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는 1010년 베트남 리[李] 왕조가 수도로 정한 뒤, 1802년 베트남 마지막 응우옌 왕조가 수도를 후에로 옮길 때까지 베트남 수도였다. 1902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수도가 되었고, 일본 점령기(1940~45)에도 행정중심지였다. 일본이 패망한 1946년 다시 프랑스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1954년 프랑스 패배 후 북베트남의 수도가 되었다. 이때 호찌민(사이공)시는 남베트남의 수도가 되었다. 미국과 20년 전쟁 후 북베트남이 승리하면서 1976년 통일 베트남의 수도가 되었다.

우리가 하노이에서 묵은 곳은 구시가지 내에 있는 호텔이다. 거리가 반듯하게도 비스듬하게도 이어지는 구시가지는 꼭 가봐야 할 하노이 명소라고 한다. 보통 구시가지라 함은 우리 북촌 같은 곳이나 프라하의 구시가지 등을 생각하기 쉬운데 이곳은 정말 다르다. 예스러움이 없는 네모 반듯한 이런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대만의 구시가지와 정말 똑같다.

구시가지는 리[李] 왕조가 사용할 물건을 만들기 위해 전국 유명 장인들을 불러 모으면서 36개 거리로 시작되었다. 이후 무역 상인과 공예가들이 모여들면서 작은 가게를 열고 상가를 형성하여 현재 57개 거리로 확장되었다. 보통 거리이름이 항박, 항꽉 이렇게 ‘항’자가 앞에 붙는다. ‘항’은 상품이라는 뜻이다. 항박 거리는 은공예품 파는 거리, 항꽉 거리는 부채 파는 거리, 이런 식으로 거리마다 파는 상품이 다르다. 지금은 관광객이 몰리면서 음식점, 여행사, 편의점 등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 돌아다니며 보면 여전히 특화상품 판매거리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 호안키엠 호수의 밤

하노이에 도착한 첫날 유명한 호안키엠 호수도 볼 겸, 구시가지 구경도 할 겸 나갔다 기겁을 했다. 차와 오토바이와 사람들이 질서 없이 엉켜서 다녔다. 세 존재가 서로를 무시하고 막 다니는 것 같았다. 다낭도 좀 오래된 지역에 갔을 때 그런 무질서한 곳이 있었는데 다낭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구시가지 대부분 길에 신호등이 없었다. 차나 오토바이는 절대 사람들에게 양보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건너야 할지 막막해서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다, 지나가면 바로 옆에 바싹 붙어 따라 가곤 했다. 택시기사 말로는 교통사고가 많다고 했는데... 사고를 본 적은 없다. 우리도 3일 정도 지내다보니 좀 익숙해져서 타존재를 조금씩 무시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하노이는 1000년 역사에 걸맞게 궁전과 수백 년 된 건축물들이 많았지만 대다수가 사라지고 없다. 특히 베트남 전쟁 시 미군 폭격으로 많은 유서 깊은 건물들이 사라져 아쉬움이 크다. 

그래도 하노이에서 가고 싶은 몇 곳을 뽑아 보았다.

1. 역사박물관, 2. 문묘(공자묘), 3. 하노이 고성, 4. 호아로 수용소, 5. 호찌민 기념관 등이다. 다섯 곳 모두 5시까지 업무 마감이라 이중 문묘, 호아로 수용소, 역사박물관만 돌아보았다.

먼저 문묘에 갔다.

문묘에 들어갔을 때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구시가지는 차량 경적, 오토바이 붕붕 소리, 사람 소리, 각종 냄새가 범벅이 되어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잠시 쉴 공간에 온 것 같았다. 물론 문묘도 관광객들이 많아 조용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푸른 나무와 오래된 건축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잠시 해방된 기분을 느꼈다.

문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중국 산둥성에 있는 공자묘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베트남이 중국과 같은 유교문화권이며 한자문화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1070년 건설된 문묘는 1076년 유학을 가르치는 서원(국자감)까지 갖추면서 베트남 최초의 국립대학이 되었다.

