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언유착은 한국 사회 부패구조이자 적폐의 상징

한국 사회에 권위주의를 해체시킨 최초의 대통령 노무현! 그는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인간 노무현>이었다.(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한국 사회에 권위주의를 해체시킨 최초의 대통령 노무현! 그는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인간 노무현>이었다.(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노무현은 노동인권변호사로서 그리고 권위주의를 해체시킨 최초의 탈권위주의 대통령으로서 겸손한 삶을 살았다. <인간 노무현>을 통해 우리 시대 삶을 스스로 성찰하게 만든 분이다.

노회찬은 노동운동가로서 그리고 민중의 삶에 깊이 천착한 진보정치인으로서 가난한 삶을 살았다. <정치인 노회찬>을 통해 우리 시대 정치는 어떠해야 하고 정치인은 누구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한 분이다.

박원순은 인권변호사로서 그리고 시민운동가로서 자신의 재산과 재능, 모든 것을 바친 인물이다. 특히 서울시장 재임 기간 보여준 소셜 디자이너로서 창의성 높은 역량은 우리 시대에 깊은 인상을 남긴 분이다.

세 분에겐 공통점이 있다.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한국 사회에 스스로 자신을 내던지며 거친 삶을 살아갔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작은 잘못을, 부끄러움을 죽음으로 승화시켰다는 데 또한 공통점이 있다. 50년이 지나도 아니, 100년이 지나도 또다시 이런 정치인을 만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노회찬, 박원순은 역사적 삶을 살았던 귀감이 되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노무현, 노회찬, 박원순은 왜 죽음을 택했을까?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실천했기 때문일 것이다. 높은 도덕성! 바로 평생, 운동하는 삶을 살았던 탓에 자신에게 엄격했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그 죽음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것은 역사청산이 좌절되면서 한국 사회에 배회하는 어두운 그림자이다. 바로 ‘야비함’으로 대표되는 반이성적인 인신공격과 잔인하게 인격을 짓밟고 무너뜨리는 ‘검언유착’이다.

일제강점기든 해방 이후든 역사적으로 가장 반민족적인 언론이었던 그들이 민족정론지를 자처하는 것부터가 코미디였다. 그들 수구언론들은 신문시장 70%를 지배하면서 ‘1등 신문’을 자처하거나 경쟁한다. 한국 사회 여론을 좌지우지하며 ‘밤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걸 자랑스러워한다.

한 마디로 한국 사회 언론계 비극이자 기막힌 현실이다. 어느 순간 비판적 지성은 질식되고 맹목적 선동이 난무하는 게 우리 언론의 현주소이다. 1920년에 창간되었고 올해가 2020년이니까 그렇게 100년을 이어온 그들 신문의 역사였다.

거기다 검찰공화국이 된 지 20년! 검언유착은 무소불위의 사회적 힘을 과시한다. 박정희 3공 시대 60년대에는 검찰이 기소권을 마구 남용하진 않았다. 때에 따라선 독재권력의 부당한 지시에 항명했다. 제1차 인혁당 사건(1964)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1차 인혁당 사건은 굴욕적인 한일 협정 체결을 반대하던 6‧3항쟁(1964)을 ‘6‧3사태’로 배후 조작한 사건이다. 6‧3항쟁 당시 학생들의 정당한 외침과 항의 시위를 북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들이 배후에서 조종한 사건’으로 몰아가기 위해 김형욱 중앙정보부가 완벽하게 조작한 사건이었다.

중정에서 고문 끝에 도예종, 박현채(경제학자) 등 인혁당 관련자들이 검찰로 송치되자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용훈, 김병리, 장원찬)은 중정에서 받은 자백 이외엔 증거가 없다며 공소유지 불가를 이유로 기소를 끝내 거부했다. 그러자 친일파 후손이자 그 자신이 친일파인 당시 법무장관 민복기, 법무차관 권오병, 검찰총장, 서울지검장 등 막강한 외압이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지검 공안검사들은 기소장 쓰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권력의 외압과 회유마저 거부하자 독재권력은 사표 강요를 통해 양심적인 검사들을 강제 축출했다. 제1차 인혁당 사건 이후 검찰조직은 독재권력이 던져주는 떡고물 앞에 검찰의 양심을 하나둘 팽개쳐버렸다. 검찰조직은 그렇게 무너져갔다.

그러다 70년대 유신 시절과 80년대 5공 시절엔 완벽히 정치검찰이 되어 그야말로 독재권력의 개 노릇을 자청했다. 주인이 물으라면 물고 사정없이 짖어대고 물어뜯었다. 그러면 주인은 ‘파격 승진’이라는 고깃덩이를 안겨주거나 최소한 떡고물을 던져 주었다.

