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과 교재원!
이는 교직원 ‘본연의 업무’와 거리가 멀다. 당연히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관리자 입장에서 학년 초에 업무 분장을 발표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런 업무를 담당해야 하는 교사나 주무관은 없다. 이를 전공한 사람은 물론, 이렇다 할 연수를 받은 이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맡겨도 시큰둥하기 일쑤요, 맡아도 할 일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렇게 내맡긴 관리자나 떠맡은 담당자 모두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 하고 지내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경험이 없다.
방법을 모른다.
시간이 부족하다.
본무에서 벗어난 잡무다.
배정된 예산마저 없을 때 더욱 그렇다.

생각해 보라.
밀과 보리는커녕 파와 부추, 콩과 팥, 박과 호박, 조와 수수, 쑥과 쑥갓, 상추와 치커리, 갓과 유채, 고수와 루콜라, 셀러리와 신선초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메꽃과 나팔꽃, 억새와 갈대, 씀바귀와 민들레, 붓꽃과 꽃창포, 소나무와 잣나무, 철쭉과 진달래, 불두화와 백당나무, 느티나무와 벚나무, 머루와 포도, 개나리와 영춘화를 구분하긴 더 어렵다. 하물며 일구고 뿌리고 솎고 약치고 순 지르고 유인하고 거두는 일련의 재배 과정을 말해서 뭣하랴. 이들을 제대로 가리는 교직원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런 교직원에게 교정이나 교재원을 맡기는 일 자체가 난센스다. 학교는 이렇듯이 어제 오늘 할 것 없이 제도적 결함이요, 구조적 모순을 자행하고 있다.

딱히 경쟁자가 없다 보니 따 놓은 당상이었다. 현직에 있을 때 교정과 교재원은 늘 내 몫이었다. 가는 데마다 ‘식물 이름 알아맞히기 대회’와 ‘목화 기르기 대회’를 주관하고, 어린이날을 기념하여 목화 모종을 내서 전교생에게 배부했다.

서울송화초교에 가서는 본관과 별관 사이의 빈터를 일구었다.
일요일에는 아들, 아내, 작은조카를 데리고 가서 곡괭이와 쇠지레로 땅을 골랐다. 그때 처음 알았다. 평지로 알고 걷던 번듯한 등하굣길의 속살은 참으로 놀라웠다. 크고 작은 시멘트 덩어리와 녹슨 쇠붙이, 그리고 플라스틱 음료수병 따위가 너절너절 파묻혀 있었다. 셋이 손수레에 싣기조차 힘든 바위도 네댓 개는 파서 옮겼다. 그리고 백엽상 한쪽을 할애하여 자그마한 텃밭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서울송화초교 ‘목화 시배지’였다.

그 당시 김O영 선생(현, 서울대O초교 교장)은 날 보고 주무관 한 명이 늘었다고 농지거리를 서슴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도 그 말이 싫지는 않다. 아무튼 4년쯤 지나자 구경삼아 들르는 이들이 생길 정도로 자리를 잡아갈 무렵, 김O자 교장이 퇴임하고 이O혜 교장이 오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애써 마련한 교재원은 이른바 ‘노래하는 카페 공간’으로 바뀌고, 그럴싸하게 안내판까지 세워 둔 ‘시배지’는 주차장으로 둔갑해 버렸다. 구의원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조성한 낙우송 군락지를 밀어 버리고, 어렵게 마련한 헛개나무 동산도 파헤쳐졌다.

국립수목원이 주최하고 한국식물원·수목원협회가 주관한 '우리 식물 바로 알기 경연 대회'에 3년 연속 참가하여 받은 대형 ‘생태 해설 안내판’ 5개는 창고 안으로 처박히고, 커다란 ’전신 거울’은 별관 1층 현관 귀퉁이로 내몰렸다.

