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역사의 고비마다 시민들이 모여들어 역사의 물꼬를 바꾸었던 곳

▲ 바즐라프 광장 중앙에는 프라하의 봄 때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공에 항의하여 21세의 나이로 분신한 카렐 대학생 '얀 팔라흐'와 당시 희생된 19세의 '얀 자이츠'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자유와 정의의 땅에서/김광철

끝없이 펼쳐지는 황금벌판
야트막한 언덕 위를 활공하는 솔개의 날갯짓에 질린 까투리
푸드덕 날아오르면 잽싸게 낚아챌 것 같은 아득한 들판
그 끝 가문비나무, 솔밭 사이로
몇 겁의 시간을 두고 흐르고 또 흐르며
뭇 생명들의 이야기를 품어 시가 되고 설화를 품은 블타바여!
그들 생명의 젖줄이 되고
그들 자유의 노래가 되고
그들 정의의 외침이 되니
그 젖줄에 기대어 역사를 만들고
그 노래 모아 말과 글을 만들고
그 외침 모아 마을과 나라를 만들어
평화의 땅 이루고 대대손손 지켜 왔다네
시절이 하수상할 땐
안후스도, 안네포무츠크도. 두부체크도 등장하고
샤를대제, 스메타나, 드보르자크를 잉태하고 키워낸 이 땅을
뉘라서 넘볼쏜가
프로이센도, 오스트리아도, 소비에트도
잠시 윽박지르고 짓누를지라도
기어이 다시 들고 일어나
자유, 정의, 진정한 민주의 깃발 높이 들었나니
프라하 높은 언덕 위에 휘날리는
삼색 깃발, 십 이성 푸른 깃발이여!
대표는 있으되 군림하지 않으니
굳이 지킬 경찰도, 군인도 세워두지 않더라
자정 넘은 시간에도 불 밝히고 열려있는 대통령궁
그 옆 일천년 역사를 통하여 완성했다는 비트성당 야경을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둘러보며
내 나라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나그네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더라.

 

2014년 8월 전교조 교사들이 중심이 된 동유럽 연수단 '베감원정대'의 프라하 일정 중 이틀째 날은 자유 여행 시간이 주어졌다. 나와 같은 방을 쓰고 있는 광주에서 온 교사들과 그분의 동료들을 중심으로 하여 프라하 시내 관광에 나섰다. 오전에는 블타바 강에서 선상 유람선도 타 보고 낮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하여 찾았다. 그런데 마침 내부 수리 중이라서 국립중앙박물관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리 일행은 국립중앙박물관 앞에 펼쳐진 광장으로 향했다.

▲ 바즐라프 광장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국립박물관, 그렇지만 내부 수리 중이라서 들어갈 수 없어 아쉬웠다.

광장의 넓이는 750m×60m로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광화문 광장보다 너비는 좁다. 그렇지만 이곳 바츨라프 광장은 체코 역사의 고비 때마다 비켜가지 않고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을 기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선포한 곳이고, 1948년에는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여 사회주의 공화국은 선포했으며, 1968년 두브체크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짓밟기 위하여 소련이 앞장선 바르샤바 조약군 20만 명이 탱크를 앞세우고 프라하로 진격해 오자 시민들이 맨 몸으로 광장에 나가 탱크를 저지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1969년 마침내 이곳에 운집했던 군중 가운데 찰스 대학의 학생이었던 얀 팔라흐(Jan Palach)라는 학생이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략에 분노하여 분신해 죽어갔다. 그의 기념비가 광장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 국민의 봉기가 촉발되었다.

▲ 바즐라프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프라하의 봄 때 희생된 학생들의 묘비가 있는 곳

체코 민주화의 상징인 두브체크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나치의 점령에 맞서 지하 저항운동에 가담했다. 소련에서 공부를 한 그는 종전 후에는 공산당 내 서열이 계속 올라 1962년에는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유력인사가 되고, 1967년 10월 프라하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당과 경제 개혁론자와 슬로바키아 민족주의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당시 집권자인 노보티니 체제에 대항했다. 1968년  노보트니를 대신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내걸고 4월 9일 '체코슬로바키아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개혁요강이 발표되었다. 그의 집권 기간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은 언론, 출판, 거주 이전, 여행 등의 큰 자유를 누렸다.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하여 소련은 깊은 우려를 표명했고, 양국 최고 지도자들은 회담을 통해 합의안을 만들어낸다. 동유럽 공산국가 지도자 회의에서도 이 합의안이 비준되었지만 이를 불만스럽게 여기고, 자유화운동의 결과를 두려워한 소련과 동맹 위성국가들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두브체크는 소련으로 압송되었다가 돌아와서 연방의회 의장으로 좌천되었다. 그 후 1970년 대 말에는 산림청 감독관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두브체크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권력의 독점을 포기하고 연립정부의 구성에 동의한 1989년 12월에 다시 체코슬로바키아 국정의 최정상으로 복귀했다. 1989년 12월 28일 공산당과 야당인 시민회의 사이에 맺어진 협정에 따라 두브체크는 연방의회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992년 1월 교통사고로 다친 후 그해 죽었다고 한다.

