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 불린 "봉오동대첩"의 그날

다시 쓰는 만주 무장독립전쟁사 최성주 주주통신원l승인2018.09.09l수정2018.09.1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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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6월 7일 밤새 두만강을 건너온 일본군은 새벽 6시 30분경 고려령 서편 1,500m 고지에 도달해서 봉오동을 향해 전위부대를 내보냈다. 그러나 매복해서 기다리던 독립군 전위대가 오히려 일본군 전위부대를 전멸시키고 재빠르게 본대로 복귀했다. 전위부대원을 잃은 일본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해 고려령을 넘었다. 고려령을 넘은 일본군 보병부대 본진이 11시경 봉오동 상촌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산 위에 매복한 독립군들은 잠복 부동한 채로 그들이 모두 마을을 지나 산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봉오동전투 당시 복립군이 팠던 참호에서

한 달 전부터 일본군이 공격할 것이란 첩보가 있었다. 최운산 장군이 이미 주민들을 대피시킨 후라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어린애였지만 담대한 성격의 최운산 장군의 큰딸인 청옥고모가 마을에 도착한 일본군을 몰래 숨어서 보았다. 번쩍거리는 견장을 붙이고 긴 장화를 신은 일본군들이 요란하게 나팔을 불면서 행진곡과 함께 마을을 지나 산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본부였던 최운산 장군의 집에서 마구간에 묶여있는 말 몇 마리를 발견했다. 밤새 대포와 기관총 등 무거운 무기를 싣고 산을 넘어온 말들이 지쳤다고 생각한 일본군은 마구간에 있던 말들을 탈취 무기 수레를 지워 산으로 끌고 갔다.

일본군의 후미가 매복지점을 지날 무렵 봉초봉 독립수 아래에 서 있던 사령관 최진동 장군이 전투개시를 알리는 신호총을 발사했다. 동시에 온 산에서 맹렬한 사격이 시작되었다. 완전히 포위된 일본군은 혼란에 빠졌다. 마구간에서 탈취해 간 말들이 총소리에 높이 뛰어올랐다. 제일 좋은 말을 골라 탔던 일본군 장교는 거꾸로 떨어졌다. 게다가 기관총과 대포 등 무기 수레를 끌고 간 말이 일본군이 무기를 내리기도 전에 산 아래로 내달렸다. 전투에서 무기를 제때 사용하지 못한 것이 일본군에게 치명타가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 당시 일본군이 떨어뜨리고 도주한 지휘도와 장총에 착검했던 단검

그러나 일본군은 빠르게 전열을 정비해나갔고 전투는 격렬하게 이어졌다. 독립군은 산 위에서 매복하고 있어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될 무렵 산 하나를 책임지고 1개 연대를 지휘하고 있던 홍범도 장군이 자신의 휘하 부대원들에게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한북로독군부> 총본부의 퇴각 명령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정식 군인이 아닌 빨치산이라 칭하며 살아남아 조국의 독립을 보자고 했다. 부하들과 함께 매복 전투지점을 뒤로하고 퇴각한 것이다.

홍범도 군에 속해있던 독립군 이종학이 남긴 회고록에도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날 아침……. 望塔(망탑, 망루)은 봉오골 가은産 맨 마지막 3골 어구 가운데 峰(봉우리)에 있었다. 일본 군대는 일시에 좌우방면에서 침입하여서 望坮(망대, 망루)를 향하고 突入(돌입, 돌진)하여 우리 望坮있는 데다가 사격을 시작하였다. 우리도 마주 사격을 始作(시작)하였다. 잠시 후에 洪범도 대장은 사격을 그치고 북쪽을 향하여 차츰 높은 봉으로 오르라는 命令(명령)을 전하였다……. (중략) 홍범도 장군은 ”우리는 죽지 아니하고 독립을 해야 된다.”고.... 우리는 정식 군대가 아니고 빨치산이다. 그러니 전략과 전술이 정식 군대와 빨치산이 판이한 것이다.”라고 흥분에 겨우신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독립군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는 대한민국의 정규군대였다. 연대장 홍범도 장군의 지휘를 받던 신민단 출신 독립군들은 총사령부의 퇴각 명령이 없었으니 그곳에 남아 자리를 지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중심 병력이 빠져나가 수적 열세에 처한 남은 군사들은 일본군의 집중 공격에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독립군들이 산 위에서 삼면을 포위하는 전략으로 승세를 굳혀가던 중에 한쪽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아군에게 치명적 위기가 닥쳐왔다.

봉초봉에서 이 사태를 파악한 최운산 장군이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산에서 내려와 전투를 이어갔다. 매복은 풀어야만 했다. 전투에서 매복전과 백병전은 그 어려움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자칫 아군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이 주먹만 한 우박이 떨어지고 적군과 아군의 식별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비로 인해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가 전열을 정비한 최운산 장군의 부대원들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자연조건이 나쁠 때는 그곳의 지리에 밝은 군대가 전투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다. 폭우가 쏟아지는 중에 일본군 후속 부대가 도착했고 산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군 후속 부대는 독립군을 속이기 위해 군모에 두른 붉은 띠를 떼어내고 산으로 들어왔다. 쏟아지는 비로 인해 피아를 구분하지 못한 일본군은 퇴각하고 있던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사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군 사상자가 수백에 이른 이유이다.

오백 명가량 전사하고 천 명이 넘는 부상자가 생겨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일본군은 비파동 계곡으로 빠져나가 유원진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퇴각하였다. 독립신문은 “일본군의 전사자는 120여 명, 독립군 측의 사망은 1명, 부상자 2명이었다.”라고 아군의 승전보를 전했으나 전투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현장에 계셨던 할머니 김성녀 여사는 봉오동전투의 전황을 전하면서 당시 일본군은 사망자 오백 명, 중상자만 7백 명에 이르렀고 아군인 독립군 사망자도 수십 명에 달했다고 증언하셨다.