문묘에는 4개 출입문을 지나야 공자를 모신 대성전에 갈 수 있다. 이 중 3개의 문이 참 아름답다.

▲ 1문과 2문
▲ 2문과 3문 사이의 호수 그리고 제일 아름다운 3문

대성전 안에는 공자를 가운데로 세 명의 제자(안회, 증자, 맹자)가 함께 모셔져 있다.

▲ 공자님을 모신 대성전
▲ 대성문의 공자님과 제자님 모신 곳

대성전을 지나 국자감으로 가는 홀에 목이 긴 새가 거북이를 질끈 밟고 서있다. 사람들이 거북이 머리와 새의 배를 쓰다듬으려 줄을 서있다. 국자감 앞에서 소원을 빌면 시험에 합격한다고 한다. 나도 잠시 미신에 홀려 딸의 합격을 기원하며 새의 배를 쓰다듬었다.

▲ 거북이를 질끈 밟고 있는 새
▲ 나무가 독특해서 찰칵.. 가지가 내려와 뿌리가 되었다. 원래 가지와 뿌리는 하나임을 증명.
▲ 졸업식을 하러 온 학생들. 베트남 최초의 대학인 국자감이 있던 곳이라 졸업식을 하러 많이 온다고 한다. 학생들이 사진에 포즈도 취해준다.

 

그 다음 방문한 곳은 호아로 수용소다.

1896년 프랑스 식민정부가 베트남 독립투쟁가를 잡아 가두기 위해 만든 수용소다. 프랑스는 중앙형무소라 불렀지만 베트남인들은 호아로 수용소라 불렀다. 호아로라는 말은 ‘화로(火爐)’라는 말이다 화로 만드는 길 위에 지어졌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지만 독립운동가들은 호아로를 ‘불타는 용광로’란 의미로 해석했다. 원래 450명을 수용하는 곳이지만 1930년에는 2000명까지 수용했으니 그 열악함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열악함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감옥을 학교로 생각했다고 한다.  서로 격려하며 교육하여 독립투쟁 의지를 더 단단히 갖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고 한다.   

▲ 왼쪽이 독방실, 오른쪽이 2인실
▲ 남자 수용소, 발을 전부 쇠고랑에 채워놓았다. 왼쪽 하단 끝에 보이는 것이 오른쪽 하단에 크게 찍은 화장실.

1789년 자유, 평등, 박애를 내걸고 프랑스 혁명은 시작되었지만, 프랑스가 자국민 아닌 타민족에게 행한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 부족’이라는 말로는 너무도 부족한 비인간적인 학대와 잔혹한 고문이었다. 마당에서는 기요틴으로 사람 목도 잘랐다.

▲ 오른쪽이 기요틴, 왼쪽 상단이 고문도구, 하단이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여자 수용소. 자세히 보면 아이들도 있다.

프랑스가 물러가고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면서 호아로 수용소는 미군 포로를 수용했다. 미군 포로들은 호아로 수용소를 힐튼호텔에서 이름을 따와 ‘하노이 힐튼’이라 불렀다. 프랑스는 베트남인에게 말할 수 없이 잔인한 대우를 했지만 베트남은 미군 포로들에게 너그러움과 친절을 베풀어 최대한 편의를 제공했다. 지금도 ‘하노이 힐튼’에 수용되었던 군인들이 베트남을 기억하며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수용소를 다 돌아보고 나니 방명록이 보였다. 잠시 훑어보니 영어가 대다수지만 한국어로 쓴 글도 있었다. 사과문은 없었다. 한 번의 사과글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과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반가웠다. 영어로 이리 적었다.

“나는 한국인입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 군인들이 와서 아이들, 여성들을 포함하여 죄 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그들을 대신해 사과합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 100명 이상의 재소자들이 탈옥했던 하수도. 못 먹어 너무 말라서 하수도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 호아로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추모비

 

그 다음 간 곳은 역사박물관이다.

