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294~298일

발을 디디면 먼지가 구름처럼 올라오는 메마른 대지를 끝없이 달린다. 우리는 이 푸석푸석한 대지 위에 살을 부비며 살면서 서로에게 먼지가 될지언정 비처럼 촉촉하게 스미지 못한다. 늘 단비를 그리워하며, 가슴에 젖어드는 비를 맞아보지 못하고 메마르게 살아간다. 가슴엔 아주 오래 꽃을 피우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한 번도 꽃을 피워보지 못했다.

▲ 6월 21일 달리면서

실크로드! 그 이름과 역사만으로도 나그네에게 묘한 설렘과 도전과 모험을 떠올리게 하는 길이다. 지난날 실크로드에서 방울소리에 먼지 일으키며 지나다니던 카라반의 긴 행렬은 더 이상 찾을 길이 없지만, 비단을 싣고 사막 밤하늘별을 보며 긴 여행을 떠나는 그들 발자취를 더듬으며 달리는 길에는 그들 숨결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어쩌면 나그네에게 아름다움이란 절경의 산세나 계곡, 기암괴석에만 있지 않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환경에 있을 수도 있겠다.

사막은 한발이라는 여신이 지배하는 세상인 것 같다. 한발의 다른 이름은 가뭄이다. 중국신화에는 푸른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신으로 등장한다. 이 여신은 황제와 치우가 맞붙었던 탁록의 전투 때 황제의 부름을 받고 천계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치우가 풍백과 우사를 시켜 일으켰던 폭풍우를 강력한 빛과 열로 날려 보내고 황제를 도와 승리 일등공신이 된다. 그녀는 이 싸움에서 지나치게 힘을 쓴 탓에 다시 천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로부터 지상에는 심각한 가뭄이 들게 됐다. 그녀의 이름이 한발이다. 물론 이 치우는 우리 붉은악마의 상징이다.

황량한 사막에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바리쿤을 향해 산길을 넘고 있을 때였다. 해발 2천m가 넘는 이곳은 바람이 아주 심한 곳이다. 어느 곳이나 성질이 다른 두 기압이 만나면 바람이 심하게 분다. 투루판의 더운 공기와 바리쿤의 시원한 공기가 만나 일어나는 바람이 맞바람이 되어 고단한 발걸음을 더욱 고단하게 만든다. 지금껏 사막에서 만난 비라야 ‘호랑이 시집가는 비’ 정도였는데, 바람과 함께 몰아치는 비 때문에 앞으로 헤쳐 나가기가 만만치 않다. 우비를 찾아 입었지만 갑자기 떨어진 기온을 감당할 수 없어 옷을 찾아 안에 덧입었다.

▲ 6월 22일 비바람 맞으며 Qijiaojingzhen(七角井镇) 후방 42km에서 Xialaobaxiang(下涝坝乡) 후방 30km까지

비가 내리자 메마른 대지 위에서 환희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시들어가던 풀들이 어깨를 활짝 벌려 꽃봉오리를 피워내고, 한가로이 노니는 야생 낙타와 말과 소, 양들이 즐거워 춤을 추는 듯하다. 어디서 왔는지 새들이 짹짹 날아든다. 물을 머금은 초목이 없는 사막에 큰비가 오면 홍수가 나기 쉽다. 조금 대지를 적시는가 싶으면 바로 물줄기가 꽐꽐 쏟아져 내린다. 사막에서 비가 내리면 바싹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 6월 24일 25일 달리면서 만난 바리쿤 근처의 자연

중국인들에게 상상 속 동물인 용은 구름과 바람을 일으키고 천둥, 번개를 자유자재로 부려 비를 내리는 신통력이 있다. 농사를 짓던 중국인들이 최고로 치는 인생의 네 가지 기쁨이 있다. 그 첫째가 오랜 가뭄 끝에 만나는 단비다. 두 번째가 머나먼 타향에서 친구와 오랜만의 재회다. 세 번째가 신혼 첫날 방에서 타오르는 촛불이고, 그 다음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이다.

연일 계속되는 사막 열기 속에 기진맥진한 내게 하늘이 용을 보내주어 비를 뿌려주니 내게는 첫 번째 큰 기쁨이 된다, 외로움 속에 달리는 사막에서 맞는 단비가 오랜 친구 같이 다정하게 느껴지니 그 또한 기쁨이다. 비에 젖어 생기가 돋는 대지가 첫날밤 새색시처럼 아득하니 이 또한 내게 큰 기쁨이다. 이 길을 달리며 평범하고 찌질하던 내 삶이 평화 마라토너로 거듭났으니 어찌 과거에 급제한 것에 비하겠는가?