▲ 바즐라프 광장은 민주화의 성지에 걸맞게 꽃과 나무들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1989년 후반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정책에 따른 민주화 물결이 동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급변화했다. 1989년 11월 시민 포럼이 주도한 시민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진다. 1989년 12월 29일, 프라하의 봄을 이끌었던 극작가이자 시인인 바츨라프 하벨이 새 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개혁을 주도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은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으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체코의 민주주의 발전 과정을 보면서 위로부터 혁명이 외세에 의하여 좌절이 되었다. 그렇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이 외세의 침입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온몸으로 저항했다. 우리나라의 동학이나 삼일 혁명과 같은 저항이었다. 이런 시민 정신은 시민들 속에 면면히 흐르고 간직되어 오다가 결정적인 시기가 오니 결국 그 꽃을 피우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체코와 우리는 비슷한 동병상련을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결국 서로 다른 민족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방 해체의 길을 갔지만 우리는 남북이 같은 민족으로서 연방제에 의한 통일 국가를 이루는 꿈을 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 국립박물관에서 내려다보는 바즐라프 광장의 모습, 주변에는 바즐라프 장군의 기마상도 보이고, 얀 후스, 드보르자크 등 체코의 위인들의 동상들도 많이 들어서 있다.

체코 민주화의 과정을 보면서,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무슨 종교든 이념이든 인간의 얼굴을 포기한 것들은 모두 썩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저버린 체제는 그 구성원들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도 재벌 독과점, 대물림식의 천박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체제로 전환되어 나가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금 되새긴다. 

▲ 프라하의 바즐라프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식당 '마미'이다.
▲ 한국식당이라서 김치찌개 등을 시켜서 얼큰하게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소주도 팔고 있다. 한국인 휴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서 더욱 반가웠다.

이렇게 바즐라프 광장을 돌아다니면서 관광을 하다 오후 늦은 시간에는 식사를 하기 위하여 식당을 찾았다. 함께 여행길에 나선 선생님들이 양식에 너무 질렸다고 하며 한식집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한국식당을 찾기 위하여 광장을 돌아다니며 물어보았지만 신통한 답은 없었다. 그러던 참에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어 말을 걸어보았더니 역시 한국인이었다. 그들한테 혹시 이곳에서 한식집 아는 곳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자신들이 오늘 점심을 먹었다는 한식집 '마미'를 소개해 준다. 인터넷에 길 찾기를 눌러서 그 한식집을 찾아갔다. 한국인이 이곳에서 몇 년째 한국 음식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서빙을 하고 있는 젊은이한테 "한국에서 왔느냐?"고 했더니 그렇다는 것이다. 서울에 있는 모 대학을 다니다가 지금은 휴학을 하고 외삼촌이 운영하고 있는 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행 중에 이렇게 한국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역시 서구 여행 중에는 빵과 느끼한 고기 종류만 먹다보면 그런 음식이 좀 질린다. 이럴 땐 한식 또는 중국 음식이라도 먹으면 훨씬 입맛도 살아나고 신나는 식사가 되는 것은 나만의 체험은 아닐 것이다. 오래만에 먹어보는 김치찌개에 소주까지 한 잔 사서 먹을 수 있어 참으로 행복한 식사였다. 

낮에는 바즐라프 광장 등 프라하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로 돌아왔는데, 일부 사람들이 프라하 성 야경을 보러 간다는 것이다. 나도 그 사람들과 함께 프라하 성 야경을 보기 위하여 나섰다.

▲ 프라하 성 안에 있는 성 비트 성당의 야경이다.

프라하 성을 향해 비탈길을 오르는데 복숭아를 파는 가게가 보였다. 갑자기 복숭아가 먹고 싶어져서 가게에 들어갔다. 일행들에게 말을 안 하고 가게에 들르는 바람에 일행을 놓쳤다. 일행들은 나를 챙기지 않고 밤길을 마구 올라간 것이다. 열심히 쫓아가다보니 갈랫길이 나왔다. 낮에 왔던 경험을 살려 '이 길로 갔을 것이다.' 하여 찾아간 길에서 잘못 들어서 일행들을 놓치고 만 것이다. 우리 일행을 찾기 위하여 프라하성 주위를 헤매고 다녔지만 결국은 찾질 못했다. 마침 로밍을 해 간 핸드폰도 배터리가 다 된다는 신호가 와서 만약을 대비해서 꺼 놓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인솔하는 선생님이 나를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걱정이 컸는지 2진으로 오고 있는 김영국 선생한테까지 연락이 간 모양이다. 한참 찾다가 프라하성 야경을 보고 내려오려고 하고 있었는데, 인솔책임자인 김영국 선생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돌아오려는 길이라서 핸드폰을 켜서 받을 수 있었다. 무사함을 알리고 걱정하지 말라 호텔에서 지도를 챙겨왔으니 그 지도를 보면서 택시를 타고 간다고 하여 안심을 시켰다. 

한 30분 동안 택시를 잡느라고 고생을 하다가 겨우 택시를 잡아 탈 수 있었다. 짧은 영어로 운전기사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운전기사는 서울 올림픽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은 모스크바 올림픽 때 복싱 선수로 참가를 하였단다. 메달을 땄느냐고 물었더니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나를 찾느라고 애쓴 인솔 책임자들한테는 호텔로 돌아와서 걱정을 끼쳐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지만 다음 날까지도 분위기는 많이 냉랭했다. 그렇지만 밤 12시가 넘어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택시를 타고 숙소인 호텔을 찾아오는 것도 역설적이지만 참 스릴은 있었던 체험이었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광철 주주통신원  kkc08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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