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기억해야 할 코뮤니스트 항일혁명가 김명시

올해는 3・1 혁명 100주년 되는 해이다. 3・1혁명 당시 전체 조선인 가운데 1/10이 3・1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제국주의 일본의 잔혹한 탄압으로 7,500명이 넘는 시민이 살해되었고 15,0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투옥된 사람들만 무려 45,000명이 넘는다. 수원 제암리 집단 학살이나 님웨일즈의 『아리랑』에서 일제의 만행을 읽다보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 사상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지역이 경상도이고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가장 많이 투옥된 지역이 평안도-경기도 순이다.

3・1 혁명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위대하다. 여성들이 역사상 최초로 집단적인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도 역사적 의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3・1 혁명 전에는 여성 가운데 선각자 일부만 국채보상운동이나 의병활동에 참여했을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3・1혁명이 지니는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봉건적인 전제군주제에서 근대 시민이 주체가 되는 민주공화제로 정치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화한 데 있다. 정치학자들이 3・1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부르주아 혁명은 근대 시민혁명을 가리킨다. 18-19세기 서구사회에서 숱하게 일어난 시민혁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명예혁명(영국), 미국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이다. 몇 년 전 뮤지컬 영화로 상영된 『레미제라블』은 바로 프랑스 시민혁명을 시대배경으로 한다.

정부군에 집단 학살당하는 바리케이드 시민군들을 보노라면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학살당한 시민(군)이 떠올라 저절로 눈물이 난다. 영화 속 민중의 합창이 울려 퍼지는 장면에선 분노와 정의감이 뒤섞인다.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를!'이 노래가 한국 민주화운동사에 길이 남을 '님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지금 홍콩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부르고 있다 한다.

다시 오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부끄럽게도 3・1만세 시위 당시 서울지역 교사들은 보성의 최린, 배재의 강매, 중앙의 송진우 등 극히 일부 교육자 외에는 만세 시위에 나서질 않았다. 부산, 대구, 마산, 광주, 개성, 평양, 함흥 지역 등 전국적으로 교사들이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나선 것과 대조적이었다.

오히려 학생들의 움직임을 보고 "조선이 독립되면 내 손가락에 불을 켜라"며 만류했던 학교도 있다. 마치 4・19혁명(1960) 당시 그 시발점이 되는 '대구 2・28 데모'의 주역 경북고 학생들이 거리진출을 시도하자 교사들이 만류한 것과 같다. 이유야 그럴 듯하다. 아이들이 다칠까봐!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 담벼락을 부수고 거리로 진출한다. 미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떠오른 17살 김주열 군의 죽음이 발생하기 15일 전이다. 역사의 평가는 냉정하고 준엄하다.

『조선교육사』를 쓴 조선의 페스탈로치 이만규 선생은 그 책에서 서울지역 교사들을 '교육자의 졸열성'으로 표현하며 준열히 비판하고 있다. 이만규는 개성지역 만세시위를 학생들과 함께 주도하다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 옥고를 치렀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난 해 문재인 대통령이 '대구 2・28 데모'를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직접 대구에 내려가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그 정신을 기렸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크나큰 진전이 아닐 수 없다.

3・1혁명이 발발한 그해, 참담한 희생과 패배주의를 딛고 조선의열단이 창단된다. 따라서 올해가 의열단 창단 100주년을 기리는 해이다. 창단 당시 회의에 참석한 의열단원 13명은 누구도 변절하지 않았다.

▲ 왼쪽 사진은 1920년 조선 총독 등을 암살하려던 첫번째 거사 계획이 실패하고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혹독한 옥고를 치른 의열단원들이 경성감옥에서 일부 석방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은 창단 때나 그 이후에 참여한 의열단원들 모습이다. 비밀결사단체라 단원의 사진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래픽 : 박향미 한겨레 신문 기자 phm8302@hani.co.kr, 사진 출처 :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의열단 창립멤버 가운데 절대 다수가 밀양을 비롯해 경상도 출신 열혈 청년들이다. 3・1만세 시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경상도 지역과 무관하지 않다. 탄압에 굴하지 않고 저항의 불길로 더욱 거세게 빛을 발했던 것이다. 최연소 의열단원은 19살 석정 윤세주였다.