투루판에서 하미로 가는 길을 바리쿤을 거쳐 가는 길을 택했다. 투루판이 해수면보다 낮은 도시라면 바리쿤은 해발 2천m가 넘는 고산지대 초원이다. 주위 다른 도시들이 다 열사의 더운 바람으로 숨이 꽉꽉 막힐 때도 이곳만은 시원한 바람이 분다. 어떤 이는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는 이도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바리쿤 호수를 끼고 펼쳐지는 초원은 그 푸름만으로도 눈이 부시다. 이곳에서는 내가 그렇게 무겁게 느꼈던 절망의 무게가 얼마나 가벼운 지, 그렇게 작게 보았던 희망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극명하게 보인다.

▲ 2018년 6월 24일 일요일 Xialaobaxiang 후방 72km에서 Huayuanxiang 5km 전방까지 달리면서 l

바리쿤은 동톈산 분지에 자리 잡은 마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보았음직한 호반의 초원 도시이다. 한때 양과 조랑말 천국이었다. 포류국(浦類國)이 있었다는 한대(漢代)나, 명대(明代)에는 서몽골 천막이 호수를 빙 둘러 싸여있었고, 한때 4만 마리 군마를 공급했다던 청대(淸代) 토성은 지금 도심 한가운데 무너진 채 자리하고 있다.

▲ 바리쿤의 성과 성곽

나는 사막을 달리면서 태양과 달리기 경주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태양이 저쪽 동쪽 끝에서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 시작하고, 태양이 기승을 부리는 한낮 더위가 시작되기 전에 끝마치려 열심히 달린다. 내가 하루에 마시는 물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과보가 지는 태양과 달리기 시합을 하면서 마신 물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많다. 그야말로 마시고는 가도 짊어지고는 갈 수 없을 만큼의 물을 마셔댄다.

중국에는 태양과 달리기 경주를 하는 거인 과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는 지는 태양을 쫒아가 보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달렸다. 천리를 달린 그는 태양이 지는 우곡이라는 곳까지 달렸지만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황하와 위수 물을 다 마셔버렸다. 그 물은 거인 과보에게는 접시 물에 지나지 않았다. 갈증이 가시지 않은 그는 북쪽 바이칼 호수의 물을 마시기 위해 달려가다 너무나 지쳐 쓰러져 죽었다. 그가 죽은 자리는 커다란 복숭아나무 숲이 되었다 한다. 상상력이 풍부한 중국인들마저 관련지어 상상하지 못하지만 거기가 바로 무릉도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태양을 쫒아 달리다 목이 타 죽은 자리에 생겨난 복숭아나무 숲. 나의 태양은 평화이다. 평화를 쫒아서 지금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만약 황하 물이 다 말라 없어졌다는 소리가 들리거든 내가 다 마시고 평양을 향해 달려가는 줄 알아라! 나는 결코 과보처럼 쓰러지지 않는다.

▲ 6월 21일에서 6월 25일 달리면서 만난 이정표
▲ 6월 24일과 6월 25일 만난 관광 안내팔

 

▲ 6월 25일 만나나  바리쿤의 이런 저런 모습

 

▲ 2017년 9월 1일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2018년 6월 25일 바리쿤 지나 30km까지 총 누적 최소 거리 10,132km, 중국 누적거리 1,194km)

* 평화마라톤에 대해 더 자세한 소식을 알고 싶으면 공식카페 (http://cafe.daum.net/eurasiamarathon)와 공식 페이스북 (http://facebook.com/eurasiamarathon), 강명구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kara.runner)에서 확인 가능하다. 다음카카오의 스토리펀딩(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8063)과 유라시안마라톤조직위 공식후원계좌(신한은행 110-480-277370/이창복 상임대표)로도 후원할 수 있다.

[편집자 주] 강명구 시민통신원은 2017년 9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년 2개월간 16개국 16,000km를 달리는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시작했다. 그는 2년 전 2015년, '남북평화통일' 배너를 달고 아시아인 최초로 미대륙 5,200km를 단독 횡단한 바 있다. 이후 남한일주마라톤, 네팔지진피해자돕기 마라톤, 강정에서 광화문까지 평화마라톤을 완주했다. <한겨레:온>은 강명구 통신원이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달리면서 보내주는 글과 이와 관련된 글을 그가 마라톤을 완주하는 날까지 '[특집]강명구의 유라시안 평화마라톤'코너에 실을 계획이다.

사진, 동영상 : 강명구, 현지 동반자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강명구 주주통신원  myongkuka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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