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겨울, 양주 기산 저수지 쪽에 산책을 갔다가 ‘안상철 미술관’을 만났다. 기산 저수지를 앞에 두고 있는 미술관이다. 한번 들어가 보자 했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얼마 전 근처를 지나는데 미술관 앞에 차들이 주차해 있었다. 우리도 들어갔다. 운 좋게 '온전한 나' 전시회를 구경할 수 있었다.
<안상철 작가>
사실 안상철 작가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온 소개를 요약하자면...
“한국화가다. 1927년 경남 함안 출생, 1953년 서울대 미대 졸업, 1953년 국전을 통해 화단에 등단. 1956년과 1957년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 1958년에 부통령상, 1959년에는 대통령상 수상. 1959년 서울대 미대 동기인 나희균과 결혼, 1965년 서라벌예대, 1969년 성신여자대에서 근무. 1992년 정년퇴임. 1993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남.
1965년 이후 여러 차례 국전 심사위원과 운영위원, 운영위원장 등 역임. 1973년 ‘한국 현역 화가 100인전’, 1986년 ‘한국화 100인전’, 1992년 ‘한국근대미술명품전’ 등에 출품.
안상철 작가는 한국화단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했다. 전통 산수화풍을 탈피하여 점(點), 선(線), 면(面) 등의 서구적인 조형성을 받아들여 현대 미술의 흐름을 한국화에 수용했다. 수묵을 강조하던 한국화단의 흐름 속에서 수묵과 채색의 한계를 넘나들면서 관념적이고 전형적인 소재에서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를 도입하고, 형상을 해체하고 평면성을 거부하여 평면과 입체를 넘나드는 실험적인 화풍으로 주목받았다."
들어가자마자 안상철 작가의 작품 <목련>이 우릴 맞는다. 사진에 창문 빛이 들어와 작품 속 두 바위가 안타까운 처지가 되었지만,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안상철 작가 따님이신 안재혜 관장님의 설명에 따르면 크라프트지(표면이 거칠고 질긴 갈색 종이, 일명 시멘트지)를 구겨서 여러 차례 물에 담갔다 말렸다를 반복한 후 캔버스같이 두텁고 단단하고 거친 느낌이 나는 화폭을 만들어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느낌이 함께 들어간 독특한 작품이다.
본 전시를 위해 복도를 걸어가니 안상철 작가의 평면과 입체를 넘나드는 실험적 작품 두 점이 보인다. <영(靈)>시리즈 작품으로 고목을 소재로 했다. 동양화의 고목이 생명의 색상을 달고 화폭을 찢고 나온 작품이다.
<온전한 나>
이제 '온전한 나'에 어떤 작품이 있을까 둘러보는 시간이다. 50대에서 90대에 이르는 나희균, 류민자, 승연례, 서윤희, 정재은 다섯 작가가 작품 28점을 내놓았다. 왜 전시회 제목이 '온전한 나'일까? 이들은 남편 그늘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꾸준히 작품을 제작하면서 독자적 작품 세계를 이룬 작가들이다. 환경의 영향을 벗고 온전한 나로서 일어선다는 의미로 전시회 제목을 '온전한 나'로 지었다고 한다.
<나희균의 작품>
먼저 눈길을 끄는 작품은 나희균 작가의 <고요>다. 나희균 작가는 안상철 작가의 아내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조카다. 1953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55년 프랑스로 건너가 1957년 파리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57년 파리 베네지트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유럽 화단에 등단한 후 귀국했다. 국내에서 개인전 15회를 열었다. 추상작품에서 입체작품까지 넘나들다가, 현재는 우주 공간, 자연에 대한 초월적 세계와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평면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고요 1>과 <고요 2>는 2008년 작품으로 미술관 앞 기산 저수지의 풍경을 담은 작품이다. 기산 저수지의 고요가 화폭에서 조심조심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물과 나무와 땅의 조화를 이렇게 은은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정적도 <고요>에게 샘을 낼 것만 같다. 번잡한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에게 힐링이 되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우리 낙토 1>과 ,<우리 낙토 2>는 2013년 작품이다. 1은 하늘에서 본 우리 낙토요, 2는 정면에서 본 우리 낙토다. 특히 1은 가까이 봐서는 알 수 없는 우리 산하가 조금 떨어져서 보면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인다. 우리는 이토록 아름다운 금수강산이라는 낙토를 이미 갖고 있으면서 늘 다른 낙토를 꿈꾸며 사는 것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든다.
<류민자 작가의 피안>
류민자 작가는 추상미술의 대가 하인두의 아내이자, 화폭을 색띠로 채운 추상작업으로 현대미술 시장에서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하태임 작가의 어머니다. 굵고 짧은 선으로 생명의 근원적 율동을 표현하는 그의 작품은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과 불교 사상을 새롭게 재구성한 것이라고 한다.