바로 그 3・1 만세 시위 당시 마산지역에서는 12살 소녀가 참여했다. 1940년대 조선의용군 여자부대 지휘관이 되어 한 손엔 총, 한 손엔 확성기를 들고 일본군 진지 50m 적진까지 다가가 선무공작을 하던 김명시가 바로 오늘 소개할 그분이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마산항에서 생선을 떼어와 행상으로 5남매를 키웠다. 너무나 빈곤하여 오빠 김형선이 학업을 중단한 것처럼 김명시도 배화여고보를 입학한 지 1년 만에 중단했다. 학업을 중단한 그 해 김명시는 1925년 결성된 고려공산청년회(약칭 고려공청)에 가입했다. 그리고 마산 제1 야체이카(세포)에 배속돼 활동했다.

모두 3살 위 오빠 김형선의 권유와 영향이었다. 여동생을 마산에서 서울로 유학을 보낸 것도, 그리고 고려공청에 가입하게 한 것도 오빠 김형선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김형선은 일제강점기 항일혁명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조직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조선공산당이 창당되기 1년 전 1924년 마산공산당과 마산공청을 만든 마산 항일혁명운동의 걸출한 지도자였다.

▲ 김명시 장군과 남동생 김형윤. 남매 둘 다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실천한

코뮤니스트로서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사진 출처 : 열린사회희망연대 소장)

김명시는 1925년 공청에 가입한 지 석 달 만에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21명 유학생 중 한 명으로 공청 책임비서 박헌영이 써준 소개장을 들고 「모스크바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에 입학한 것이다.

1925년 4월 17일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중국집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이 극적으로 창당된다. 창당 직후 제일 먼저 사업을 벌인 게 핵심 활동가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이른바 사회주의 조국인 소련 모스크바로 조선의 청년들을 보내 견실한 사회주의자를 육성하는 게 첫 번째 과업이었다. 당시 사회주의는 민족해방운동의 한 조류로서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항일독립투쟁의 한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심훈의 친구 박헌영, 박헌영의 연인이자 「눈물 젖은 두만강」의 주인공 주세죽, 「광야」, 「청포도」를 남긴 항일혁명시인 이육사가 대표적이다. 『아리랑』의 김산을 코뮤니스트로 만들었지만 정작 자신은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남았던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운암 김성숙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한 때 코뮤니스트였다. 광주학생운동(1929-1930)의 주역 장재성 역시 모두 그러한 흐름 속에 살았던 인물들이다. 광주학생운동 당시 서울여학생 시위를 주도한 박차정, 허정숙 또한 코뮤니즘을 항일독립운동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1920년대 들어 항일독립운동은 사상적 분화를 겪었다. 국내 민족운동이 민족개량주의로 흐를 때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이 항일운동의 쌍벽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 중반엔 코뮤니즘이 사상과 운동 두 측면에서 빠른 속도로 항일독립운동의 주류가 되었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설되고 레닌의 저작이 우리말로 번역, 소개되었다. 마르크스의 저작 역시 1925년을 기점으로 번역돼 나왔다.

해외에선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개별적인 의열투쟁에서 군사조직에 기초한 무력항쟁으로 노선을 전환한 것 또한 그러하다. 아나키스트이자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김원봉은 코뮤니스트 안광천과 함께 북경에서 '레닌주의 정치학교'(1929-1930)를, 그리고 남경 근교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1932-1935)를 세워 변증법과 유물론을 가르치며 항일혁명가들을 길러낸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항일전선의 고결한 영혼! 석정 윤세주와 윤세주의 절친이자 항일혁명시인 이육사는 모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1기 졸업생들이다.

바야흐로 항일독립운동 노선에서 코뮤니즘이 헤게모니를 쥐었고 이후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독립운동 역시 코뮤니즘 노선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대공황이 혁명운동 노선을 전환시키는 시대배경으로 작용한 것이다. 세계대공황은 해외 식민지(시장) 확장과 식민지 하층 노동자들의 임금인하를 강제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위기를 돌파하려 하였고 더욱 수탈적 성격을 노골화하였다.