▲ 이름 모르는 대형 무덤이 있어 가족이 없는 독립군들을 합장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일본군의 ‘전투 상보’는 자신들이 상대한 “독립군들의 사격술이 상당히 훈련되어 있으며,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할 때는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고 용감하게 전투한다.”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전투 상보'에 개별 전투상황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대한북로독군부>의 지휘부나 전체 운용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자신들이 싸운 부대의 전체적 운용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지휘체계도 파악하지 못했다. 단지 “북로독군부(전 명칭 대한군무도독부) 제1, 제2중대(수령 최명록), 대한독립 신민단(김규면), 독립의군(홍범도)에 속하는 것으로서 지휘관은 불명”이라고만 짐작하여 기록하였다.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쳐들어온 일본 정규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우리 독립군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최운산장군은 소 돼지를 잡아 축하잔치를 벌여 독립군을 격려했고, 부대별로 기념촬영을 하게 했다. 그러나 전쟁과 이산의 아픔 등을 겪은 탓에 지금까지 전해지는 사진이 거의 없다. 단지 지금도 청산리전투 후 찍은 사진이라고 검색이 되는 몇 장의 사진이 어쩌면 봉오동전투 후에 찍었던 기념사진이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사실 청산리전투는 독립군들이 연해주로 이동하던 도중에 치러진 전투로 들판에서 기념촬영을 할 만큼의 여유도 동행했던 사진사도 없었으리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 산으로 둘러싸인 독립군 부대 본부가 있던 곳

최운산 장군은 치열했던 '봉오동 독립전쟁'의 실제 현장을 사진으로 남기게 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이 사진을 임시정부로 보내 국내외에 알리려 했다. 행정을 담당했던 국민회에 보낸 공문을 통해 확인된 내용이다.

“별지 전쟁 촬영 사진 3매는 제2남 지방의 박준재(朴準載) 씨가 전쟁 당시 실시 전황을 보고 촬영한 것이다. 이것은 임시정부로 보내서 석판으로 인쇄하여 세계에 선전하려는 것인데 보신 뒤에 반송하기를 바람.”

그러나 아쉽게도 다시 반송해달라는 요청을 할 만큼 귀한 사료로 생각한 이 사진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당시 임정에서 사진을 받아서 어떻게 처리했는지, 사진이 다시 돌아왔는지도 알 수가 없다. 너무 아쉬운 부분이다.

전투 후 평가회의에서 '대한북로독군부' 총사령관인 최진동 장군이 지휘관 중의 한 명인 홍범도 장군을 크게 문책했다. 전쟁 중의 지휘관이 제대로 응전을 하지 않고 일찍 퇴각하여 아군에게 위기상황을 초래한 것을 문책한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이 "독립군 내홍의 건"이라는 제목의 일제 밀정보고서로 '주 간도 총영사 대리영사 사카이 요사키치(堺與三吉) 보고서'에 들어있다. 사실 전투에 임하던 지휘관이 전투 중 자신의 부대원을 데리고 전투현장을 이탈한 것은 항명죄에 해당한다. 당시 최운산 장군은 홍범도 장군의 책임이 무겁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것을 최진동 장군에게 간청하였다.

봉오동 독립전쟁 당시 우리 독립군은 대규모 정규 군단의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 보급부대, 의무부대 등이 있어 수송과 보급을 비롯한 의무관리 등 병사들의 생활과 안전에도 소홀함이 없는 관리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 부상당한 독립군 병사들을 치료할 의사를 빨리 보내 달라는 전통문을 독립군부대끼리 주고받기도 했다.

다음은 그 공문이다.

‘의사 천거에 관한 조회의 건’ - "지금 더위가 점차 박도하와 질병 발생이 심하여지는데, (봉오동 전쟁)부상자는 아직 치료되지 못하여 진실로 우려하는 바이오며, 용정 제창병원의 의사 구정서(具正書) 씨를 천거하고 또 ○씨의 소개에 의하여 수삼 명의 의사를 권유 입성하시기를 바라오며 작일에도 부상자로부터 재촉이 있는 실정이오매 되도록 구씨에게 소개된 몇 명을 대동하고 내임하시기를 요망합니다."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아군의 사망자만 수십 명이었다. 부상자의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총상을 치료할 의료진이 부족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이 전통문에서 느껴진다. <대한북로독군부> 지휘부는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 전투 전반에 대한 평가회를 가졌다. 일본군 무기 등 노획물과 일본군 사상자의 숫자 등을 보고받았으며, 아군손실 등의 전과를 살폈다.

▲ 김성녀 여사가 1969년 정부에 제출한 진정서 원본 사진이 실려 있는 책에서

김성녀 여사는 당시 아군이 노획한 물자는 “대포 4문, 기관총 수십 정, 장총 5백여 정, 탄환 수만 발에 수류탄 다수에 이르렀으며 일본군의 피해는 射殺 500여 명, 중상자 700여 명, 경상자 1,000여 명”이라고 기록하였다. 이 숫자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밝히고 있는 일본군 피해 규모보다 훨씬 크다.

보급을 담당하며 남편과 함께 전쟁의 승리를 위해 헌신했던 김성녀 여사는 전투현장의 모든 것을 평가한 후 집계했던 회의에서 밝힌 봉오동 독립전쟁의 상황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기며 향후 학자들이 제대로 사료를 찾아 역사적 진실을 밝혀주길 당부하기도 했다.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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