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끼인 세대’라며 자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끼인 세대이니까 말이다.
나의 부모님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어머니는 방직공장의 여성노동자였고, 아버지는 평생 가위질을 한 이발사였다. 그런 부모님은 간절한 소원(?)을 갖고 있었다. 그걸 들으면 피식 웃을 수도 있지만 부모님한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맏아들이 대학을 졸업해서 보너스와 퇴직금이 나오는 회사에 취직을 하는 것! 놀랍게도 그것이 부모님의 소원이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부모님에게 겨울은 견뎌내기 어려운 시기였다. 칼바람이 씽씽 부는 겨울에 방학한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조차도 머리칼을 자르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한 초등학교 안의 구내이발관을 운영했던 아버지에게 선생님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방학에도 월급을 받고, 나이가 들어 학교를 그만두면 또 퇴직금을 받는 선생님이 하루 일당이 전부인 아버지로서는 부러울 수밖에.
사남매의 맏이인 나는 학교에 다녀오면 이발소에서 일을 해야 했다. 순서를 기다리면서 만화책을 보는 친구들 곁에서 머리칼을 쓸었다. 이발소에서 쓸 물을 펌프질해서 길어 날랐고,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손님들의 머리도 감겨주었다. 그래도 일등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배우지 못했다고 때때로 무시당하는 부모님의 자랑거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목이라 불리는 설과 추석은 내게 고난주간이었다. 온종일 일을 하고 나면 습진으로 손이 허옇게 일어났다. 그게 보기 싫어서 싸구려 로션을 덕지덕지 바르고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친구들은 즐겁게 놀았지만 난 밀대로 눈을 밀어제치는 아버지의 등 뒤에서 비질을 했다. 이발소에서 정문까지의 거리는 200미터가 넘었고, 정문에 도착해서 돌아서면 동이 트는 걸 보면서 다시 집까지 비질을 해야 했다.
중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아버지가 학교 안의 구내이발관을 벗어났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처음으로 내 삶에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했다. 첫 번째는 미술선생님의 미대 권유였다. 집이 가난해서 안 된다고 했지만 선생님은 집까지 찾아왔었다. 확고한 소원을 있었던 부모님이 ‘환쟁이는 안 된다’고 거절했다.
어쩌다가 교내 글짓기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그 뒤 학교대표로 백일장에 다녔지만 한 번도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부모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글쟁이는 가난해서 안 된다’고.
그때 나는 공부에 재능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중학교까진 겨우겨우 성적을 유지했지만 고등학교는 달랐다. 하지만 가난한 집의 맏이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원하지 않고, 재능도 없는 일을 지속한다는 건 얼마나 지겨운 일인가?
처음 본 순간 ‘어쩌면 저 여자랑 혼인할지도 모르겠구나!’싶었다. 스물여덟이었다. 그녀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거리에 넘쳐나는 사랑 노랫말들이 들렸고, 모두 나의 이야기 같았으며 세상이 찬란하게 빛났다. 도곡동 그녀의 집 앞에서 첫 입맞춤을 하고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밤새도록 안양까지 걸어갔었다.
언제나 존중하고, 배려하며 아끼면서 살겠다며 몇 가지 약속을 했다. 나이 차와 상관없이 부부는 동격이니까 존대한다. 수면 습관에 따라서 아침 식사는 내가, 저녁 식사는 당신이 준비한다. 육아는 부부의 몫이고, 당신이 여의치 않다면 내가 맡는다. 이 약속대로 31년째 밥을 짓고 있다.
세상은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질 것 같으니 2세는 갖지 말자고 했지만 아내의 바람대로 아이를 낳았다. 출산 뒤에도 직장생활을 하겠다고 해서 일을 그만두고 육아를 전담했다. 아내의 부모님은 ‘딸의 등골을 빼먹는 놈’취급을 했고, 나의 부모님은 아내의 벌이로 먹고 산다면서 면목 없어 했다.
각종 매체를 통해서 살림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생명을 먹여 살리는 가장 위대한 일이며 여자라고 해서 저절로 육아와 음식을 잘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그 일에 익숙해졌는가의 문제임을 열심히 설파했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이 아이를 무한경쟁의 틀 속으로 밀어 넣는 게 옳은 일일까?’ 고민하다가 제주도로 이사를 갔다. 공부에 때가 있다는 말을 뒤집어서 노는 것에도 때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주에서 오랫동안 꿈꾸던 집을 만났다. 아침밥을 지으면서 일출을 보고, 저녁 준비를 하면서 일몰을 보며 너른 마당엔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던 집이었다. 아내가 서울로 돌아가자면서 집을 팔라고 했다. 살면서 가장 안타까운 일이지만 향수병에 걸린 아내를 생각해서 팔았다. 돈도 안 되는 글을 왜 쓰냐고 지청구해서 진행 중인 출판계약을 파기했다. 사생활이 노출되는 게 싫으니 방송을 그만두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어릴 때는 좋은 자식이, 혼인해서는 좋은 남편이자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몇 점이나 받을지 모르겠다. 아이는 이제 스물여섯이 되었고, 아내는 서울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예순이 된 나는 손발 잘린 뒷방 늙은이가 되어버렸다.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고, 열정과 체력은 형편 없어졌지만 남은 시간은 오로지 날 위해서 쓰고 싶다.
편집 : 오성근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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