코뮤니스트들은 이 점을 이용하여 기층 조직으로부터 일꾼들을 발굴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개건하려 하였다. <공장과 기업소로! 농촌으로!> 밑바닥 민중조직으로 들어가 코뮤니스트 항일운동조직을 건설하고, 나아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 하였던 것이다. 1930년대 제주 해녀들의 항일투쟁에도 코뮤니스트들은 연대를 아끼지 않았다.

원산 총파업(1929)을 필두로 1930년대 조선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과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그러하다. 예전 교과서에선 일제가 공문서에 쓰던 '적색노조', '적색농조'라고 배웠던 기억이 난다. 1930년대 전반기 조선총독부의 허가 아래 전개된 조선일보의 '문맹퇴치운동'이나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과는 차원이 다른 항일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된 것이다.

모두 코뮤니스트가 중심이었고 그들이 주도했다.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의 정달헌을 비롯해, 이주하, 김형선, 김명시, 이재유, 정백, 김형윤 등이 그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인물이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혁명가가 김찬이다. 김찬의 바로 윗선이 김명시의 오빠 김형선이었다. 그리고 김형선의 바로 윗선이 김단야로 그는 상해에 머물며 기관지 「꼼무니스트」를 발간해 조선 국내로 반입했다.

「모스크바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에서 김명시는 지리와 수학, 생물과 화학, 물리학을 비롯해 자연과학 일반을 공부했다. 그리고 유물론과 변증법, 러시아공산당사, 세계혁명사를 수학했다. 레닌의 표현대로 약소국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항일혁명가로 자신의 정체성을 견결히 정립했다.

「모스크바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은 베트남 '민족 영웅' 호치민, 거대한 중국 대륙의 '작은 거인' 등소평, 코뮤니스트 항일혁명가 김단야(본명 김태연), 김단야의 연인 고명자, 조봉암의 아내 김조이, 박헌영, 박헌영의 아내 주세죽이 거쳐간 공간이었다. 이른바 식민지 약소국 항일독립투사들을 양성하던 학교였다. 인도, 베트남, 타이완, 필리핀 각국에서 온 식민지 청년들이 혁명을 꿈꾸며 수학한 공간이기도 했다.

3년제 학교였으나 1년 반 만에 김명시는 임무를 띠고 중국 상해로 잠입하였다. 때는 1927년 6월이었다. 당시 상해 거리에는 코뮤니스트 혁명가들의 시체가 거리에 즐비하였다. 제1차 국공합작(1924)을 깨트리고 장개석 국민당 군대가 저지른 학살 만행이었다. 살얼음판을 걸으며 김명시는 조봉암, 홍남표를 도와 비밀리에 '중국 공산당 상해 조선인지부' 조직을 건설했다.

그리고 홍남표와 함께 1929년 만주 전역을 돌며 항일조직을 밑바닥에서 다져 나갔다. 특별히 기억할 만한 김명시의 항일투쟁이 있다. 1930년 무장대 300명을 이끌고 하얼빈 주재 일본 영사관을 습격한 사건이다. 항일무장투쟁사에서 빛나는 위업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다. 이후 김명시는 일본군의 체포를 피해 목숨을 걸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로 귀환했다.

상해에는 이미 김단야와 박헌영이 20년대 '화요파'를 이어서 30년대'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의 중심인 「꼼무니스트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꼼무니스트 그룹」은 코민테른 12월 테제(1928)와 프로핀테른 9월 테제(1930)에 기초해 활동가들을 대거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김명시 역시 1932년 3월 인천지역 여성노동자 조직을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 어린 여공들을 대상으로 교육과 선전을 도맡았다. 그러나 활동을 개시한 지 2개월 만에 조직이 일제경찰의 촉수에 노출되고 만다. 당시 일제 밀정이나 스파이들은 단돈 2원, 3원에 첩보를 제공하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1932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기념해 만든 선전물과 전단지가 일경에 발각되면서 조직 전체가 괴멸되는 위기의 순간에 처했다.