그 결과 복도와 로비 벽면 곳곳에 비닐과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화가 거미줄처럼 드리워지고, 교재원 자리에는 인조 나무와 벤치가 자리 잡았다. 그 당시 떠돌던 말이다.
“송화가 내세우던 생태 요람지가 무당집으로 둔갑하니 죽은 자작나무만 살판났네. 살아 숨 쉬던 풀•꽃•나비 다 어디로 갔을까?”

한편, 퇴임지인 서울대조초교에는 아예 교재원이 없었다. 애써 찾은 곳이 체육관과 찻길 사이에 방치된 공지였다. 숫제 해가 들지 않은 북쪽과 서쪽 사면을 제외하면 대략 40㎡쯤 됐다. 예산이 없다는 학교장에게 아쉬운 대로 퇴비와 씨앗만 보조해 달라고 요청, 등교 시간과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2학년 어린이들과 돌밭을 파헤쳤다.

서쪽 사면은 2층 가정집과 닿아 있다. 체육관과 그 집 사이에는 높이가 2미터쯤 되는 시멘트벽이 서 있었다. 아이들과 나는 크고 작은 돌멩이를 날라 벽 아래 쌓아 두었다. 제법 텃밭의 윤곽이 드러날 무렵, 난데없이 오O용 교감이 찾아왔다. 아이들이 돌멩이로 ‘집 벽’을 치는 바람에 집안에 금이 갔다는 민원이 들어왔다고 했다. 웬 민원?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속임수였다!

그러니까 여리디여린 고사리손으로 잔돌 몇 개씩 들고 나른 게 전부다. 물론 개중에는 돌멩이를 던지다가 벽을 치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말한 벽은 체육관과 그 집의 경계면에 세워진 ‘시멘트 벽’으로 학교에서 세운 것이다. 더구나 그 집의 벽까지는 족히 한 자는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우리 아이들이 던진 돌멩이 때문에 자기네 집 벽에 금이 갔다는 말은 천부당만부당하다.

우리 아이들과 텃논을 만든다고 방수포를 깔고 물을 대면서 들썩하다 보니 수선스러운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생어거지도 정도껏 해야지 이쯤 되면 만불성설이다. 그 말이 이치에 닿으려면, 자기 집 벽에 금이 가기 전에 우리 쪽 시멘트벽이 허물어져야 한다.
아이고, 광대뼈가 퍽이나 두드러진 할망구!
지금도 눈 내리깔고 앙칼지게 쏘아붙이던 그의 얼굴이 삼삼하다.

사람들이 오가며 아무렇게나 던진 케케묵은 쓰레기가 만만치 않았다. 2학년 아이들과 땅을 파헤치고 다듬기에는 한참 버거웠다. 한번은 유O근 6학년 부장에게 힘깨나 쓰는 남자 어린이 열 명을 붙여 달라고 부탁했다.

사흘째 되던 날, 한 아이가 실내화를 신고 나왔다.
가뜩이나 질척거리는 진창길이다. 고맙지만 다음에 도와달라고 하고 돌려보내려다 말고, 그만 얼이 빠지고 말았다.
“나도 알어, xx놈아!”
들고 있던 호미를 사정없이 땅바닥에 내리꽂으며 되알지게 쏘아붙인다. 뒤도 안 보고 내뱉은 녀석의 말에 나는 그만 넋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아뿔싸, 일을 마치면 아이스크림으로 보상한다고 한 게 사달이 나고 말았다. 그걸 보고 나왔는데, 여지없이 빗나갔으니 허탈할밖에 없었으리라.
“얘들아, 고생했다. 오늘은 그만하자. 집에 갈 때 어제처럼 아이스크림 한 개씩 먹어라. 저 앞에 보이는 마트 알지?”

