 지난날을 회상해 보면, 세상을 뒤집을 정도의 변혁은 현자(賢者)보다 광자(狂者)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또한 유식자보다 무식자가 많았고. 그러므로 때에 따라선 현자와 유식자도 적기라고 판단되면 순간적인 광자와 무식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도 현자가 광자보다 세상을 바르게 변혁시키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점잔만 빼다가 광자와 무식자에게 변혁의 기회를 넘겨주겠는가? 현자에 대한 대중의 칭송이 죄스럽고 부끄럽지 않겠는가?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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