김명시는 5월 경성을 거쳐 고명자를 만난 뒤 여비 40원을 받아 다급히 벗어났다. 혼자 3개월을 걸어서 경성에서 신의주까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신의주 백마강 역 부근에서 동지의 배신으로 일제 고등계 경부에게 피검된다. 이른바 일제가 붙여준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 주모자가 되어 조봉암 다음으로 센 징역 6년형을 언도 받았다. 예심제도 미결 기간까지 합하여 꼬박 7년을 신의주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해야만 했다.

당시 신의주형무소는 항일독립지사들 사이에서도 추위로 악명 높은 공간이었다.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에 연루돼 함께 옥고를 치른 조봉암 선생 또한 혹독한 추위로 고통을 겪었다. 잔악한 고문으로 낫지 않은 상처가 동상에 걸린 나머지 손가락 7마디를 잘라야 했다. 썩어 들어간 것이다. 25살 처녀 김명시 역시 발이 동상에 걸려 고통스러운 징역살이를 해야 했다. 1958년 2월호 『사상계』 잡지에 기고한 조봉암이 쓴 「내가 걸어온 길」에 나오는 신의주형무소 수형생활 대목 한 부분을 살펴보자.

"나는 자유의 구속이라는 것 외에는 추위 고생이 제일 컸다. 신의주 추위는 이름난 추위다. 그런데 수인들은 그 추위에 대해서 거의 무방비 상태다. 독방 마룻바닥 위에 얇은 거적 한 닢을 깔고 이불 한 쪽을 덮고 눕는데 밤새 몸이 떨릴 뿐이지 푸근히 녹는 일은 거의 없다.

떨다가 떨다가 지쳐서 잠시 잠이 오는데 그 잠든 사이에 슬그머니 얼어 죽으면 네모난 궤짝 속에 넣어서 파묻는 것이고 요행히 죽지 않으면 사는 것이고 살면 징역살이를 되풀이 하는 것뿐이다. 나는 잡방에도 잠시 있어본 일이 있었는데 1홉 5작방(서울식이라면 반 칸 되는 방)에다가 17, 18명 내지 20명쯤 쓸어 넣어 놓으면 앉을 때는 서로 부벼 대고라도 앉지만 누우려면 사람의 몸뚱이들만 자리에 붙이고 사지는 서로 남의 몸 위에 놓게 된다.

5, 6월 삼복더위 중에는 미쳐 나가는 놈도 있고 기가 막혀서 죽어나가는 놈도 가끔 있지만 겨울 추울 때는 오히려 그편이 얼어 죽을 염려는 없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이 서로 부벼 대고 비틀고 자고 나면 사방 벽면에 오부씩이나 될 만한 두께로 하얗게 성애가 슬어서 사명당 사처방 같이 된다."

김명시는 1939년 출옥 직후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 중국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당시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자들은 예외 없이 보호관찰대상이었다. 따라서 일제의 감시는 일거수일투족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41년엔 '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공포해 치안유지법 위반자들을 아무 때나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윤동주 역시 여름방학을 맞아 기차역 플랫폼에서 치안유지법으로 연행됐다. 그리고 투옥 2년 만에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죽어갔다. 해방과 동시에 감옥에서 나온 사상범! 바로 항일독립지사들이 많았다.

가고파의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도, 오늘 소개하는 김명시의 오빠 김형선과 남동생 김형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봉암 역시 사상범 예방 구금령으로 죄없이 예비구금돼 해방을 감옥에서 맞아야 했다. 항일독립지사들에게 조선은 한반도 전체가 '감옥'이자 '수용소'였던 셈이다.

김명시는 탈출해 천진, 제남, 북경 지역 팔로군 부대에서 활동하다 2만 5천리 길을 밤낮으로 경계선을 넘어 화북지역 조선의용군 부대를 찾아갔다. 거기서 무정 장군을 극적으로 만나 눈물로 해후했다. 1927년 상해를 떠난 이후 김무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혁명동지들과 함께 장례식까지 치러줬는데 눈앞에 살아 있는 게 아닌가!

