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초 경복궁 사생대회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는 발달장애인과 함께

회갑을 보내면서 평생 사회 혜택만 누리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받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나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었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내 작은 재능을 아무런 대가 없이 나누는 삶을 실천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아주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어 누구나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서울시 50플러스재단을 알게 되었다. 이 재단에서 추진하는 수십 개 사업 중 발달장애인 돕기 자원봉사를 택했다. 첫 서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하지만 곧 기회가 왔다.

"안녕하세요? 이상직 선생님 맞으시죠?"

"네."

"다음 주에 면담하러 오실 수 있나요?"

"네. 고맙습니다!"

50대 합격자께서 3월 초 약 일주일 남짓 봉사하다가 힘들다며 그만두었다고 했다. 발달장애인센터장께서 아직도 봉사할 생각이 있으면 면담을 하자고 전화를 주신 것이다. 드디어 기회가 주어져서 4월 초부터 봉사하게 되었다. 이후 나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첫날, 둘째 날에 놀랐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단순 수업보조 역할을 예상했는데, 그날 내게 맡겨진 일은 그 이상이었다. 수업 분위기는 어리둥절할 정도로 산만해서 한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수업시간에 계속 자기가 하고 싶은 단어만 되뇌는 청년,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청년, 자기 자리에서 그대로 소변을 보는 청년 등 충격적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일은 양치질을 돕는 일이었다. 반찬을 잘게 잘라 밥을 먹여 주고 나면 양치질을 시켜 주어야 한다. 먼저 제대로 씹지 못한 음식물 찌꺼기를 손가락으로 빼낸 후 칫솔로 치아를 닦아주는 일이다. 칫솔로 이를 닦아주려는데 입안에 남아있던 음식물이 얼굴에 튀었다. 순간 놀라 주춤했다. 어린 손자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과연 며칠을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동시에 한 가지 묘안이 번뜩 떠올랐다. ‘그래, 내 아들이라 여기고 대해보자.‘

남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은 나를 이기는 소중한 체험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 지난 5월 초 경복궁 사생대회에서 그림 그리는 발달장애인 청년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이상직 주주통신원  ysangl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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