70-80년대 그런 야만스런 시절! 그렇게 출세한 인간의 표상이 신0수, 정0래, 김0춘, 김0열, 정0근, 바로 그들이 정치 검사인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정치 검사들은 중앙정보부, 안기부로 파견 나가고 결국 정보 공작정치의 중심에 섰다.

70-80년대 그 암흑 같던 시절은 그들 공안검찰들이 연출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 정치검찰이 기소하면 기소한 대로 망가진 사법부는 기계처럼 방망이를 뚜드렸던 시절이었다. 정치검찰 못지않게 사법부 스스로 알아서 기었던 흑역사의 시절이었다. 오늘날 법조계 부패의 상징! 전관예우는 지난 날 검찰과 사법부 오욕의 역사 속에 배태된 것이다.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 8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민복기 대법원장은 2000년에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았다. 이완용과 절친이자 사돈 간인 친일파 민병석의 차남으로 태어난 민복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제대 법문학부 재학 당시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수재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판사를 지낸 민복기는 아버지 민병석, 형 민홍기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대한민국 사법사상 10년 2개월이라는 최장수 대법원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가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자가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수상하고 최장수 대법원장인 나라가 한국 사회 부끄러운 현실이다.

1975년 4월 9일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된 제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 처형 직후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가족들이 서대문구치소 앞에서 혼절한 모습.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은 1974년 대학가에 반유신 데모가 휘몰아치자 <민청학련>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조작해 민주화운동가들을 <인혁당 재건위>(2차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을 전격 처형했다.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진 지 18시간만에 집행됐다. 인혁당 사건은 진보적인 도시, 대구 지역 혁신계 인사들을 처단함으로써 <대구지역 진보운동>의 싹을 도려내고 동시에 민주화운동가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준 공안조작사건이었다.(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1975년 4월 9일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된 제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 처형 직후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가족들이 서대문구치소 앞에서 혼절한 모습.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은 1974년 대학가에 반유신 데모가 휘몰아치자 <민청학련>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조작해 민주화운동가들을 <인혁당 재건위>(2차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을 전격 처형했다.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진 지 18시간만에 집행됐다. 인혁당 사건은 진보적인 도시, 대구 지역 혁신계 인사들을 처단함으로써 <대구지역 진보운동>의 싹을 도려내고 동시에 민주화운동가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준 공안조작사건이었다.(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그가 사형선고를 내린 사람은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서도원(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이수병(일어학원 강사), 우홍선(한국 골든스템프사 상무), 송상진(양봉업), 하재완(건축업), 여정남(전 경북대 학생회장) 8명으로 1975년 4월 9일 서대문구치소(현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교수대에서 전격 처형됐다. 처형 당시 민주화운동가들은 31세 ~ 53세 나이였다.  반면에 1913년생 민복기는 2007년 94세로 사망해 천수를 누렸다. 흑과 백이 뒤바뀐 세상이었다.

70-80년대 암흑기를 거친 한국 사회는 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두 젊은이의 원통한 죽음으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았다. 그리고 이름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가며 저항했던 시민들의 처연한 죽음들로 한국 사회는 한 걸음 한 걸음 민주화가 진척되었다.

과거 군인들과 공작정치는 거세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던 90년대 시절! 그 무소불위의 빈자리를 검찰조직이 야금야금 독차지했다. 그들은 상명하복과 검사동일체 원칙이라는 낡은 시스템을 무기로 조폭처럼 비대해져 급기야 90년대 말 공룡조직, 검찰공화국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다시 20년이 넘는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가버렸다.

노무현 집권 초기(2003) 시도했던 검찰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실패한 검찰 개혁은 그 대가가 너무도 컸다. 검찰권력의 칼끝이 <인간 노무현>을 겨냥한 것이다. 결국 검찰개혁을 외쳤던 탈권위주의 대통령 <인간 노무현>은 죽음으로 내몰렸다. 망신 주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심지어 진보 언론을 자처하는 일부 신문조차 거들 정도였으니 <인간 노무현>이 받았을 마음의 상처와 절망은 너무도 컸다. “더 이상 자신과 민주주의를 연결 짓지 말라”는 유언 아닌 유언은 그런 상실과 절망의 표현이었으리라! 부엉이 바위에서 목숨을 던질 때 <인간 노무현>의 절망감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이 모든 게 공룡처럼 비대해진 그들 검언유착 세력이 기획하고 자행한 범죄였다.

