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대한민국 군대 -대한군무도독부

최성주 주주통신원l승인2018.01.11l수정2018.01.25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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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독립운동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상해(上海)에 수립되고 만주지역이 군사적 기능을 실질적으로 담당하게 되자 그 중요성이 더해 갔다. .....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내외국민에게 독립전쟁에 대한 각오와 군사행동에 대한 노력을 당부하였고 끝내는 장기전쟁계획이 시정방침으로 발표되었다. ..... 이로부터 만주의 한인 독립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적 임무를 담당한 국군으로서 국내의 한인의 여망을 받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만주의 무장독립군과 임시정부는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최운산 장군은 1912년부터 봉오동에서 100여 명 규모의 자위대를 운영하였고 그 사병부대를 모체로 전국에서 모여든 애국 청년들을 독립군으로 훈련 양성하였다. 독립군의 숫자가 수백 명으로 늘어나자 1915년 봉오동 산중턱을 개간하여 연병장과 대규모 막사를 지어 군사기지를 건설하였다. 이미 500명 이상의 정예 독립군부대 <도독부>를 운영하던 1919년 임시정부가 창립되자 최운산 장군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공화국을 함께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도독부>를 대한민국의 정식 독립군부대 <대한군무도독부>로 개칭하고 형님을 사령관에 추대하였다. 백초구 순경국장을 사직한 최진동 장군은 동생 최운산, 최치흥과 함께 <대한군무도독부>를 지휘하며 무장독립전쟁 준비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무력투쟁을 독려하였다.

▲ 봉오동전투 당시 독립군들이 사용한 통행증, 총사령관 최진동장군 명의의 이 통행증은 대한민국 2년, 즉 1920년 6월25일 발행한 것으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대한민국의 군인의 신분이었다.

<대한군무도독부> 소속의 670여 명의 독립군은 1912년 이래 오랜 기간 훈련 양성된 정예 부대원들이었다. 그러나 그 규모의 병력만으로는 당시 아시아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일본 정규군과의 전쟁에 대비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한 최운산은 간도의 모든 독립군을 만나 대규모 군단을 이루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였다. 3.1 독립선언 이후 독립군이 되려고 간도로 넘어오는 청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고, 이미 군자금을 제공받고 있던 부대도 있었다. 최운산은 모든 부대에 무기와 식량 등 필요한 군자금 일체를 제공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응답한 여러 부대가 봉오동 주변으로 결집하였고, 1920년에는 그 숫자가 몇 천 명에 이르는 연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게 된다. 홍범도, 김좌진도 <대한북로독군부> 소속의 연대장들이었다.

▲ 봉오동 전투 당시 사용된 피묻은 태극기!

물론 통합을 이루기까지 지난한 과정이 있었다. 수차례의 회의 끝에 1920년 5월 3일 대한군무도독부와 국민회의 군무위원회에 속한 국민회・군정서・신민회・광복단・의군단의 6개 단체 대표들이 봉오동에서 회의를 열고 협의한 18개항의 협의서 「재북간도각기관협의회서약서(在北墾島各機關協議會誓約書)」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보름 후인 1920년 5월 19일 통합부대가 최종 성립되었다. “대한북로독군부 성립 서약서(誓約書)의 전문” 내용이다.

<誓約書>

我兩機關(아량기관, 우리 두 기관)은 민족정신의 통일과 軍務勢力(군무세력)의 확장을 讓(양)하기 謨(모)하기(주: 도모하기?) 위하여 永久合一(영구합일)할 것을 확실히 서약한다.

-국민회의 군무위원회와 군무도독부의 명칭을 취소하여 기관을 통합하여 大韓北路督軍部(대한북로독군부)라고 개칭한다.

-국민회는 행정기관, 대한북로독군부는 군사기관으로 하여 사무를 각각 집행하는 것으로 하여 국민회는 북로독군부를 보조하고 일체 군무를 籌備(주비)할 것.

-전 대한군무도독부의 지방기관인 地方局(지방국)은 국민회에 귀속할 것.

-위 서약은 양 기관대표 날인일로부터 시행한다.

대한민국 2년 5월 19일

전 대한군무도독부 대표 최진동.

대한국민회 대표 김병흡, 군무위원 대표 안무.

이 서약서를 발표한 날짜가 대한민국 2년 5월이다. 우리 독립군들은 대한민국의 연호를 사용했다. 만주의 독립군들은 이미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독립전쟁에 임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그들이 원하는 독립된 나라는 군신의 나라 조선을 되찾는 것이 아니었다. 상해 임시정부가 주창한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한 인민들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을 함께 건설하겠다는 의지, 그 가치를 위해 헌신하고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더 많은 독립군단체들이 합류했고 봉오동에 결집한 <대한북로독군부>는 명실상부한 대군단이 되었다.

국내 진공작전의 일환으로 두만강변의 헌병대 등 주요 거점을 70여 차례 선제공격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만주지역의 항일독립군단체들은 3·1운동 이후 축적된 무장력을 바탕으로 1920년에 들어와서 활발한 국내진공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상해의 『독립신문』은 1920년 3월부터 6월까지 독립군의 기습대와 전령대가 협동하야 도강하여 벌인 소전투가 총 32회에 달했고, 일본 순경대정탐을 격살하고 일본관서와 순사파출소를 파괴한 것이 34개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관헌은 북간도의 독립군단체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무력침격을 감행하였다”고 보고한 바 있는 최명록부대(군무도독부)가 1920년 3월부터 6월에 걸쳐 무려 36회에 걸쳐 국경의 종성군을 공격하였다고 기록했다.”

독립군들이 봉오동에 계속 모여들고 있으니 독립군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토벌해야 한다는 일제의 보고서가 계속 이어지자, 일본군은 만주의 독립군을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봉오동에 결집한 독립군들을 완전히 토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대규모 출병을 했으나 일본군의 작전을 사전에 탐지한 우리 독립군의 첩보력과 지휘부의 치밀한 대응에 일본군이 완패한 전쟁이 바로 “봉오동전투”이다. 일본군은 <대한북로독군부>의 실체와 군사기지 봉오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전쟁을 시작했다. 봉오동은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로 지리적으로도 완벽하게 사통팔달인 곳이고, 입구에서 15리 정도 산으로 들어간 곳에 견고한 토성을 쌓아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본부가 있고 그 주위를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곳이다.

<대한북로독군부>의 중심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대한군무도독부>는 밀정들이 접근하기 어려워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조직이었다. 1919년 독립선언 이후 모여든 독립군이 아니라 1912년부터 훈련하고 실전에 투입되었던 정예 무장부대원들이었기 때문이다. <대한군무도독부는> 통합독립군부대 <대한북로독군부>의 군사적 역량을 담보해냈다. 북로군정서가 운영한 단기군사학교 <사관양성소>도 시찰·관리하였다.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한일합방 이후 시나브로 패배의식에 젖어가던 국내외 애국세력의 가슴에 횃불을 지펴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 회자되면서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봉오동대첩”과 이어진 일본군의 보복전을 격파한 “청산리대첩”도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의 승리이다. 최운산 장군 형제들과 누구나 평등한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 건설을 꿈꾸며 목숨을 걸고 헌신한 북간도의 모든 독립군들이 함께 이뤄낸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이다.

편집: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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