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살고 있는 이제 두 달 된 손주를 보고 싶은 마음에 딸이 한국에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자꾸 한다. 그럴 뻔한 적도 있었는데….
딸은 성인이 되면서 5곳에서 일했다. 처음은 캐나다에서 방학을 맞아 들어왔을 때였다. 한 직장에 통역 알바로 지원했다 면접관이 딸이 맘에 들었는지 자꾸 정규직으로 지원하라고 했다. 월급 차이가 크게 났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900원대였던 캐나다 달러가 1,200원까지 올라가자, 딸은 우리 주머니 사정을 생각했는지 잠시 학교를 휴학하고 1년 정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학비를 모으려고 결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딸은 석 달 만에 그만두었다. 이유는 선배의 갑질과 따돌림 때문이었다.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딸의 정규직 입사를 낙하산 인사로 여겼던 선배들은 딸을 심하게 갈구고 따돌렸다. 더군다나 동료 간에 편 가름이 있는 곳이어서, 딸이 없는 곳에서 딸의 흉을 보고, 다른 동료는 이를 딸에게 전했다. 어디서나 인간관계에서 원만했던 딸은 처음 당하는 일을 몹시 힘들어했다. 아침마다 출근하기 괴로워했다. 일종의 악질 경험을 오래 하는 것이 딸의 심성에 해가 된다고 생각한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공부를 빨리 마치라는 하늘의 뜻이라며 캐나다로 떠나라고 했다.
캐나다에서 대학을 졸업하기 전 딸은 한 실험실에서 일했다. 딸을 좋게 봐준 교수님은 대학원을 권유했다. 하지만 이것저것 해보고 미래를 정하겠다며 딸은 한국에 들어왔다. 호기롭게 들어 왔지만, 취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3개월 계약직 통역사로 취직했다. 그곳을 택한 이유는 마지막 한 달 동안 하와이 출장을 가기 때문이었다. 딸은 하와이 바다와 자연을 만끽하고 돌아왔지만 계약을 연장하진 않았다. 그곳은 남자 직원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의 일상적인 언어폭력에 질렸기 때문이다. 물론 딸에게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수위가 조금만 넘어가면 성희롱 발언이 될 수 있는 말도 서슴없이 내뱉었다. 3개월 참고 지낸 것도 힘들었다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세 번째로 취직한 곳은 돌덩이를 수입하는 회사였다. 외국인을 접하는 기회가 많아 딸은 또 통역사로 일했다. 딸이 그곳을 택한 이유 역시 해외 출장을 가기 때문이었다. 주로 유럽이었다. 딸은 그 직장을 좋아했다. 여성 상사도 친절하고 일도 재미있다고 했다. 일한 지 석 달 될 무렵, 해외 출장을 갔다. 프랑스를 거쳐 그리스로 가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남자 상사의 부적절한 언행에 맞닥뜨렸다. 한국에선 그렇게 점잖던 상사가 술에 취해 추태를 부렸다. 딸은 다음 날, 술에 취해 기억하지 못한다는 전날 일을 다 이야기하고 즉시 한국으로 귀국했다. 호된 경험을 한 딸은 대학원 진학으로 진로를 정했다.
석사는 한국에서 하라는 아버지 권유로 딸은 국내 대학원에 진학했다. 장학금을 주는 대신 실험실에서 일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힘들어했다. 민주적인 가정에서 자란 딸은 억압적인 환경을 아주 싫어했다. 그런데 그 대학원 실험실은 선배들의 큰소리가 난무하는 구시대적 환경이었다. 교수님도 캐나다 대학 실험실에서 함께 일했던 교수님과는 많이 달랐다. 석사 학생들은 늘 주눅이 들어 ‘우리는 석사 나부랭이 노예’라고 자조하며 일했다. 딸은 빨리 그 환경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악착같이 논문을 써서 2년 만에 석사과정을 마쳤다.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석사 후 연구원'으로 약 3년 정도 일했다. 이곳은 비교적 양호한 환경이었다. 주도적으로 과제를 실행하는 경험도 했고 실험 기술도 많이 배웠다. 그런데 조용조용한 보스가 토요일 오전에 꼭 세미나를 했다. 물론 참석은 자유고, 불참석으로 인한 불이익도 없지만 아무래도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스는 은근히 연구하는 사람은 토요일에 쉬면 연구 성과를 낼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같이 석사를 했던 동기들이 한국에서 괜찮은 곳에 취직했기에, 딸은 석사 후 연구원을 마치고 한국에서 취직해서 살 생각도 잠시 했었다. 우리는 반대했다. 딸의 성격상 누구 지시를 받고 일하지 못할 것으로 봤기에 외국으로 나가 박사 과정을 밟으라고 했다. 호랑이 보스 아래서 4년 간의 고된 박사과정을 마치고 마지막 논문 학기에 미국 취업이 되었다.
미국 취업도 쉽게 되진 않았다. 취업이 잘 안될 때, 한국 취업도 배제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딸은 단칼에 거절했다. 자신은 한국 직장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는 거였다. 지금은 많이 민주적으로 되었다고 이야기해도 들은 척 하지 않았다. 어려서 겪은 부정적 경험이 아주 강했던 것 같다.
'고생 총량의 법칙'이 있는 건지 현 직장은 아주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누구도 큰소리 내지 않고 서로를 배려해 주는 환경,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극 수용해 주는 분위기에 딸은 하루하루 즐겁게 일하면서 진보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딸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국으로 들어오진 않을 것 같다.
딸이 아기를 낳고 나니, 손주가 보고 싶어서 딸이 가까운 곳에서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딸을 외국으로 돌린 우리 탓이지.... 애써 돈 들여 공부시켰더니 점점 이상해져가는 미국에 빼앗겼다는 생각도 자꾸 들어 좀 억울하기도 하다.
55일 된 손주의 모습이다. 32일 된 아이를 보고 왔는데... 그간 많이 컸다. 엄마 말에 옹알이도 하고 음악에 맞춰 춤도 추는 것 같다. 딸이 매일 보내주는 이 동영상을 보며 손주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랜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조형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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