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특함과 통솔력을 보이다.

외동아들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방삭은 조선 시대의 교육기관인 마을의 서당(書堂)에서 기초적인 학문을 익혔다. 방삭이 남달리 영특함을 나타내는 증거는 ⌜어모장군전공창절록(禦侮將軍全公彰節錄)⌟에서 “5세에 천자문 통달(千字文通達), 10세에 궁마 연습(弓馬練習), 11세에 주자 소학서 통달(朱子小學書通達)” 했다고 적혀있다. 성장해서 유명한 학자님의 가르침을 받은 내용은 추후에 밝혀 보겠다.

이러하듯 어려서부터 예사롭지 않게 그릇이 커 보임을 감지한 부친 부사(副使) 전윤부(全潤富)는 아들의 장래를 열어주기 위한 지덕체(智德體)를 기르는 일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 조선 시대 서당

흔히 어린 나이에 개구쟁이 들이 하던 병정놀이는 다들 겪은 사실이다. 방삭 역시 5세 때부터 동네 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하였다. 동네 아이들은 방삭이라는 이름을 동방삭과 빗대어 놀려댔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방삭을 우러러보는 내용이 숨겨져 있다.

 삼천갑자 동방삭
 삼천갑자 전방삭
 우리 대장 전방삭
 
하지만 또래들보다 훨씬 웃자라 행동 하나하나가 듬직하고, 성숙하였다. 따라서 소견도 일찍 들었다.
방삭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다. 자라나는 그 모습은 정말 장군감이었으며 병정놀이를 할 때도 언제나 우두머리가 되었다. 또래들이 전부 방삭의 편이 된다고 하자 병정놀이를 하기 위해서 제비를 뽑아 편을 가르기도 했다.  방삭은 백만 대군을 거느리는 장수라도 된 듯 자기편을 진두지휘하여 일거에 상대편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 병정 놀이 장면

방삭은 10세 때부터 무예를 익히기 시작하였다. 태어난 곳이 전라남도 보성이었기에 고향을 중심으로 말타기 훈련이며 보성의 지리를 숙지하였다. 눈을 감고도 보성의 산과 들, 계곡과 하천, 바닷가를 넘나들 수 있었다. 이를 통하여 장차 국가를 위해 쓸 수 있는 큰 재목감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결국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적을 막아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고향인 보성뿐만 아니라 인근 흥양군(현 고흥군)으로 쳐들어오는 왜군을 가차 없이 섬멸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큰 힘이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가문에서 대대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선조에 관한 이야기 거리로 구전의 역사임을 밝혀둔다. 500여 년 전의 우리나라의 교육 수준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글을 익힌 분이 소수여서 기록으로 남겨지는 사례는 드물다. 우리 가문뿐만 아니라 타 가문역시 특별한 사실이 아니고는 구전으로 전하고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전종실 주주통신원  jjs627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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