2002년 작으로 이번 전시에 출품한 ‘피안’은 비엣남 하롱베이에 떠도는 섬들을 표현한 작품이다. 굵은 선과 단순하고 강렬한 색으로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현대적인 감각에 동양 산수화의 정적 감성까지 더해주는 작품이다. 어딘지 모르게 박일선 작가의 단청 산수화가 생각나는 그림이다. 반복되는 구조와 색채로 윤회 사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등 불교의 우주관을 조형적으로 상징화한 작품이라고 한다.
<승연례 작가의 드로잉 회화>
승연례 작가는 개념 미술을 도입하고 발전시킨 이건용 작가의 아내다. 10여 년 전 개인전 초대로 샌디애고에 머물렀을 때 이층 숙소 밖 풍성한 야자수의 생명력에 매료돼 이후 계속 야자수만 주제로 작업하고 있다.
2024년 그린 종려나무(Palm Tree)다. 황금색 종려나무 잎들이 살아 움직이는 붓질로 생명을 얻었다. 시원시원하면서도 나긋나긋한 붓놀림의 필력을 얻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많은 붓질로 밤을 새웠을까?
그녀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음률의 속도에 따라 붓의 강약을 조절하며 화폭에 에너지를 담아낸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다양한 느낌의 작품이 나오나 보다. 때로는 살랑거리는 바람과 꽃이 위로하는 따뜻한 숲으로… 때로는 폭풍우 속에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강인한 숲으로… 때로는 풍성한 열매 가득한 즐거운 종려나무 산책길로… 그녀는 한 폭의 그림으로 자신의 다채로운 에너지를 우리에게 나눠준다.
<서윤희 작가>
그녀의 독특한 작업 방식으로 기억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순환 구조를 자연의 위대한 시간으로 해석해 화폭에 풀어내는 작가라고 한다.
2009년에 제작된 <Memory Gap- 여름>이다. 마치 무한한 내 기억의 용량 속에 아는 듯 모르는 듯...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존재하는 작은 인물들이 등장해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지역에서 채집한 자연물로 한지를 여러 차례 염색한다. 여러 색조로 다양한 무늬로 만들어진 염색 얼룩은 우리 삶의 흔적이 되고 그 흔적 위에 내면에 있는 희미한 기억의 간격을 기록한다. 이런 <기억의 간격>은 2006년부터 작업한 그녀의 작품 제목이다.
그녀의 작품은 이 작은 사진으로 다 이해할 수도 볼 수도 없다. 직접 가서 봐야 조금이나마 그녀의 노고와 작품의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재은 작가>
정재은 작가의 남편은 미 국무부 대북 특별대표로 일하는 성김 전 주한 미국대사다. 그녀는 30년 가까이 남편의 외교 활동을 내조한 후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홀로 한국에 들어왔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오랜 외국 생활 끝에 오히려 시선이 안으로 향해 한국화의 종이와 분채 물감에 매료되었다. 현재는 한국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책거리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한다. 인연이 중첩되고 이어지는 우리 인생이 한 권의 책 같다는 생각에서라고 한다. 간결한 구도에 다채로운 색상은 아니지만 우리 전통 민화에 마치 수묵화의 느낌이 은근히 들어간 작품은 선비의 정결함이 느껴진다.
이 작품은 2019년 프랑스 낭트와 파리를 거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렸던 '책거리 유럽 순회전'에 출품했던 <첩첩서중(Lost in Books)>이다. 책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단순한 인간들이 그 책 위에 동상처럼 서 있다. 건축적 구성미가 뛰어나 스페인 현지에서도 대표작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우리 민화와 현대 조각이 융합한 작품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2024년 제작한 작품 <염원(念願)>이다. 아주 가는 세필로 둥근 삼각형을 그려 넣어 수없이 많은 동심원을 그렸다. 동심원은 알 수 없는 열매를 향해 끝없이 돌고 있다. 30년간 그녀 내면의 염원이 이제야 원심력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온 걸까?
미술관은 안상철 작가가 말년에 작업실로 사용하던 기산 저수지 앞 아틀리에 근처에 세워졌다. 관람료는 없다. 주차료도 없다. 운이 좋으면 안재혜 관장님이 명품 녹차를 명품 찻잔에 태워 주는 영광도 누릴 수 있다.
'온전한 나'는 2024년 6월 16일까지 전시한다. 예술의 향기에 흠뻑 젖은 뒤 기산 저수지를 산책하며 자연이 주는 여유까지 누리는 일석이조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참고 자료 : 안상철 미술관 '온전한 나' 특별전 설명서
참고 사이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1633)
참고 사이트 : 안상철 미술관 http://ahnsangchul.co.kr/museum/museum_main.html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장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