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녕 - 토번과 실크로드

제 2~6일 하서주랑, 서역으로 가는 길

서안함양공항에서 서녕조가보공항까지는 대략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청해성 성도인 서녕(西寧)은 ‘서쪽 변경의 안녕(西陲安寧)’을 줄인 말이니 뜻으로는 서안과 같다. 청해성과 감숙성 사이에는 기련산맥이 놓여 있고, 그 산맥의 오른쪽 감숙성 땅을 따라가는 길이 하서주랑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실크로드 여행은 서안에서 감숙성 성도인 난주(蘭州)로 갔다가 하서사군에 해당하는 무위ㆍ장액ㆍ주천ㆍ돈황을 거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에 이례적으로 서녕을 중간 기착지로 택한 것은 이곳이 7, 8월에도 아침 기온이 10℃ 전후로 ‘하도(夏都)’라 불리는 점이 한 몫 했다. 또한 서녕에서 장액으로 가는 도중 펼쳐지는 문원 회족 자치주의 광활한 유채꽃 들판이 7월말에 절정을 이루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서녕을 거침으로써 얻는 ‘역사적’ 이득도 있다. 이곳이 과거에 토욕혼(吐谷渾), 토번(吐蕃) 등 실크로드에 큰 자취를 남긴 청장고원(青藏高原) 세력의 거점이었다는 데 있다.

하서주랑이 주로 흉노와 연관된 지역이라면, 청해성은 당과 실크로드를 놓고 겨룬 끝에 승리를 따낸 토번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난주 대신 서녕을 택함으로써 이번 답사는 훨씬 더 입체적인 지식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1. 서녕 - 토번과 실크로드

청해성은 중국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된 지역이지만 중국 문명의 젖줄을 이루는 지역이기도 하다. 황하, 장강(양쯔강), 난창강(澜沧江)이 모두 여기서 발원한다 하여 ‘삼강의 근원(三江源)’, ‘중화의 급수탑(中華水塔)’으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에서 가장 큰 짠물 호수인 청해호가 있고, 서쪽의 티베트고원과 더불어 ‘세계의 지붕’ 청장고원을 이룬다.

고대에는 강족(羌族)이 거주하던 곳이고, 한나라 때 곽거병이 군사 거점인 서평정(西平亭)을 두면서 중국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한이 몰락한 뒤에는 몽골 계통인 선비족의 모용씨로부터 갈라져 나온 토욕혼이 청해성 일대에서 강건한 세력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663년 티베트 고원에서 일어난 토번이 토욕혼을 정벌하고 청장고원을 통일하면서 당과 토번의 오랜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토번 이야기

▲ 서녕 장의약박물관에서

서녕에는 중국장의약문화박물관(中國藏醫藥文化博物館)이라는 비교적 큰 규모의 박물관이 있다. ‘장’은 고원이라는 뜻으로 ‘티베트’와 같은 말이다. 따라서 ‘장의약’이란 티베트족의 의술과 약학을 의미할 터이다. 우리 의학을 중국의 한의(漢醫)와 구별해 한의(韓醫)나 동의(東醫)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이 박물관에는 선사시대부터 이어 온 티베트의 의술에 관한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오랜 옛날부터 이미 삼지창 포크를 사용해 국수를 먹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 ‘누들로드’라는 다큐멘터리 방송이 있었는데, 중국의 국수가 동서 교류로를 따라 유럽에 들어간 길을 다룬 내용이었다. 그런데 고대 중국만이 아니라 티베트에서도 오래전부터 국수를 먹고 있었던 셈이다.

삼지창 포크를 보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야기가 생각났다. 다방면의 천재였던 다 빈치는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피렌체 사람들은 티베트처럼 가느다란 면발의 국수가 아닌 넓적한 면발의 파스타만 먹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다 빈치가 동양으로부터 전래된 국수에서 영감을 받아 가는 면발의 스파게티를 발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스파게티를 맛나게 먹기 위해 그때까지 두 갈래로만 되어 있던 포크를 삼지창으로 개량했다고 한다. 식탁의 필수품인 냅킨도 그때 다 빈치가 발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의약문화박물관에 전시된 포크는 이미 선사 시대부터 티베트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것이었다. 다 빈치는 포크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도입한 셈이다. 다 빈치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계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만 티베트인의 전통 문화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처럼 숨겨진 세계사의 진실을 알려면 두루 책을 섭렵하든가 그걸로도 모자라면 이처럼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수밖에 없다.

▲ 서녕 장의악박물관에 전시된 탕카

장의약문화박물관을 찾을 만하게 만드는 것은 이처럼 선사 시대부터 고도로 발달했던 생활 문화의 유산만이 아니다. 탕카라고 불리는 티베트불교 특유의 걸개그림이 곳곳에서 화려한 위용을 뽐내고 있다. 특히 티베트 역사를 100미터가 넘는 화폭에 담아낸 탕카는 압도적이었다. 청해성의 장족(藏族), 즉 티베트인들의 민족문화를 널리 알리고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20세기 말부터 집중적으로 작업해 완성한 그림이었다.