▲ 1941년부터 해방 무렵까지 조선의용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태항산 일대, 허베이성 섭현의 하남점

남장촌에 남아 있는 조선혁명군정학교 설립자이자 교장 김무정 장군과 학생들의 숙소 건물.

(사진 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해설 :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

김명시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여성부대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적진지 코앞까지 포복하여 조선인 학병들을 대상으로 선무공작을 담당하였고 조선독립동맹 북경분맹과 천진분맹 책임자로서 적구에 들어가 조선의용군 모병활동과 선전을 책임졌다. 적구지역은 항상 총을 든 스파이들이 눈을 번뜩이며 항일독립지사들을 노리는 위험한 지역이라 늘 긴장 속에서 활동을 전개해야만 했다.

김명시에 대해선 그동안 한겨레와 오마이뉴스, 경남도민일보에서 몇 차례 기사화한 적이 있다. MBC와 YTN에서도 '조선의 잔다르크'로 다룬 적도 있다. 그러나 『한국사』 교과서엔 한 줄 기록이 없다. 내가 만난 가장 고결한 영혼을 지닌 김산도 없고, 김찬도 『한국사』 교과서엔 없다.

심지어 역사연구자들조차 김찬을 조선공산당 창당멤버인 김찬과 동일시한 적도 있다. 한자 역시 '빛날 찬'(燦)으로 같다 보니 그럴 수 있겠다. 그러나 함북 명천 출신 김찬과 평안도 진남포 출신 김찬은 나이 차이가 17살이나 많이 난다. 우리가 김명시를 학교교육에서 가르치고 배우지 못했듯이 김찬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모두 반공 파시즘이라는 이념이 갈라놓은 은폐된 우리역사의 슬픈 단면이다.

코뮤니스트가 아님에도 김원봉은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질 못하고 있다. 거금 200억이 넘는 최고의 현상금이 나붙은 조선 최고의 항일독립투사인데도 남과 북에서 모두 외면 받고 있다. 김명시 역시 마찬가지이다.

해방 직후 종로거리를 말을 타고 갔을 때 서울시민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항일영웅 '김명시 장군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그러나 4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김명시는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자살로 발표된다. 스스로 치맛자락을 찢어 천장 수도관에 걸고 목을 매 자살했다고 당시 내무부장관이 발표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취조 속에서도 굳건히 버텼던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가 스스로 천장에 목을 매 자살했을 리 없다고 볼 수도 있다. 당시 국립경찰이란 게 일제강점기 친일경찰의 후예들이었다. 따라서 친일경찰의 소굴인 사찰과 경찰들은 수사=고문을 동일시하여 고문으로 죽여 놓고 자살이나 심장마비로 흔히들 발표했던 시절이었다.

1949년 남쪽 사회는 극우반공 파시즘이 횡행하던 시절이라 좌익 혐의만 보여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실제로 미국국립문서 보관소에서 비밀 해제된 문서에는 그런 자세한 설명과 학살 처형 사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1949년 4월 14일 오후 3시, 서울 동북방 10km지점(오늘날 태릉 주변)에서 좌익혐의자 39명을 처형하는 데 헌병 200명을 동원했다. 당시 처형장면을 촬영하고 기록한 이는 미군 장교로 미국립문서보관소에서 기밀해제된 후 고 이도영 박사가 발굴한 사진이다. 한국전쟁 전인데도 이러한 처형방식은 자주 목격되는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출처 : 이도영의 <죽음의 예비검속>)

6・25전쟁 전임에도 민족주의자든 좌익혐의자든 일상적인 처형이 자주 일어났던 시절이었다. 당시 좌익혐의자들에 대한 처형이 일상적이던 시절! 김명시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아마도 이주하, 김삼룡의 거처를 캐묻는 심문을 이기는 방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오죽했으면 김원봉이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수갑을 채인 채 고문을 받는 수모를 견디었을까! 며칠 뒤 풀려난 뒤 김원봉은 의열단 동지 유석현의 집에서 3일 밤낮으로 식음을 전폐한 채 통곡했다고 한다. 그리고선 "남조선에선 왜놈 등쌀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며 북행길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진보적 민족주의자 김원봉은 북쪽에서도 장개석의 국제스파이로 몰리면서 숙청되고 스스로 감옥에서 통분 끝에 목숨을 끊었다. 죽음 직전 김원봉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분들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이 나고 슬프다.

