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46~149일

트빌리시를 벗어나자 바로 대초원지대로 들어선다. 삼림지대와 사막 중간지점에 나타나는 이런 스텝지역에는 나무가 거의 없다. 비 내리는 봄철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지만 여름철 건기에는 말라죽어 불모지로 변한다.

양떼들이 곳곳에서 풀을 뜯고 있다. 양떼들 사이에는 항상 목동이 한두 명 있다. 대개 한 목동이 하루 종일 양들과 시간을 보낸다. 드넓은 벌판에서 목동은 작대기 하나 들고 하루 종일 소일 한다. 무료한 목동은 그 작대기로 돌멩이를 때려 저만큼 있는 토끼 구멍에 집어넣기를 시도한다. 그것이 골프가 되었다.

이들은 끝없는 벌판에서 파란 하늘을 보며 대부분 시간을 몽상에 젖어 있을 것이다. 하늘에서 선녀가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이야기나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처럼 주인집 딸이 점심을 싸가지고 와서 돌아가다가 불어난 물에 개울을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와 밤새도록 별을 헤며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는 이야기도 그런 몽상 속에서 나왔을 거다. 

악천후 속에 달리는 일이 일상이 되었지만 아직도 두려움을 벗어던지지 못하듯이 양치기들도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눈비가 온종일 내리고 갑자기 어두워지면 두려움을 느끼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비바람이 부는 날에는 초자연적 존재와 만남은 다반사로 일어날 것이다. 사랑스런 그녀는 아름다운 소녀 모습으로 나타난다. 잠시 모습만 보여주고 사라져가는 그녀를 소리를 부르며 쫒아가서 세우려하면 그녀는 나무가 되어버린다는 등... 또는 그녀가 가져다 준 맛있는 점심을 정신없이 먹다보면 흙을 먹고 있다는 등....

양떼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 벌판 한가운데 뛰어들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달리고 있는데 마침 길옆에서 양떼들과 함께 있는 목동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나누는데 양처럼 순한 눈을 가진 그에게서 양 특유의 냄새가 풍겨왔다. 양떼들을 자세히 보면 그 무리 속에 몇 마리 염소가 섞여있다. 염소란 놈은 질투가 심해서 자기 외에 다른 놈들이 사이좋게 붙어 지내는 꼴을 못 본다고 한다. 둘이 사이좋게 붙어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떼어놓는 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삼는다. 양털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염소를 함께 키우는 것이다.

국경은 한산했지만 군인들이 입국절차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순간 뇌리에 '독재국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어렵사리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우리를 맞는 것은 거대한 철문과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대형 초상화였다. 철문은 문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볼일이 없겠지만 저 초상화는 시시각각 내 시야에 나타날 것을 생각하니 좋은 기억만 남진 않겠구나하는 우려가 앞선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한 조사에 의하면 사회의 정의로움과 행복지수는 비례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 정당하고 당당하게 느낄 때 훨씬 행복하다.

▲ 1월 25일 아제르바이잔 국경근처 이제반 지역에서 하교하던 학생들과 함께 동반주

날씨는 며칠째 우중충하게 가는 비가 내렸고, 사람들 표정도 우울해 보인다. 입은 옷 색상도 대부분 검정색 계통으로 어두웠고 사는 집들도 생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나라 어느 곳이라도 지하 3m만 파면 석유가 나온다는 산유국의 풍요로움은 찾을 수 없었다. 허름한 집들과 연식이 오래된 자동차들이 찌든 삶은 말해주고 있었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고 달리는 자동차로 내 기관지는 몸살을 앓을 지경인데 검문소를 나오다 본 그 비호감 초상화가 또 나타나 야릇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사실 저런 비호감 사내와 여자를 국내에서 뉴스 때마다 봐온 나였지만 이렇게 적응이 안 된다.

▲ 그분의 초상화

인구 9백만 명, 크지는 않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참으로 독특하고 다양한 나라다. 아시아인도, 이란인도, 터키인도 아닌 사람들 생김새가 우선 오묘하다. 우울하며 경직된 모습 속에 감춰진 자유를 갈망하는 내면이 나그네에게 묘한 분위기를 금세 느끼게 한다. 반사막에 가까운 스텝지역에서 생산되는 기름은 아제르바이잔 국가경제의 큰 원동력이 될 것인데 사람들 삶은 기름지지 않으니 대형 초상화 속 사내의 얼굴과 배만 기름지게 하는 모양이다.

