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야기 99] 싱가포르의 무라타 전자-3

김동호 편집위원l승인2020.09.16l수정2020.09.1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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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가포르는 적도 가까이라서 몹시 덥다. 풍부한 먹거리로 고생을 하지 않아서 좋았던 기억. 사진 : 위키피디아

C. K Soh와 일본인 직원이 돌아간 후 메일이 왔습니다. 싱가포르의 무라타 전자에 물건을 납품하려면 반드시 벤더(VENDOR) 업체로 등록되어야만 납품할 수 있다며 많은 양식을 보내왔습니다.

사무실에는 마침 영창피아노 무역부서에서 일하다 독립한 영문과 출신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IMF 금융위기 무렵에 대만 가구업체 친구와 영창피아노 본사에 상담하러 들어갔다 만났습니다. 당시 피아노 의자 상담을 했는데, 피아노 의자를 고무나무로 만든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습니다.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기에 잊혀 진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전 연락도 없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아는 체하는 사람이 있었지요. 누구나 어렵던 시절, 크지 않은 키에 완연한 대머리 조짐, 아랫배는 적당히 튀어나와 허리벨트가 아래로 쳐진 자태로 안면에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들어오니 전형적인 잡상인인가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제 이름을 말하고 영창피아노에서 상담하며 만난 적이 있다고 하니 반가운 척 안 할 수 없었지요. 기억을 더듬어보니 제가 등산장비 수출이 끊어지고 어렵던 시절 대만에서 온 친구와 영창피아노에 갔었고, 자영업자들은 주저앉고, 직장인은 인원 감축으로 한숨과 눈물이 넘쳐날 때 유명회사의 무역부 직원은 정말 부러운 존재였지요.

제가 선망의 눈으로 바라봤던 그 직원이 오히려 저를 처음 보고 무척 부러웠으며, 언젠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분류해놓았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저를 찾아왔답니다.

제나라 맹상군처럼 많지는 않았지만 제 사무실에 드나들었던 식객도 꽤 됐지요. 몇 달에서 몇 년씩 있었던 친구도 있었고, 작은 오피스텔에 사업자 등록이 책상 수만큼 4개 업체가 있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중에 유일하게 저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안 준 친구가 이 친구였습니다.

이 친구가 알고 보니 나이가 저보다 어렸습니다. 저를 좋게 보는 사람치고 정상은 드문데, 이 친구도 월급 타면 제일 먼저 책을 사는 독서광에 순진하고 드문 인종이었지요.

한국 여자들이 배필순위에서 제쳐놓는다는 키 작고, 배 나오고, 대머리에 마흔은 훌쩍 넘어 보이는 이 친구가 전철이고 어디에서고 그 큰 목소리로 말끝마다 ‘형님! 형님!’ 부르면 참 난감했습니다. 제 인상이 그리 부드럽지도 않은데 무슨 늙은 조폭 깍두기도 아니고.

무역협회 회지에 무역 관련 연재를 쓰다가 나중에 책도 몇 권 출판했지요. 첫 편에 추천사를 부탁해 써주기도 했던 기특한 인연으로, 짝사랑하는 은행 여직원과 맺어주려고 함께 밥도 사줘가며 중매 노릇을 했지만 맺어지지 않았습니다.

10여 년이 더 지나 중국 심천에 있을 때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함께 사는 기인 총각으로 인간극장에 나온다는 이야기를 딸을 통해 들었습니다.

이 친구 덕분에 서류를 깔끔하게 작성하여 등록을 마치자 드디어 스틸 볼 발주가 왔습니다. 무라타가 지정한 녹 방지 방청제도 일본제로 구해 코팅을 했습니다.

그동안 등산장비는 인간관계 위주의 서로를 배려하는 사업이었다면 스틸 볼 사업은 이익을 우선으로 하였습니다. 처음 주문하는 수량에 운송비 등을 모두 계산하고 제가 원하는 이윤을 책정하여 저의 마진을 20% 붙였습니다. 상당히 높았지만, 무라타에서 새로운 시스템에 적용하는 거라면 받아줄 거라는 확신과 또 다른 시스템이 오래지 않아 나오면 이 아이템은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스틸 볼이 무라타가 생산하는 전자부품을 도금하는데 사용하는 소모품이라는 사실만 알았기에 아이템 수명을 길게 보진 않았지요.

첫 번째 정식으로 납품하고 두 번째는 물량이 더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양이 더 많아졌지요. 1.3mm에서 추가로 1.2mm 볼도 요구하면서 수량이 늘어났습니다.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순조로울 줄 알았는데 무라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세 번째 제품에서 오차범위를 크게 넘는 볼과 포장 안에서 톱밥과 같은 이물질이 들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전문가가 아니니 사장이 대신 잘 챙겨달라고 말하고 그동안 믿고 제품검사를 한 번도 안 나갔었지요. 제가 무라타에서 온 클레임 내용을 통보하자 이미 알고 있는 듯 바로 수긍했습니다. 1.2mm와 1.3mm는 가격 차이가 크게 납니다. 봉투 하나에 4Kg을 포장한다면 수량 차이가 많이 나기에 거의 개수만큼 가격 차이가 나지요.

1.2mm의 규격을 1.3mm에 가깝게 작업을 하면 연마 시간도 줄고 수량으로 보면 엄청난 이윤인 것이지요.

자영업자들의 꿈은 고정적인 수입입니다. 매월 일정한 수입이 생기면 계획도 세울 수 있고 안정된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고정수입을 바라던 꿈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버리지 못하는 타인에 대한 저의 무모한 믿음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내가 칼자루를 쥐고 있을 때 절대로 휘두르지 않고 오히려 낮춰 살고자 하는 저를 무시하고 깔아뭉갠 사장의 배신에 분노가 치솟았지요.

꼴도 보기 싫은 이 인간과 싱가포르까지 함께 가는 내내 제 몸에서 열기인지 한기인지가 폭사 되었나 봅니다. 오자서가 아버지와 형이 잡혀가 초나라 평왕에게 죽임을 당하자 하룻밤에 머리가 하얗게 셌다더니 저는 두 눈에 핏줄이 터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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