하노이에는 박물관이 많다. 역사박물관, 여성박물관, 미술박물관, 군사박물관, 호찌민박물관, 민속학박물관이 있다. 민속학박물관에 가고 싶었다. 하노이 시내에서 거리가 좀 떨어져 있지만 박물관 규모나 전시물이 상당히 훌륭하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택시를 타고 가는데 이상했다. 베트남에서는 거의 택시로 이동했는데 올라가는 요금이 달랐다. 금방금방 철컥철컥 소리가 났다. 말로만 듣던 5배 이상 요금이 나오는 '미터기 조작택시'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마침 롯데마트가 보이기에 세웠다. 경찰을 부르려 했는데 남편과 딸이 못하게 했다. 시간 다 날아간다고... 할 수 없이 그냥 보내고 얼떨결 온 김에 롯데마트 구경도 하고 쇼핑도 하고나니 민속학박물관은 포기해야했다.

베트남 롯데마트는 성공한 것 같다. 그날이 일요일이기도 했지만 계산대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물건을 한 가득씩 샀다. 어마어마하게 크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 롯데 슈퍼가 2개나 있다. 속으로 대기업이 나가서 돈 벌 생각은 안하고 동네 소자본을 갉아먹는다고 미워했는데... 베트남에서 선전하고 있는 롯데를 보니 기특한 마음까지 들었다. 아... 역시 난 그것밖에 안되나 보다.

역사박물관은 건물이 참 멋지다. 유럽풍 냄새가 물씬 난다 했더니 프랑스가 식민 지배를 위한 총독 관저로 건설했다고 한다. 두 동이 있는데 한 곳은 BC 7세기 '동썬' 왕조부터 1945년 '응우엔' 왕조까지 역사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길 건너편 동은 인도차이나 전쟁부터 베트남 전쟁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진설명 위주로 전시되어 있다.

▲ 석상. 불교국가임을 알려준다.
▲ 공예품
▲ 공예품

바다를 길게 접한 베트남은 내륙 국가들이 탐을 낼만한 요지 중 요지다. 역사박물관 기록에서 보면 베트남은 끊임없는 외침과 싸웠다. 그리고 그 모든 외침을 막아냈다. 베트남 사람들 체구는 작다. 그 작은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싸울 때는 무섭도록 끈질기게 싸웠다. 그러면서도 이겼다 싶으면 너그러워졌다. 그 작은 체구에 그 넓은 너그러움이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근 43년간 전쟁이 없었던 것은 베트남이 패자에게 행한 너그러움의 결과가 아닐까? 그동안 맛보지 못했을 이런 평화시대가 오래오래 지속되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 비오는 하노이 구시가지

폐관시간에 맞추어 박물관을 나왔다. 오늘이 마지막 베트남 저녁이다. 유명한 베트남 마사지를 받으면서 마사지사에게 남은 사과를 해야지 하고 맘을 먹었는데 하지 못했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시간을 때우려고 하노이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다 한 상점에 들어갔다. 이것저것 물건을 보는데 남자 사장님이 관심을 갖고 친절하게 상담해줬다. 계산대에서 물건 값을 계산하고 멀찍이서 종업원과 이야기 하고 있는 사장님에게 갔다. 툭툭 치니 뒤돌아보았다. 호아로 수용소에서 썼던 그 말 그대로 사과했다.

그도 역시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지만 곧 그 눈에 부드러움이 담겼다. 그는 가게 문 앞까지 와서 나가려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기꺼이 손을 내밀어 그 손을 잡았다. 그는 아쉬운 듯, 내 어깨를 치며 한 번 더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최대한 따뜻함을 담아 잡았다. 그는 그렇게 따뜻한 눈과 손으로 내 사과를 기꺼이 받아줬다. 가게를 나와 걷는데 괜히 마음이 떨렸다. 이를 알았는지 딸이 “엄마, 잘 했어” 해줬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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