▲ 2018년 1월 27일 토요일 아침 아제르바이잔 Qırılı에서 시작하며

19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를 살찌우기 안성맞춤 지역이었고, 이후 구 소련연방에 편입되어 1991년 독립할 때까지 그 착취는 계속되었다. 그렇게 원하던 독립을 이루어냈지만 아제르바이잔 국민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전 역사를 통해 독립을 유지한 것은 통틀어 100년이 채 안 된다고 하니, 이 나라 민족 수난의 역사가 나그네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아제르바이잔도 우리와 같이 역사의 참혹한 상처를 안고 있는 나라이다.

우리와 동병상련 아픔이 있으니 그것이 1,300만에 이르는 이산가족이다. 오스만제국과 제정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은 나눴다. 아제르바이잔 남쪽 지역은 이란이, 현재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러시아가 갈라먹어, 나라는 두 동강 나고 이산가족이 생겼다. 강대국들 이권문제로 약소국들이 희생되는 처절한 생태계 형태가 지구 역사에서 언제나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카스피 해를 둘러싸고 있는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 나라들을 상대로 미국과 서방, 러시아가 살점 하나라도 더 뜯겠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양치기 중 가장 성공한 인물은 칭기즈칸과 다윗 왕이다. 늘 양을 돌보며 몽상에 잠겨있던 이들이 큰일을 해낼 수 있던 원동력은 열정이다. 몽상 속에 그려지던 일들이 뜨거운 열정을 만나면 안개 속에 갇혀 있던 희미한 강 풍광이 드러나듯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의 기개와 지략은 양을 돌보는 따스한 마음과 그 마음에 드넓은 들판을 품고 눈에는 푸른 하늘을 담은 데서 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서양이나 중동 쪽의 동화에는 목동이 왕이 되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다.

나그네는 드넓은 초원을 달리며 김광석의 ‘광야에서’를 흥얼거린다.

▲ 1월 24일 조지아 마지막 이정표
▲ 1월 25일 아제르바이잔에 입성해서 1월 27일까지 달리면서 만난 이정표
▲ 조지아에서 만난 청년들과 아제르바이잔에서 만난 청년들
▲ 2018년 1월 26일 금요일 아제르바이잔 Shikhly I에서 Qırılı까지 달리면서 만난 모습
▲ 2018년 1월 27일 토요일 아제르바이잔 Qırılı에서 Sabirkend까지 달리면서
▲ 2018년 1월 27일 토요일 아제르바이잔 Qırılı에서 Sabirkend까지 달리면서
▲ 2017년 9월 1일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2018년 1월 27일 아제르바이잔 Sabirkend까지 (누적 최소거리 약 약 5301.45km)

* 평화마라톤에 대해 더 자세한 소식을 알고 싶으면 공식카페 (http://cafe.daum.net/eurasiamarathon)와 공식 페이스북 (http://facebook.com/eurasiamarathon), 강명구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kara.runner)에서 확인 가능하다. 다음카카오의 스토리펀딩(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8063)과 유라시안마라톤조직위 공식후원계좌(신한은행 110-480-277370/이창복 상임대표)로도 후원할 수 있다. 

[편집자 주] 강명구 시민통신원은 2017년 9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년 2개월간 16개국 16,000km를 달리는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시작했다. 그는 2년 전 2015년, '남북평화통일' 배너를 달고 아시아인 최초로 미대륙 5,200km를 단독 횡단한 바 있다. 이후 남한일주마라톤, 네팔지진피해자돕기 마라톤, 강정에서 광화문까지 평화마라톤을 완주했다. <한겨레:온>은 강명구 통신원이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달리면서 보내주는 글과 이와 관련된 글을 그가 마라톤을 완주하는 날까지 '[특집]강명구의 유라시안 평화마라톤'코너에 실을 계획이다.

사진 : 강명구, 선한길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강명구선수유라시아평화마라톤 149일째(2018년 1월 27일)

강명구 시민통신원  myongkuka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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