검찰이 수사 정보를 흘리면 수구언론들은 일제히 약속한 듯이 선동적인 문구로 분장질을 해댔다. 한명숙 총리 뇌물수수사건도 검언유착의 그림자가 짙다. 드루킹 특검 때 김경수 지사가 아니라 별건 수사로 <정치인 노회찬>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도 마찬가지이다.

항상 낮은 곳에 위치한 민중들의 삶에 천착했던 <정치인 노회찬>. 한국 현대 진보정치와 진보정당사를 언급할 때 노회찬을 빼놓을 수 없다. (출처 : 명필름, 한겨레 자료사진)
항상 낮은 곳에 위치한 민중들의 삶에 천착했던 <정치인 노회찬>. 한국 현대 진보정치와 진보정당사를 언급할 때 노회찬을 빼놓을 수 없다. (출처 : 명필름, 한겨레 자료사진)

17층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 때 <정치인 노회찬>은 그 순간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감히 생각조차 하기 힘들다. 한국 사회 정신세계를 좌지우지하고 지배이데올기를 끝없이 대중에게 주입하며 재생산하는 그들 수구 언론들이 검찰권력과 야합했을 때 한국 사회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타락한 정치검찰이 흘리면 메이저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문짝만한 기사로 도배질한다. 그리고 새끼 언론들이 분탕질 치는 한국 사회는 너무도 끔찍하다. 선택적 보도는 공정보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선택적 수사는 공정한 수사가 아니다. 선택적 정의는 정의가 아닌 이유이다.

어느 진보 인사를 특정해 인격적으로 망신 주고 생매장하는 데 그들 언론들은 지나칠 정도로 경쟁적이다. 어느 땐 진보 언론조차 정신을 못 차리고 허둥대다 그들이 쳐놓은 프레임에 갇혀버린다. 거대 메이저 언론들은 사회적 공기(公器)로서 역할보다 한국 사회 수구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지>에 불과하다.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는 수구세력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일 뿐이다.

노무현의 죽음, 노회찬의 죽음, 박원순의 죽음에는 공통점이 있다. 죽어야 할 정도로 잘못을 범하거나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한국 사회는 그런 비극을 반복한다는 점이다. 죽음으로 내모는 비정상적인 사건들 모두 검언유착을 통해 강고하게 결합된 그들 수구세력들이 한국 사회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여론을 조종하며 대중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권변호사이자 한국 사회 시민운동의 대부! 박원순.시민운동가로서 그의 열정과 톡톡 튀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그를 성공한 서울시장으로 기억하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1994년 참여연대를 창립하고 1995년 3월 제1회 정기총회 당시 사무처장을 맡은 박원순 변호사(오른쪽에서 두 번째), 40년 지기 조희연 교육감(왼쪽에서 두 번째).  박원순은 변호사 활동을 통해 번 돈으로 젊은 날 이태원에 57평 아파트를 구입했으나 역사문제연구소를 창립할 때 아파트를  처분해  전액 기부했다. 현재 시가로 수십 억에 달하는 금액을 기부한 것이다. 그는 서울 시장 재임 시절, 공약이었던 서울시립대학 반값등록금을 실천했고 무상급식과 청년수당, 그리고 노동이사제를 실천했다. 뿐만 아니라 공공와이파이 정책과 제로페이 정책을 실현하는 등 시장으로서 업적이 출중했다. (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인권변호사이자 한국 사회 시민운동의 대부! 박원순.시민운동가로서 그의 열정과 톡톡 튀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그를 성공한 서울시장으로 기억하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1994년 참여연대를 창립하고 1995년 3월 제1회 정기총회 당시 사무처장을 맡은 박원순 변호사(오른쪽에서 두 번째), 40년 지기 조희연 교육감(왼쪽에서 두 번째).  박원순은 변호사 활동을 통해 번 돈으로 젊은 날 이태원에 57평 아파트를 구입했으나 역사문제연구소를 창립할 때 아파트를  처분해  전액 기부했다. 현재 시가로 수십 억에 달하는 금액을 기부한 것이다. 그는 서울 시장 재임 시절, 공약이었던 서울시립대학 반값등록금을 실천했고 무상급식과 청년수당, 그리고 노동이사제를 실천했다. 뿐만 아니라 공공와이파이 정책과 제로페이 정책을 실현하는 등 시장으로서 업적이 출중했다. (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인간 노무현>, <정치인 노회찬>,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의 죽음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무엇일까? 그것은 검언유착의 유령이다. 그 유령은 오늘도 한국 사회를 배회하며 수많은 이들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고 조종한다. 그들이 주도하는 정신세계, 바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깨트리는 것이 오늘날 진보 언론에게 주어진 시대의 과제라고 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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