김명시의 죽음은 김원봉의 죽음과 결이 다르다. 당시 코뮤니스트는 죽음조차도 혁명의 대의에 복속시키는 경우를 코뮤니스트의 미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항일독립지사들을 체포하면 바로 그날 가장 가혹하게 고문했다. 그리하여 대부분 첫날 자백을 하거나 실토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길어도 5일을 넘기지 않았다.

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은 동지들의 안전과 당 기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찧으며 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출옥 후 정신 분열증세를 보였고 이후 항일전선에 복귀는커녕 일상적인 생업에도 종사하질 못했다. 폐인처럼 10년을 지내다 해방 3년 전 쓸쓸히 죽어갔다.

혁명적 노동조합 항일운동의 빛나는 별! 김찬은 일제의 극악한 고문 속에서도 무려 45일을 버텼다. 조봉암 선생은 20일 넘게 고문을 버텼다. 정강이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로 맞았던 김산 역시 한 달 넘게 물고문을 이겨냈다. 출옥 후 26살의 나이에도 폐가 망가진 김산은 할아버지가 되었던 것이다. 김명시 역시 한 달 동안 고문을 버텨 냈다.

항일전선에서 코뮤니스트들이 민족주의자들보다 오히려 더 치열하게 싸웠다. 민족해방에 대한 의지와 열정으로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자신의 목숨까지 초개와 같이 버렸던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코뮤니스트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의 삶과 죽음을 되새기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 한국인 최초로 러시아 혁명에 참가한 코뮤니스트 항일혁명가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

(사진 출처 : 한겨레 신문사)

코뮤니스트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는 처형 당시 볼세비키 하바로프스크 당 서기였다. 그녀는 1917년 한국인 최초로 러시아 혁명에 참가한 인물로 1918년 동양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의 산파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일본군이 가담한 반혁명세력인 백위대에 체포되었을 때 다른 혁명동지들처럼 중국 상인이라고 둘러댔으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을 당당히 밝혔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처형 직전 김알렉산드라는 13발자국 걸음을 걷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13발자국은 자신의 조국 조선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처형 직전 조국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새기겠다는 뜻이다.

13걸음을 걸은 뒤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는 ‘내 심장에 총을 쏴라’ 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죽음의 계곡에서 총살형 직전 마지막 순간에도 조국을 마음속에 담아두고자 했던 게 코뮤니스트의 삶과 죽음이었다. 조국을 사랑하는 그 마음 앞에 저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항일독립투쟁사는 피와 눈물로 점철된 운동사이다. 임시정부 독립운동사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 교수(단국대)는 독립운동은 독립운동 그 자체만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년을 맞은 해 노교수의 옹골찬 주장이다. 해방 이전 항일독립운동의 업적을 지닌 인물은 해방 이후 행적과 무관하게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설령 해방 이후 북한 정권에 참여했더라도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에 행적을 남긴 인물이라면 마땅히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추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투쟁의 길에 이념의 좌우가 걸림돌이 될 순 없다. 다행히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는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뒤늦게 추서 받았다.

그러나 일제가 가장 잡고 싶어 했고 가장 현상금이 많이 걸렸던 의열단장 김원봉은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아직껏 서훈이 추서되지 못하고 있다. 북쪽 역시 장개석의 지시를 받은 국제스파이로 숙청함으로써 자신들의 애국열사릉에 모시질 않았다.

김명시 역시 마찬가지이다. 낡은 이념의 시각에 갇힌 옹졸한 보훈정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만든다. 하루빨리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보훈지침을 폐기하고 무엇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진정한 보훈정책인지 성찰할 시점이다. 약산 김원봉이나 김명시에게 훈장을 수여한다면 최고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어야 합당하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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