이처럼 청해성의 성도 서녕에 티베트인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앞에서 살펴본 토번의 동진(東進) 때부터의 일이다. 실크로드를 놓고 당과 겨룬 토번은 흥망성쇠의 시기도 당과 비슷했다. 당 태종이 흥기한7세기 전반에 토번도 손챈감포라는 빼어난 지도자를 만나 청장고원을 주름잡는 강대국으로 굴기했다. 손챈감포는 토욕혼을 제압해 청해성을 차지한 뒤 638년 송주(松州, 지금의 사천성 송현)에서 당과 한바탕 힘을 겨루었다. 여기서 서로 만만치 않음을 확인한 두 나라는 640년 태종이 문성공주(文成公主)를 손챈감포에게 시집보내는 것으로 화친 국면에 들어섰다.

그러나 국경을 맞댄 두 강대국이 언제까지나 평화롭게 지낼 수만은 없었다.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서역 진출에 박차를 가하는 당과 고원에서 주변 평지로 세력을 뻗치던 토번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처럼 당과 토번이 자웅을 겨루던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신라는 당의 도움을 받아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나 당의 야심에 스스로도 희생될 위기를 맞았다. 이에 신라는 문무왕과 김유신의 지도 아래 결연히 싸워 마침내 한반도에서 당의 세력을 몰아냈다.

이 같은 신라의 승리에는 의도치 않은 도우미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토번이었다. 당은 신라와 전쟁을 치르는 동시에 토번과도 끊임없는 전투를 치러야 했다. 신라는 675년 매소성(지금의 경기도 연천), 676년 기벌포(지금의 충청남도 장항)에서 당군에 대승을 거두고 삼국 통일의 위업을 매조지했다. 당은 2년 뒤에는 청해호 동쪽 승풍령에서 토번과 싸워 18만 대군이 전멸하는 참패를 당했다.

이처럼 토번에 열세를 면치 못하던 당의 처지를 바꿔 놓은 것이 고선지의 파미르 원정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신’ 고선지가 신흥 제국인 아바스 군대에게 참패한 뒤 당은 실크로드도 잃고 토번에 대한 우위도 되찾지 못한 채 서서히 기울어 갔다.

고선지의 죽음을 초래한 안녹산의 난은 763년에 최종적으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당의 국력은 결정적으로 쇠퇴해 토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776년에는 난주, 781년에는 돈황을 함락당하고, 789년과 790년에는 위구르와 연합해 북정성(지금의 신강위구르자치구 지무싸얼현 일대)에서 토번과 싸웠으나 패해 실크로드의 지배권을 빼앗겼다. 이후 실크로드는 사실상 중국의 관할로부터 벗어났다. 9세기 들어 당과 토번이 함께 쇠퇴한 뒤에도 실크로드를 장악한 것은 중국 왕조가 아니라 이슬람 세력이었다. 그리고 이곳 청해성은 중국 왕조의 손에 들어간 뒤에도 수많은 티베트인이 살아가는 터전이 되었다.

중국의 이슬람교

▲ 서녕 동관청진대사 입구

서녕은 1500~2500미터의 고지대에 자리 잡은 고원 도시이다. 티베트와 더불어 청장고원을 이루는 곳이라서 소수민족 중에는 장족이 많이 살지만 유난히 눈에 많이 띄는 소수민족은 회족(回族)이었다. 장족은 토번의 후예인 티베트족을 말하고, 회족은 7세기 이래 중국 곳곳으로 이주한 이란과 아라비아 사람들이 여러 민족과 섞이면서 형성된 소수민족이다.

회족이 눈에 많이 띄는 이유는 그들의 외모가 동양계와는 차이가 나는 데다 이슬람교도로서 머리에 항상 흰 모자를 쓰고 다니기 때문이다. 회족은 중국에서 가장 넓은 분포를 가진 소수민족이다. 중국어를 공용어, 아라비아어를 제2공용어로 사용하지만, 페르시아어를 쓰는 이들도 있다. 그들이 민족의 이름으로‘회(回)’자를 쓰는 것은 처음에 이슬람교를 회교(回敎)나 회회교(回回敎)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때 回는‘口(입 구)’자 안에 또 다른 口가 들어 있어 이슬람교에서 강조하는 언행일치를 상징한다고 한다.

서녕에 투숙한 다음 날 아침 호텔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동관청진대사(東關淸眞大寺)를 찾았다. 명 초기인 14세기 말에 지어진 이슬람 사원으로 청해성에서는 가장 큰 사원이었다. 이슬람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스크 양식의 건물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3000명 이상의 무슬림이 한꺼번에 예배를 볼 수 있는 사원이 나온다. 이곳에 있는 예배당은 전통적인 중국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것도 이채롭다.

중국 이슬람교의 역사는 당 고종 때인 65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아라비아에서 중국의 천주(泉州), 광주(廣州) 등 해안 도시로 들어간 상인, 병사들이 전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온 것이 당 태종 때이니 이슬람교가 약간 늦은 셈이다. 그러나 불교와 기독교가 창시된 지 수백 년 만에야 들어온 반면, 무함마드가 632년에 사망한 걸 감안할 때 이슬람교는 본고장과 거의 동시에 전파된 셈이다. 이것은 이슬람교의 전파력이 그만큼 높았다는 이야기인 동시에 7세기 무렵의 실크로드가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알려 주는 지표가 아닐 수 없다.

글/사진 강응천 역사저술가 및 출판기획자,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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