이튿날, 수업 중에 유O근 부장이 그 아이를 데리고 교실로 찾아왔다.
“아니, 선배님! 이놈이 맞아요?”
아이들한테 무슨 얘길 들은 모양이다. 녀석의 뒷덜미를 잡은 유 부장이 대뜸 언성을 높였다.
갑자기 우리 반 아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멀뚱거리는 아이들을 뒤로한 채 문을 닫았다.
“내가 하두 정신이 없어서…. 솔직히 누가 누군지 몰라. 분명한 건 저 아인 아닌 것 같아. 그냥 가시게.”
아, 성큼하고 번듯하게 생긴 녀석의 일그러진 얼굴이 지금도 머릿속을 덮친다.

이와 함께 ‘들꽃지기’를 자처하면서 학교 누리집에 ‘오늘의 꽃’을 연재하였다.
4~6학년 학생으로 환경동아리를 조직하고, 학부모와 연대하여 환경지킴이단을 운영했다. 또, 활동 시수에 따라 봉사활동 점수를 주었다. 그 결과 졸업생과 학부모까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이에 자율적인 봉사활동을 권장, 휴일이나 방학 동안에도 거르지 않고 함께 교정을 가꿀 수 있었다.

“보충합니다.
지난 2일 씨앗을 고르고, 3일 그 씨앗을 물에 불려두고, 5일 상토에 버무려 두었더니 약 3cm 정도씩 촉이 나온 상태입니다. 이것을 오늘 트레이(모판)에 심을 예정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목화 씨앗은 문익점 선생의 후손인 남평문씨 부산종친회가 협찬한 것입니다. 올해는 작년에 본교 어린이들이 수확한 것과 텃밭에서 채취한 것으로만 작업하고 있습니다.

씨앗이 조금 부족합니다.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꼭 키워 보고 싶다는 어린이에게만 나눠 주려고 합니다. 각 학년 담당 선생님께서는 ‘목화 기르기 및 관찰일지 쓰기 대회‘ 희망자를 조사하여 4월 8일(화)까지 김O아 선생님께 내 주기 바랍니다. 모종은 5월 2일(금) 어린이날을 기념하여 배부할 예정입니다.“
-2014년 4월 7일(월), 들꽃지기 박춘근-

1965년 정부는 문익점의 고향인 산청군 단성면에 목화를 처음 재배한 터를 국가사적 제108호로 지정하고 1997년 목면 시배 유지(木綿始培遺址)를 건립하였다. 한편 1905년에 일본 영사 다카마쓰(高松)가 재래종인 ‘아시아면’ 대신 ‘육지면’을 도입하여 전라남도 고하도에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2020년에 목포시에서는 고하도 ‘목화체험장’을 개장했다. 목화는 면화·미영·미면 등으로도 불린다. 잎은 어긋나고 3∼5개의 톱니가 손바닥 모양으로 갈라진다. 꽃의 지름은 4cm 안팎이고, 5장의 꽃잎은 나선상으로 말린다. 꽃이 필 때는 백색 또는 황색이나, 수정이 되면 연분홍색에서 진분홍색으로 바뀐다. 사진 출처: 농촌진흥청 블로그 ‘농다락’
1965년 정부는 문익점의 고향인 산청군 단성면에 목화를 처음 재배한 터를 국가사적 제108호로 지정하고 1997년 목면 시배 유지(木綿始培遺址)를 건립하였다. 한편 1905년에 일본 영사 다카마쓰(高松)가 재래종인 ‘아시아면’ 대신 ‘육지면’을 도입하여 전라남도 고하도에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2020년에 목포시에서는 고하도 ‘목화체험장’을 개장했다. 목화는 면화·미영·미면 등으로도 불린다. 잎은 어긋나고 3∼5개의 톱니가 손바닥 모양으로 갈라진다. 꽃의 지름은 4cm 안팎이고, 5장의 꽃잎은 나선상으로 말린다. 꽃이 필 때는 백색 또는 황색이나, 수정이 되면 연분홍색에서 진분홍색으로 바뀐다. 사진 출처: 농촌진흥청 블로그 ‘농다락’

편집 : 박춘근 편집위원,  하성환 편집위원 

박춘근 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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